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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11) -장편소설 쓰기의 실제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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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르에서 가져옵니다.

 

소설 창작 강의 (11)   -이호철



장편소설 쓰기의 실제

우리나라 근대 이후의 장편소설들을 보면 정작 장편은 매우 드물어요. 대개가 잡지나 신문의 연재소설들이었죠. 박경리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등도 모두가 연재소설들이었죠.
저도 그래요. 흔히 대하소설이라고 이름 붙은 그런 긴긴 대장편소설은 저는 못 썼습니다만은, 제 경우도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항간에 알려져 있는 『소시민』이라든지 『서울은 만원이다』『남풍북풍』,『재미있는 세상』 등 모두가 예외 없이 잡지나 신문에 연재했던 것을 뒤에 단행본으로 꾸려 냈던 거예요. 그런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대체로 장편소설들을 그냥 스적스적 슬렁슬렁 별로 힘 안들이고 썼어요. 신문인 경우는 매일, 그리고 잡지인 경우는 매달, 한 회분씩 슬렁슬렁 써지는 대로 써서 몇 달이나 혹은 몇 년 지나면 한 권짜리거나 몇 권짜리 장편소설이 되어 나왔던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장편소설 쓰기가 훨씬 쉬워요. 일단 소재를 정해 놓고 처음 시작만 해놓으면 신문연재인 경우는 원고지로 매일 8장씩, 그리고 잡지 연재인 경우도 매달 한번씩 소정 장수씩 슬렁슬렁 써서 넘기니까, 단편소설 쓰기보다 쉽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했어요.
제가 1966년에 『서울은 만원이다』를 동아일보에 연재했었는데요. 그 작품도 저로서는 대표적으로 슬렁슬렁 전혀 힘들이지 않고 썼던 작품이에요.
『서울은 만원이다』의 배경
그때 동아일보 문화부장은 바로 소설가 최일남 씨였는데요. 1966년 1월 12일인가, 그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어요. 손창섭의 연재소설 『길』이 거의 끝나가는데 그 뒤를 잇대어 연재소설을 쓰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첫 시작이 2월 초쯤 될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20일 남짓 두고 첫 교섭을 받은 셈이지요. 기일이 너무 촉박하였지만, 저로서야 감지덕지 했을 밖에요. 이런 큰 신문에서 연재소설의 청탁을 받으리라고 어찌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그때는 신문 부수가 연재소설로 좌지우지 되었었고, 지금처럼 면수도 많지 않아서 신문소설 연재를 어느 작가를 할 것이냐가, 그야말로 신문사로서는 사활이 달려 있었거든요. 신문사 간의 경쟁도 주로 신문소설의 인기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구요. 그러니 연재소설 제목도 신문사측과 의논해서 정하곤 했어요.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어요. 그날부터 저녁이면 청진동 근처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야들아, 신문소설 제목 하나 뽑아 보아라, 채택이 되면 걸판지게 술 한잔 사마, 하고 광고를 해댔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어느날 저녁 혼자 잠자리에서 비몽사몽간에 그 제목 ‘서울은 만원’, ‘서울은 만원이다’가 떠올랐어요. 그 무렵 나는 원효로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제목이 떠오르자, 됐다,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었으니까요. 그렇게 처음부터 그 제목이 마음에 쏘옥 들었어요. 신문사측에서도 대뜸 좋다, 괜찮다며 반겼어요. 그러니까 그게 17,18일께였어요. 그 당시 서울 인구가 380만 명. 지금 1997년의 서울 인구가 1천 200만 명임을 생각하면 그때 그야말로 엄살을 떨었던 거지요.
