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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10) -소설의 에센스, 단편소설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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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10)   -이호철

 

한미르에서 가져옵니다.



소설의 에센스, 단편소설


단편소설은 원고지로 70장짜리, 100장짜리, 요즘은 그보다 더 긴 단편소설도 많습디다만은, 요만한 분량으로 알뜰하게 이야기를 꾸려 내자니까 작가들마다 처음부터 버겁고 힘들어 해요.
그러니까 흔히 항간에는 장편보다 단편 쓰기가 더 어렵다는 소리도 없지가 않은데, 단편과 장편소설 쓰기와의 차이는 별 것이 아니에요.
장편소설 쓰기가 더 쉬울 리는 없고, 요컨대 대어드는 작가 자세의 차이지요.

지난 1세기간의 우리나라 소설들을 두고 볼 때도 세계적으로 내놓고 최고 수준으로 겨룰 만한 소설은 역시 단편소설 몇 편이 아닐까 싶어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도 국내에서 우리끼리는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지만 세계의 최고 수준의 장편소설들과 겨루자고 들면 통속적인 요소가 너무 많지요.
그 밖에 염상섭이나 채만식 같은 분의 장편소설 몇 개가 그런대로 눈에 띄지만, 그걸 세계에다 내놓고 “우리도 이런 게 있다”라고 당당히 나서기에는 좀 뭣해요.
그러나 단편소설은 어디에다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만한 수작들이 더러더러 있어요.

단편소설이든 장편소설이든 일단 쓰는 데 들어서는 똑같이 지고(至高) 최선(最善)으로 준열 치열해야 하는데,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장편소설 쓸 때는 연재라나 뭐라나, 작가 자세가 해이한 상태에서 쓰곤 했으니 지고 최선의 작품이 나올 수가 없었지요.
게다가 작단 안에서도 발표 매체와의 관계에서건 개개 작가들간에서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어영부영 그런 기준이 통용되고 있었지요.
말하자면 작가 간의 비교도 주로 단편소설 위주로만 있었지, 장편소설의 경우는 다분히 도외시하는 버릇이 생겼던 거예요.
이를테면 어떤 짭짤한 단편소설을 써 낸 작가냐, 하는 것으로 그 작가의 최고 수준의 작품을 기준으로 해서만 작단 서열 비슷한 것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작가들은 모두가 너도 나도 그런 작품 쪽으로만 열을 쏟았던 겁니다.

가령 보세요. 김동인의 「배따라기」,「광염 소나타」,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조명희의 「낙동강」,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계용묵의 「별을 헨다」,「백치 아다다」, 이태준의「달밤」,「복덕방」,「영월영감」,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거리」,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김유정의 「봄봄」,「동백꽃」, 이상의「날개」, 김정한의「사하촌」,최명익의「심문」,김동리의 「무녀도」,「산화」,「역마」,「등신불,」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곡예사」,「소나기」,정비석의「성황당」, 오영수의 「갯마을」,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김성한의 「바비도」, 손창섭의 「비 오는 날」, 전광용의 「흑산도」,정한숙의「전황당인보기」,오상원의 「유예」,서기원의 「암사지도」, 이호철의 「탈향」,「나상」,「큰 산」,「닳아지는 살들」, 하근찬의 「수난시대」,「삼각의 집」, 송병수의 「쑈리 킴」, 이범선의 「오발탄」, 최인훈의 「그레이구락부 전말기」, 그리고 60년대, 70년대, 80년대로 넘어오면 서정인, 김승옥, 이제하, 이문구, 이청준, 김문수, 황석영, 김원일, 송영,윤흥길, 조세희, 현기영, 박완서, 오정희,이문열, 최윤의 몇몇 단편들로 이어진다. 대강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일단, 독특한 자기 분위기, 자기 스타일을 최소한으로나마 갖고 있는 작가들.

