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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6) -맑은 마음과 글쓰기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3. 3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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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6)  -소설가 이호철

 

맑은 마음과 글쓰기



세번째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맑은 마음이라 하겠는데요, 이 맑은 마음을 설명하기는 간단치가 않아요.
정직, 솔직, 무사(無邪), 욕심이 없는 것. 말하자면 그런 마음.

예를 들면 초심자가 쓴 소설 보게 되면은요, 대개 분칠이 되어 있어요.
아, 내가 이렇게 책도 많이 읽었고, 인생에 대해 깊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정신들이 없지요.
그런 현시욕. 이것이 소설을 망치지요. 남을 속이려 드는 거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맑은 마음’이에요.

제가 40여 년 소설을 써 왔습니다만, 아직도 내가 그 버릇 못 버렸구나 할 때가 있어요.
말하자면 내 분수 이상으로 으시대고 싶은 거, 칭찬받고 싶은 거죠.
내 진정한 육성, 정직한, 정말 자신의 영혼 끝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장을 해 가지고….
그러나 추고(推敲) 과정에서는 이런 가식이 스스로도 보입니다.
그러면 스스로도 낯이 뜨거워지지요. 아서라, 아서, 너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권투 선수가 자기 고향에 가서 경기를 할 때 그 자기 고장 사람들한테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면 상대 선수를 KO로 제압해야 하잖겠어요?
거기에 너무 겨워 가지고 힘이 들어가요. 해설자가 그러지요.
아, 저 선수 고향에 와서 팔에 너무 힘이 들어간다고. 제 실력이 안 나온다고.
힘이 들어가고 뻣뻣하고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욕심이 있으니까요.
야구도 그렇지요. 홈런 치는 사람이 꼭 홈런을 쳐야겠다는 그 어떤 사욕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는, 몸이 유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고도의 훈련의 바탕 위에 KO의 펀치를 날리는 순간하고 홈런을 치는 순간은, 정말로 정말로 천의무봉의 맑은 경지가 되겠죠.
소설쓰기에도 그것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 마구 떠올라 원고지 옆에다 메모까지 해가며 쓰는 경우가 있어요.
평소에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 번뜩 번뜩 떠오르는 경우지요.
그런 건 지극히 많은 마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거죠.

소설쓰기의 실제 국면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 ‘맑은 마음’인데, 이것은 대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차츰 그 경지로 들어가지요.
그리고 끝머리에 가서는 자기도 놀랄 만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경지까지 가 닿아 작품이 뽑아 올라지지요.
그곳에 비로소 ‘창조의 지평’이 열리는 겁니다.

소설쓰기의 바탕이 공들여서 읽는 것, 뭐든지 쓸 것, 챙길 것, 맑은 마음을 갖는 것, 이렇게 되겠는데, 이것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읽으면서 느끼는 소설의 극적인 재미는 결국 그 작가와의 공유된 공간 속에서 누리는 재미였다는 말이죠.
즉 그것을 쓴 작가와 그 어떤 삶을 함께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자기 사는 만큼 쓰는 거예요. 물론 픽션으로 쓰지만, 구경적으로는 각자마다. 그 작가가 살아낸 만큼 쓰는 거예요.
살아낸 양(量)뿐만 아니라 살아낸 질(質)만큼, 그러니까, 내가 남하고 다른, 정말 나다운, 나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내 삶이 그만한 내용과 부피, 그만한 특색을 가져야지요.
응당 그렇지 않겠어요? 각 작가마다 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가 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조금 미친 듯한 세계, 프루스트 같은 아주아주 응석받이의 세계, 카프카 같은 이승과 저승의 그 어디 중간쯤인 것 같은 세계, 카프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시시하게 살았지요. 정말 시시하게,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 글 보게 되면 그이가 산 것만큼 쓴 거에요.

