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소설 창작 강의 (9) -현장감, 생동감이 열쇠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3. 31. 23:59

본문

역시 한미르에서 가져옵니다. 소설 창작 강의(9) - 소설가 이호철 현장감, 생동감이 열쇠 여러분 가운데 눈치 빠른 분들은 벌써 간파하셨겠지만. 아까 처음에 소재 상태의 이 콩트 이야기를 할 때, 저는 고기 굽던 손님 아줌마의 성격뿐 아니라 그 분위기며, 생긴 거며, 가늘가늘한 목소리며, 새벽기도 열심히 다니는 것까지 이야기했지요?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런 점이 가장 중요해요. 이게 바로 흔히 이야기되는 상상력이라는 거겠지요. 그러구, 이쪽 아줌마. 처음에 자리 바꿔 앉자고 한 넉살 좋은 몸집 큰 아줌마. 아니, 생각해 보세요. 그 소설의 작가인 제가 그 자리에 앉아 있길 했습니까, 어쨌습니까. 그렇다고 저녁 식탁머리에서 그 이야기를 한 아내가 그런 아줌마들 생긴 것까지 죄다, 이야기를 했는가요? 전혀 아니었거든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소설이 되자면, 그렇게 대조적인 인물 유형은 필수적이지요. 이를테면 이 소설을 쓰려고 대어 들자마자, 그 두 아줌마부터 손에 잡힐 듯이 작가의 마음속에 와 잡히는 것 아닙니까. 작가 자신도 바로 그 현장에 같이 앉아 있는 듯이. 이런 현장감, 생동감이야말로 소설에서 가장 으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소설을 쓰면서 작가인 나는,그 몸집 크고 엉덩이도 함지박만한 넉살좋은 아줌마가 지껄일 때는, 나도 모르게 벌써 그 아줌마의 걸걸한 목소리까지 흉내를 내면서 쓰게 되더라구요. 억양이며 말투까지 그대로 비슷해야 하니까요. 그건 소설에서 그야말로 생명이지요. 한편, 그 고기 굽던 여자, 비리비리하게 생겼지만 마음씨 좋고 어디서나 궂은 일 맡아하기 좋아하고 새벽에 늘 교회 나가고 가늘 가늘 한 목소리를 지닌 아줌마도 이야기하는 투며 억양이며 영락없이 그 여자다워야 하질 않겠는가요. 말도 필요 이상으로 또박또박 느릿느릿 하는 것도 아주아주 그 아줌마답지요. 그러구, 이런 아줌마는 이런 경우에도 꼭 끝머리에 “물론 그런 소리 미신이긴 하겠지만 말야”라는 소리도 집어 넣는다는 말입니다. 요 대목 쓸 때, 작가인 나는 스스로 무릎을 탁 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더라구요. 어떻게 순발력 있게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런 세부세부 들이 순전히 작가의 상상에 따라 ‘거짓말 한 거다’ 이거예요. 당연히 그랬을 것 아닙니까.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내는 이런 소리들까지는 안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소설은 첫째가 그 자리의 사람들 분위기, 현장감부터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거야말로 소설이라는 것을 꾸며 내는 핵심이고 시초죠. 이것 없이는 백날 가도 소설은 안 되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소설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부, 곧 세부 묘사, ‘디테일 묘사’예요. 그것의 누적이 바로 소설이지요. 그리고 그 생명은 생동감, 바로 ‘구체성’이지요. 이 콩트인 경우에도 “순희 밖에 있니?”하고 묻고 그 다음에는 “개 집에 개있니?”하고 묻잖아요. 그런 것이 이를 테면 읽으면서 묘미를 자아내고 독자들도 재미있어 한다는 말이에요. 이런 것을 독자들이 왜 재미있어 하는지 작가인 나도 잘 모르겠지만, 소설론 같은 데서는 더러 ‘낯설게 하기’라고도 하던가요. 불과 15장짜리 소설이지만, 그렇게 디테일 묘사의 묘미를 살린 대목이 또 두어 군데 있어요. 그 하나는 “각하가 미국 갔다 온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지가 방 한가운데 널따랗게 펴진 채로 있다”라는 묘사. 사실 생각해 보세요. 그냥 신문지 한 장이라고 해도 되잖아요. 동아라든지 경향이라든지 조선이라든지. 아니면 조간 신문 한 장이라든지. 그런데 ‘각하가 미국 갔다 온 사진이 실려 있는’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이런 구체성이 와락 생동감을 배가 시킨단 말이에요. 그 방 분위기도 그렇고. 젊은 여자가 좀 게을러. 신문지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어쨌든 그 디테일 묘사 하나로 작가 쪽에서 얻어먹는 게 무척 많아진다는 말이에요. 쓰면서 순발력 있게 이런 구절들이 연달아 많아진다는 말이에요. 쓰면서 순발력 있게 이런 구절들이 연달아 많이 떠오르면 작가는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지지요. 