그나저나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제목은 일단 정했다고 하지만 대체 무얼 쓸 거나? 대체 무얼 씁니까? ‘서울은 만원이다’의 그 속알맹이를 무얼로 채워 넣느냐, 이거예요. 거짓말 안보태고 하루하루 피가 마르더라구요. 이거야 누구한테 협조 요청을 할 수도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일단 서울 시청을 찾아갔어요. 이만저만 해서 찾아왔다니까, 아, 그러냐며 나름대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자료 같은 걸 챙겨 주는데, 이거야 맨 통계 나부랭이예요. 구청이 아홉 개 있고 인구가 380만이다, 그럭저럭 요것 하나 건져졌지만, 구청 아홉 개와 인구 380만이라는 것으로 대체 소설이 될 구가 있는 겁니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요. 요컨대 ‘서울은 만원이다’로 소설 제목을 정했으면 우선은 서울이라는 곳에 대해 남보다 아는 것이 많아야 할 터인데, 제가 도대체 남보다 뭘 많이 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무얼 쓰겠다는 거냔 말이에요. 서울시에서 자료 구해 온 것,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소설은 나오지가 않더라구요. 손창섭의 『길』이 2월 6일자로 끝나게 되어 7일자부터 뒤를 이어야 할 판인데, 벌서 20, 21일이 되어 오니 이거야 미치겠더라구요.벌써 공고용으로 이일녕 씨와 사진도 찍고 ‘작가의 말’이라는 것도 두리뭉실하게 써 넘기긴 했지만, 정말 바싹바싹 간이 타 들어오더군요. 내 그런 처지는 아랑곳없이 이일녕 씨는 제목 좋다고, 이제 경천동지할 소설이 나올 거라고 불난 데 부채질까지 해대는 거예요.
그렇게 다시 이틀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고민 하다가 24일이나 25일쯤이었을 거예요. 원효로 2층 하숙방에서 햇살이 좋은 오후나절이었어요. 오늘은 천하 없어도 결판을 내자, 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그 순간이였어요. 문득 ‘무단 상경소녀’, ‘무단 가출소녀’라는 여섯 자가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이거야, 저승에 계신 우리 어머니가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이더라구요. 옳지, 됐다! 싶은데, 그 다음은 ‘어디서?’라는 물음이 어어지더라구요. 그래서 대뜸 ‘통영에서’라는 대답이 떠올라요. 지금의 충무시지요. 그러니까 ‘충무에서 무단 상경한 소녀’ 어때요? 무언가 소설이 될 것도 같은 낌새가 다가오지요? 벌써 이렇게 되니까, 감자줄기에서 감자 알갱이 달려 올라오듯이 이것저것 한꺼번에 달려 올라오더군요. 나이는 현재 스물세 살, 2년 전 스물한 살에 상경, 을지로 국도극장 옆의 일식집에도 있다가 국화다방에도 있다가 서린동 근처에 방 하나 얻고 몸 팔고 있다, 대상 이쯤 해놓으니까 대번에 왕창 쓸 것이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하필 통영이냐 하면, 그 몇 년 전에 부산서 여수까지 연락선 타고 가던 길에 바로 통영에서 그때 제 부친과 8촌간 되는 한 분이 계셔서 한 이틀 그 댁에 묵었던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그 거리의 풍경을 인상깊게 보았더랬어요. 해변가의 목욕탕이며 포장 친 음식점들이며 그 거리 풍정까지 무더기로 떠오르지 뭡니까. 그래서 그 무작정 상경소녀의 고향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통영으로 했던 겁니다.
집엔 아버지 어머니와 남동생이 하나 있고, 아버지는 하는 일이 없이 노상 옛날의 뼈대 있는 자기 집 지체나 주절대며 체통이나 차리고 앉았고, 어머니가 별수없이 새벽의 재치국 장사에 나서서 벌고 있으니 온 식구가 굶으며 말며 하고, 오빠 하나는 이미 장가를 들어 제 처자 떠메고 여수의 무슨 공장에 공장장으로 가있는데, 제 처자 먹여 살리기도 허덕허덕이다, 집안 살림 거들다가 도저히 더 이상 못 견뎌, 혼자 가출을 단행해서 상경, 덮어놓고 서울에 온 거다, 대강 이렇게 정해 놓으니까, 이 소설의 기본 골격은 벌써 죄다 잡히는 느낌이더라구요.
그 다음은 얼기설기 얽는 일만 남더라구요. 얽자면, 결국 상대역 남자 아닙니까. 그것도 아주 간단해지더먼요. 고향 쪽의 동기동창생 하나로 나처럼 혼자 단신으로 월남한 친구가 있는데, 그 행태가 아주아주 소설로는 ‘왔다!’싶은 사람이에요. 복잡하게 고민할 것 없이 그 친구를 가져다가 이 가출소녀와 짝을 맞추어 놓으니까, 이거 또한 천상배필이지 뭡니까. 아니, 아니, 이 경우는 천생배필은 아니고, 소설 주인공들로는 이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웃기는 구석이 있어지더라구요. 이렇게 되자, 나는 소설쓰기에 아직 착수하기 전임에도 벌써부터 혼자서 우스워서 혼자 낄낄대곤 했다니까요. 그리하여 여자는 스물 세 살, 그리고 남자는? 그것도 내 동창생 친구 그대로 서른 다섯 살로 해놓았어요.