프루스트는 아홉 살 때부터 천식 걸렸으니까 어릴 때부터 누군가 늘 자기를 쓰다듬어 줘야 마음이 놓였어요.
그렇게 평생을 응석받이로 살았지요. 밤낮 계집애처럼 보호해 줘야 안심했으니까.
그런 응석받이에다가 장가도 한번 못 가고, 오십에 남색, 부르주아의 아주 타락한 사기꾼 비슷하게 살았죠.
남한테 괄시받으면서…. 그러니까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그러니 혼자 제 방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복수하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거예요.
그러니 프루스트 같은 사람은 실제 사는 것은 거짓말처럼 살았고, 그 사람의 진짜 삶은 소설로서였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아버지가 농민들한테 곡괭이로 맞아 죽었어요. 미친놈의 피가 내려오는 거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삶도 형편없었지요.
간질병, 폐병 걸린 마누라, 고생 고생하다가 『도박사』 쓸 때 구술을 받아쓰던 여비서와 맺어져서 그저 말년만은 괜찮은 편이었죠.
결국 그 사람의 삶의 투영으로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괴테는 재상까지 지냈지만 그 나름으로 불행했고, 발자크, 스탕달, 예외 없이 그 사람 생긴 만큼들 쓴 거예요.

결국 뭐냐?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내실이 뭐냐, 자기 삶이 타인과 다른 점이 있느냐, 예를 들면 고골리 같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의 별명을 잘 지었다고 해요.
자기 친구들의 핵심을 잘 집어 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죠? 그 사람의 문학적 자질이었죠.
각 작가들이 생득적인 특이성의 연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보게 되면, 조금 문제아들, 뭔가 변변치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잘살 것 같으면 소설 쓸 이유가 없을 거에요.
조금 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일 잘사는 사람이 뭡니까?
역시 권력 가진 사람들, 남 거느리고, 남 짓밝고, 남 자기 앞에서 꼼짝 못하게 벌벌 떨게 만들고, 제일 기분 좋죠.
그 다음 차선책은 뭐냐? 돈 버는 것. 돈 많이 벌어 가지고 거드럭대며 행세하는 것, 그러니까 모두가 권력에 탐닉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사람이 한평생 태어나서 제일 멋지게 사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권력일 거예요.
권력쪽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벌써 아이 때부터 달라요. 우두머리 노릇하고,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모시고.
권(權)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한고조 유방을 듭니다. 그 사람은 하늘이 내린 권력자였죠.
그런데 어거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아요. 권력 쪽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이러면 추해지죠. 흔히 보지요. 오랜만에 동창생들 만나면 둘이 있을 때는 아주 좋아요. 허심탄회하고.
그런데 한 네댓 사람 온다, 그때부터 잘난 척하고, 제가 한 급 위랍시고, 거기서 벌써 리더가 되려 하고. 그랬을 때는 아주 꼴보기 싫죠.
그런데 정말 권을 타고난 사람은 꼴 보기 싫지가 않아요. 당연히 거기 승복하게 되죠.
이런 권도, 부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말하자면 변변치 못하고, 주변머리 없고, 이래서 아, 나는 왜 이렇게 사나? 왜 이꼴로 생겼나, 이렇게 잔 생각이 많아져요.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왜 사나?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다 보면 책을 보고, 문학, 철학, 종교에 관심을 가지죠.

제 경우에는 조금 우둔해 가지고, 안톤 체호프다 하면 말이죠 신처럼 여겼어요.
아, 얼마나 잘생겼을까? 사진을 보면서도, 이런 사람은 얼마나 근사할까. 세상을 꿰뚫어 보고, 사람 속을 속속들이 알고, 이런 사람은 얼마나 대단할까.
그런 꿈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작가라는 사람들 보고는 항상 실망했어요. 꾀죄죄하고….