이런 건 꾸역꾸역 생각해서 뽑아지는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우선 작가 자신부터 그 방 안으로 어서 빨리 들어가야지요. 그 여자가 기거하는 그 방으로. 안 그렇겠습니까. 또 한 대목은 “그날도 그렇게 영동의 은마아파트에 사는 친지집에 모였었다”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아내한테서 이야기 들을 때는 일체 그런 소리도 없었거니와, 당시의 나는 아파트라는 게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모르던 때였거든요. 요즘의 서울이 이렇게 아파트 천지지, 70년대 그 무렵의 서울은 아파트라는 건 그야말로 시대의 첨단을 가는 사람들만 살았었거든요.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듣긴 했어요. 그 당시 나는 불광동 개인주택에 살았었는데 아내에게서랑 아파트 이야기를 많이 듣긴 했어요. 그렇게 듣는 둥 마는 둥 ‘영동의 은마아파트’ 이야기도 아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직통으로 그 구절이 떠오르다니, 이건 진짜로 누군가가 등 뒤에서 도와주는 것 같더라구요. 나는 그 순간에, 스스로도 나 자신이 이뻐서 죽겠더라구요. 사실로 생각해 보세요. “영동의 은마아파트에 사는 친지집에 모였었다”라는 구정을 그냥저냥 슬슬 읽어 가는 쪽에서는 무심하게 넘어갈 터이지만, “영동의 은마아파트”를 집어 넣음으로써 작가가 얻어먹는 것은 광장히 많아요. 독자들도 비록 무심하게 넘어는 가지만, 벌써 그 어떤 분위기로 떨어지는 것이 엄청 있지요. 단지 하나하나 의식하지 못한다 뿐이지요. 그 한마디로 그 아줌마들 전체의 기본적인 지체며 사는 분수며 남편들의 사회적 위치까지 대강 짐작이 된다는 말이거든요. 안 그렇습니까. 바로 이런게 ‘디테일 묘사의 묘미’라는 것이죠 세부묘사의 묘미 참 그러구,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그냥 넘어갈 뻔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작가는 처음에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재미있게 들으라고 한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고 마음 먹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소설 속 일부로 끼여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격인 수련이라는 여자는 난데없이 어디서 튀어나왔으며, 소설 전체의 구도도 조금 황당무계하지 않은가 싶을 거예요. 오직 아내의 그 이야기에다만 주안을 둘 때는. 그렇지만 이래서 바로 ‘픽션’이고 소설이지요. 그렇다면, 하고 작가인 나에게 독자들이 물어 온다고 칩시다. 도대체 수련이라는 여자는 어떤 경로로 어떻게 그 소설에 등장을 시켰느냐? 그리고 ‘심심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암시되는 그 소설의 테마는? 등등 물어 온다면, 나는 비시시 웃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거예요. 수련의 모델은 있느냐? 딱 어느 여자로는 없어요. 그런 유형의 여자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았던 것 같지만요. 한창 대학생 데모가 매일처럼 벌어질 때, 어느 한 켠 에는 유한층 자제로 아직 시집 못 가서 안달인 이런 여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싶더라구요. 그러면 어째서 그 막중한 때에 그런 시시껍적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볼 생각을 먹었느냐, 라고 다시 따져 든다면, 역시 나는 딱히 할 말은 없이 “글쎄요. 나도 그 점은 잘 모르겠쉬다”라고 대답할 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리곤 혼자서만 군시렁거렸겠지요. 그런건 재능 있는 문학평론가의 몫일 텐데, 왜 나한테 자꾸 따지려고 드노? 하고 말입니다. 사실로 어느 탁월한 평론가가 그 소설을 해부해 내면서 그 당시 그 소설을 쓰게 된 작가의 뒷면까지 극명하게 밝혀 내서 그 작가 자신부터 깜짝 놀라며 감탄, 삼탄하게 된 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건 이론가들이 할 일이고 소설쓰기는 그보다는 훨씬 무책임한 거지요. 소설을 이론으로 쓰려고 한다? 그건 애초부터 소설이라는 걸 못 쓰겠다는 것이나 매한가지 입니다. 도시락 싸 갖고 다니면서 말려야지요. 이상, 단편소설의 가장 짧은 형식인 콩트 쓰기의 실제를 제 작품 하나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