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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14) -작가의 삶이 작품의 색깔을 만든다[1]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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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14)     -이호철

 

 

작가의 삶이 작품의 색깔을 만든다[1]

장편소설은 그렇게 일단 작가의 풍요한 안목과 식견, 꾸준한 공부, 자료수집의 터 위에서 특유의 입심과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프랑스 같은 데서는 장편소설을 평론이라든지 철학논문이라든지 그런 것과 두루두루 가깝게 생각했다는 것도 이제 이해가 되리라 믿어요.
그러니까 토마스 만 같은 특별한 천재적인 작가말고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아직 나이 어린 사람들이 함부로 장편소설에 달려든다는 것은 다분히 무리이고 만용일 거예요.
어느 정도 인생을 알 만큼 알고 나서 그렇게 성숙되었을 때 대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요컨대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런 소설을 썼느냐, 하는 쪽으로 주안을 맞추어서 보면 거의 예외가 없어요.
아, 바로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소설을 썼구나, 하고요. 대체로 소설가들의 집안 배경을 보면, 민중이네, 뭐네, 그런 쪽하고는 거리가 있어요. 행세깨나 하던 집안 자손들이 많아요. 이건 어느 나라나 예외가 없어요. 명문가(名門家), 대가(大家)의 맨 끝머리에서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듯이 예술가들이 나온다는 거지요.

어떤 소설에 홀딱 반하게 되면 곧장 그 소설을 써 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게 되고 그렇게 결국은 그 작가에 관해 시시콜콜 다아 알게 되지요.
저도 고 1,2학년 때는 안톤 체호프를 환장하게 좋아했어요. 그 뒤로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등 19세기 러시아 소설들에 흠뻑 빠져 들었는데요.
처음에는 그렇게 체호프의 작품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까지 빠삭해지더라구요.
그이가 1860년생이니까 제 증조부 나이하고 비슷한데, 저는 제 중조부는 전혀 떠올리지 못해요. 그야말로 칠흑 캄캄이지요.
그런데 몇 만리 떨어진 러시아땅에 우리 증조부가 살아 있던 그때에 살았던 안톤 체호프에 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체호프가 태어나던 바로 그 해의 농노 해방 떄 그이의 조부는 농노 신분에서 벗어났고, 부친은 타간로그라는 거리에서 잡화상을 했고, 형제 자매가 몇이고, 의과대학 다닐 떄는 폐병으로 골골하면서 용돈 벌이로 체혼테라는 가명으로 경쾌하고 웃기는 콩트류를 수없이 써 냈고, 그게 어찌어찌 코로렌코의 눈에 띄어 격려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소설의 길로 들어섰고, 사람이 덩치는 크면서 아주아주 선량했고, 등등, 심지어는 저는 안톤 체호프의 유언 때문에 독일말도 그 한마디만 일찍부터 알고 있어요.
“Ich starbe.” ‘나 죽는다’지요. 독일의 유명한 광천수 요양소에 가서 폐결핵을 치료하다가 어느날 꼭두새벽에 마누라 크니페란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아요.
크니펠은 그 당시 모스크바 예술좌의 유명한 배우였죠. 그이는 1957년엔가 아흔일곱 살로 죽더군요. 결혼도 않고 평생 체호프 박물관장을 했던 누이동생 하나도 아흔 다섯 살까진가 장수하더군요.
이런 식의 별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알게 되더라구요.

암튼 그렇게 1904년 체호프 나이 만 마흔네 살 떄, 아내 크니펠 혼자서 지켜 보는 가운데 ‘나, 죽는다’라고 독일어로 말하고 조용히 눈을 감아요.
바로 창 밖으로는 희끄무레 동이 터 오는데 마침 전등에 부딪치며 큰 벌 한마리가 윙윙윙, 방 안을 돌아가지요.
이 광경은 크니펠의 수기에 적혀 있더라구요. 그 작가의 소설이 좋으니까, 그것을 써 낸 사람에 대해서도 이 정도로 속속들이 알게 되더라구요.
같은 시대의 내 직계 조상인 증조부에 대해서는 전혀 새까맣게 모르면서도, 몇 만리 바깥으로 떨어진 안튼 파브로비치 체호프라는 러시아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속속들이 알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결국 다른 것이 없어요. 앞으로 좋은 소설을 쓰겠다? 써보고 싶다? 그런 행운이 그냥 가만히 앉아서 가능해질 것 같습니까.
요컨대 구경적으로 끝머리로 귀결된다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에요.

덮어놓고 멋있는 소설을 써야겠다, 세계 문학사에 남을 소설을 쓰고 싶다, 라고 수십번 수천번 혼자 다짐을 해본들, 대체 무얼 씁니까.
무언가, 자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화끈하게 뜨덥데 살 때 비로소 그 무슨 쓸거리라도 생길 것 아닙니까.
일제치하의 김소월이나 김유정, 이상 같은 사람도요,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 시대를, 일제 식민지치하 그 시대를 감기 앓듯이 앓았던 사람들이지요.
그냥 그렇게 저들 생긴 대로 그 시대를 신열을 내며 앓았던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시며 소설 몇 편을 그 감기 자국으로 뽑아 올린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문학을, 자기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무얼 써 내겠다, 명작을 써 내겠다, 이건 엄청난 오산이에요. 원천적으로 잘못 되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루하루 본때 있게 알맹이 꽉 차게 화끈하게 사는 것이 천만 번 중요해요.
맨스필드처럼 그렇게 왕창 한번 꺠져 보는 것도 나름대로 화끈하게 사는 길일 거예요.

그래서 거듭 다시 강조하거니와, 매일 일기 쓴느 것이 아주아주 중요해요.
매일매일 자기의 삶을 되챙겨 보는 일, 매일 대학노트 한 쪽씩 꺠알 같은 글씨로 그날그날의 자기 삶을 꽉 채워 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거 간단치는 않아요. 웬만한 지구력과 끈기 안 갖고는 힘들지요.
이런 것, 못하겠으면, 미리 자신 있게 장담하거니와, 아예 일찌감치 집어치우는 게 나을 겁니다.

소설 쓰자고 해서 꼭 소설 그 자체만 생각하질 마세요.
친구들한테 편지도 많이 쓰세요.
연애도 많이 하고 실연도 많이 하세요.
그뿐이겠습니까. 여행도 많이 하고 모험도 많이 해보세요.
우선은 화끈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다음주에 계속>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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