젊은 시인이 있어요. 「섬진강」이라는 절창(絶唱)이 있지요.
요즘은 시인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요. 별 개떡 같은 시도 많은데, 70년대 말쯤 이 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홀딱 반했지요.
얘가 어떻게 생긴 앨까? 수려하게 생겼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내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있을 때 어느날 누가 와서 절을 꾸벅 하더라고, 아주 못생겼어, 키도 작고, 거기다 옷차림은 빨간 잠바데이 걸치고 꼭 연극판에서 막 오르내리는 일하는 사람 있죠, 연극판 심부름꾼 같아.
누구냐니까 그 시 쓴 애더라고. 야, 니가 그 애냐? 또 내가 속았구나. 물론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요.

자신의 삶을 투영한 진솔한 글쓰기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이 꼭 뭐 드라마가 없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뭘 찾기 위해서 가출을 뒤늦게 단행하는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어거지로는 안 되고, 결국은 운명이 돼야죠.
황석영 같은 사람이 조금 우쭐하는 멋도 있고 재미있는 사람이죠.
그 친구는 경복 다닐 때, 말하자면 좀 문제아였어요. 싸우다가 누구를 연탄집게로 찍어 가지고 학교 퇴학 직전까지 가고, 엄마하고 갈등이 많았고, 대학도 못가고 돌아다니고, 「삼포 가는 길」이나 『객지』도 그렇게 경황 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동진강인가에서 품팔이 할 떄의 경험이지요.
프랑스에 오래 있던 최민 씨하고 소설가 송영하고 셋이 친했어요. 송영은 날건달, 최민은 경기고 나오고 서울대 미학과 나온 수재로, 그래도 먹물로 치면 제일 좀 나아. 그래 그집 가서 술 마시고 그렇게 뒹굴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은 가야겠고, 그래서 지들끼리, 최민이가 D대학에 대리 시험을 쳤어요. 그때는 그게 뒷구멍으로 통했나 봐요.
근데, 적당히도 아니고 일등으로 합격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황석영도 창피해서 학교고 뭐고 아예 집어쳤다나요.
이문열 같은 작가도 서울대 사대 다니다가 몸이 아팠는지 어쨌는지 학교 휴학하고 이것저것 잡박하게 읽고, 그리고 뒤에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것 썼죠.
지금도 보면 어릴 때 뭔가 그렇게 통째로 깨진 사람들이 제대로 뭘 좀 씁니다.

제가 예전에 서라벌예대에서 창작 강의를 했었는데요, 보게되면 출생부터가 사생아 비슷한 아이들이 수두룩했어요.
6ㆍ25거치면서 집안이 엉망으로 깨진 사람들.

오정희 같은 각가도 이화여고 나오고 능히 서울대 갈 실력이었지만 서라벌 문창과에 지원했단 말입니다.
왜? 김동리, 서정주에 대한,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죠. 그 사람들을 보고 싶으니까.
사람의 품위나 생김에 관계없이 그 사람 나름의 문학에 대한 들림, 미침, 이것으로부터 문학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소설가나 돼볼까? 신문에도 나고, 유명해지고, 몇자 쓰게 되면 원고료 나오고, 책 내면 인세 나오고, 아, 얼마나 좋을까, 하고 대드는 사람 더러 있겠는데, 그것 간단치가 않아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좋은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이 쓰는 것보다, 그 힘든 일보다 더 좋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 또 ‘흥, 자기는 이미 다 재미 볼 만큼 재미보고 나서 저러는군’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시골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신춘문예에 여러 번 투고하시고 그런 것도 저는 봤습니다.
인품 좋으시고 나보다 나이도 더 위시고, 이런 양반들,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나, 매우 난감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설쓰기의 길이란 그렇게 고독한 길이라는 것, 좋기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남이 모르는 고행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려면 한번 본때 있게 하고, 대강대강 그쪽이나 한번 기웃거려 볼까, 이런 정도로는, 싹수가 뻔해요. 요즘은 더러 그 무슨 글쓰기 장학생을 뽑기도 하는 모양입디다만, 저는 그것 반대입니다.
잘 자라날 아이를, 제대로 다른 능력을 발휘할 아이를 공연히 글재주 있다고 생각하게 해서 망치는 수가 있어요. 전문 글쓰기라는 것이 그렇게 누구나 해도 안되고, 그냥 정상적으로 살 사람은 잘 살 수도 있는데 공연히 백일장이나 한번 돼서, 나는 언제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착각하게 되면, 그만 문학병이 들고 말아요. 삶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문학? 저는 이건 말립니다.
물론 정말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이 드물게 있어요. 그것이 또 진짜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열에 아홉은 다른 분야로 잘 될 사람이 제 인생 망칠 수 있다, 이겁니다.