작금에 프랑스에서는 ‘모파상 단편소설상’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단편소설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는 모양인데, 이런 현상은 사실은 80년대 미국의 단편소설 유행이 프랑스 쪽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것 같더군요.

영미 문학에서는 short story라는 것이 독자적 장르로서 있는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그런 것이 본시 없었어요.
반면에 영국에서는 단편 엔솔로지 같은 것이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나 봐요.
프랑스에서는 la nouvelle라고 해서 소위 중편소설에 해당하는 짧은 장편소설까지가 그 속에 들고, 영미의 단편소설에 해당하는 그런 장르가 애당초에 없다나 봐요. 물론 콩트는 프랑스에도 있죠.

한편 미국에서는 『뉴요커』 같은 잡지에 단편을 발표하고 나서, 그 뒤에 장편을 쓰는 그런 사례도 많은 모양인데, 프랑스에는 『뉴오커』나 『애틀랜틱 먼슬리』처럼 단편을 적극적으로 거재하는 그런 잡지가 없다는 겁니다.

독일도 대강 프랑스하고 비슷하다고 해요. 프랑스에서는 대체로 장편소설이 문학상을 획득하면서 신인으로 데뷔하는 것이 관례였다는 거죠.
말하자면 단편소설은 산문보다는 차라리 시게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는 거죠.
아주아주 에센스, 예술적인 향취의 진짜 맛이 단편소설이고, 장편은 말하자면 평론이라든지 철학논문이라든지 이런 것과 두루두루 가까운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장편소설은 그렇게 인생, 역사에 대한 광범한 지식과 투철한 인식 틀에서 나온다. 이거겠죠. 저로서도 대강 이렇게 보는 데에는 찬성을 하고 싶은데요.

요컨대 가장 좋은 단편소설은 한평생에 한두 작품만 나오는 것이어서 허투로 많이 쓸 생각일랑 않는게 좋을 겁니다.
여러분들로서는 과히 듣기 좋은 이야기가 못될 터이지만, 이런 종류의 소설 작법 강의를 보고 나서 그러저러한 잡지들의 매달 혹은 매 계절 마감날짜에 맞춰 기계적으로 써 갈기는 식의 전업(專業)형태로서는, 평생에 제대로 생긴 작품, 한 작품도 써 내기가 힘들 거예요. 물론 안톤 체호프 같은 특이한 예외는 없지 않지만요.

사실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소설 작법이라는 것은 애당초에 따로 없어요.
그냥 그때그때 그런저런 걸작을 써 낸 그런저런 작가의 그러저러한 자세와 치열한 삶의 형편이 있을 뿐이지요.
차라리 누군가는 그랬더군요. 걸작 소설을 쓰려거든, 이미 자기 속에 스며들어 와 있는 진부하게 낡은 상식적인 ‘작법’ 같은 것일랑 차라리 의식적으로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애당초에 어떤 테마나 내용도, 상식화된 소설 작법에 기계적으로 맞추어서 쓴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요.
새롭게 잡아 낸 주제나 아이디어를, 기왕의 소설 작법이나 문체, 언어로 써 내기에 적합한 경우란 결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야, 신춘문예 심사후기 같은 것을 흔히 보면, 기왕의 소설작법을 여전히 고집하는 작가, 비평가들도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해당 잡지의 편집자들 태반은 현재 항간에 넘치도록 나도는 단편소설들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을 거예요.
실제로 그이들이야말로 그 항간에 수다하게 나도는 작품들을 읽어 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가장 절실하게 새로운 것을 찾아 헤메는 사람들이지요.
어찌 그런 편집자들뿐이겠습니까, 이런 강의를 하고 있는 이 나만 하더라도 진짜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 점이지만, 그냥저냥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것을 한번 써라’라고만 아무리 강조해 본들, 그건 결국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제가 어쩌고 구성이 어쩌고 성격 창조가 어쩌고 문장이 어쩌고 하며 종래의 소설 작법을 이렇게 군시렁 거리고 있는 거죠.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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