그 다음, 제일 중요한 것이 남았지요. 뭐냐. 이름 짓는 거더라구요. 그런데 이것도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5분 정도 생각했을까요. 번갯불마냥 좋은 이름이 떠오르더군요. 길녀, 좀 좋습니까. 길할 길(吉)자에 계집 여(女), 길녀. 이런 이름을 지어 놓으니까 벌써 그 계집아이의 단아한 생김새며 성격이며 목소리, 심성까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더라구요. 가령 왕순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엉덩짝이 함지짝만하게 푸짐하고 넉살 좋고 목소리도 징글징글 했을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 구상하는 데 그야말로 채 한시간도 안 걸렸어요. 이건 지금 생각이지만, 그리고 반 우스갯 소리로 하는 얘기입니다만, 분명히 그날의 내 일진이 좋았던 것 같아요.
길녀가 처음에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서 을지로의 국도극장 옆의 일식집에 있었고 국화다방에도 있었다는 것도 나대로 그만한 건더기는 있였어요. 나는 56년 초에 난생 처음으로 광문출판사라는 데 취직을 했었는데, 그게 초동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무렵에 한창 검인정교과서 제작으로 출판사들마다 난리를 피울 때 였는데 그 광문사에서도 간간이 저자들 대접하기 위해 그 출판사 뒷골목의 국도극장 옆으로 빠지는 중간에 모양 좋은 일식집 하나가 있어. 나는 졸때기 편집사원으로 그런저런 심부름을 했을 것 아닙니까. 국화다방도 이름은 달랐지만 국도극장 바로 옆에 그때로선 고급 비스름한 2층 다방 하나가 있었어요. 그것들을 그대로 갖다 썼지요. 뭐. 물론 국화다방에서 길녀가 기상현이란 이리에서 상경한 주방 일을 하던 청년에게 우격다짐으로 당하던 이야기는 막말로 ‘거짓말’ 친 거죠. 기상현이라는 사람 자체부터가 생판 허구여서, 쓰면서 꽤나 고생을 했지만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길녀도 무슨 모델이 있었던 게 아니였는데, ‘거짓말’ 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이쪽은 처음부터 미끄럽게 술술 잘 풀리더라구요. 이런 건 역시 길녀라는 이름 덕을 보지 않았나 싶어요.
며칠 더 구상으로 꾸물거리다가, 28일쯤 오후나절에 드디어 첫 회를 착수했어요. 그날도 햇살이 기똥차게 좋았는데요. 펜을 들자마자 술술 미끄러지듯이 잘 나가지 뭡니까. 그렇게 두어 시간 걸려 일거에 3회분을 썼어요. 쓰고 나니까. 이제 이 소설은 끝났다, 싶어지더라구요. 그냥 큰 숨이 나오는 게, 물론 안도의 숨이지요. 이젠 이 사람들 생긴 만큼 형편만큼 이 서울바닥에서 돌아가게만 하면 되겠더라구요.
이렇게 해서 이 소설이 2월 7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8개월 정도 연재를 했지요. 그냥 슬렁슬렁 힘들이지 않고 써 나갔어요. 3회분 나가니까, 김기영 감독에게서 전화가 오더군요. 영화 계약하자고. 그때 계약을 하는 거였는데, 뒤로 미루었다가 결국 영화는 죽을 쑤었지만요. 그때 남재희 씨가 조선일보 문화부장이었는데 이 소설을 매일 재미있게 읽었나 보아요. 어느날 대머리집 술집에서 마주치자마자 길녀 잘 있느냐, 그런 여자 정도면 지금이라도 연애 같은 것 생각해 봄직 하다고 하지 뭡니까. 길녀에게 홀딱 반했더라구요. 같은 무렵에 후배 소설가 이문구 씨는 노량진 근처에서 도로 포장하는 일의 현장 책임자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동아일보 첫 가판만 나오면 천하 없어도 한 부 사서 그 연재부터 읽었다나요.
아무튼 이렇게 3회분, 원고지 25장 정도 써 놓으니까, 그 다음은 앞에 써 놓은 부분이 슬슬 끌어주는 대로 써 나가기만 하면 되더라구요. 다시 말해서 연재소설이라는 건 일단 첫 부분만 띄워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신문소설이든 잡지소설이든 그 정해진 분량만큼으로 앞의 것이 끌어주는 대로 슬렁슬렁 써 나가면 되더라구요.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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