정말 미친 사람은, 미치게 읽는다든지, 미치게 쓴다든지 이렇게 시작되지요.
자기 생긴 만큼의 끝에 가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자기가 찾아내야지요.
이성적으로 머리로 찾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느 끝머리까지 가세요.

예술가란, 정말 훌륭한 예술가란,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죠.
좀 모자라거나, 괴팍하거나, 상식 수준으로 사는 데 성이 안 차는 사람. 물론 노력도 해야지요.
매일의 반성.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 나는 어떤 종류로 글을 써야 할까, 늘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 어떤 이의제기도 나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이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다, 할 때, 정정당당하게 맛설 수 있는 용기. 이런게 중요하지요.
남들 따라, 뭐, 민중문학, 민중문학 해야 평론가들이 알아준다더라, 이런 식의 생각이라면, 아예 애초에 집어치우는 것이 좋아요.
누구나 다 같은 말 할 때, 나는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자기 육성이 생길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조세희의 70년대 소설이 무엇이냐, 남들 다 문인 행세 할 때, 그 사람 독했어요.
잡지기자 할 때도 무척 꼼꼼했던 사람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독한 마음 먹고 구로공단에 들어가서 하숙하면서 공단 공원들 삶을 면밀히 노트했을 거예요.
야근 수당 얼마 받고, 라면은 언제 끓여 먹고, 몇 달 살면서 노트한 것 가지고, 픽션 가미해서 70년대 산업 사회의 단면을 그렇게 그려 낸 거죠. 아주 착안을 잘 했어요. 착안과 노력의 결과죠.

한눈에 보는 감각, 세계적인 문학 추세도 이런 여성적인 특유의 기질이 잘 발휘되는 쪽으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이념이니 이런 장중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에 더하여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소설쓰기라는 것의 전제로 밑자락에 깔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읽는 것. 문학에 들리는 것. 쓰는 것. 많이 쓰다보면 자연히 문장은 세련되집니다.
맑은 마음. 자기가 진정으로 정직하냐, 진솔하냐. 벌써 우쭐해서 어거지로 폼부터 잡으며 쓰려고 하지는 않느냐, 그런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하고, 사는 자세. 자기의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을 철저히 챙길 만큼 챙겨야 합니다. 소설은 기술로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온몸이 달아올라서 혼신으로 쓸 때만 제대로 써지는 거예요.

끝으로 간디 자서전 첫머리에서 한마디 인용을 헤보겠습니다.
“진실탐구를 위한 수단은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론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한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지만, 사심(邪心)없는 아이들에게는 대번에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대체로 진실의 탐구자는, 먼지나 티끌에게도 그닥 신경을 안 써야한다. 세간 사람들은 먼지, 티끌을 그 발로 짓밟는다.
그러나 진실 탐구자는 그 먼지, 티끌에조차 짓밟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때만이, 그리고 그런 때가 되어서 비로소, 그는 진실을 흘낏이나마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쓴 것을 읽고, 독자가 무언가 우쭐거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면, 내 탐구 속에 무언가 옳지 않은, 껄쩍지근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아낸 번뜩임도 허깨비 같은 신가루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하고 독자들은 생각할 게 틀림없다. 나 같은 범상한 사람은 스러져도 좋다, 하지만 진실만은 이겨 내겠끔 해야 한다.
하찮은 나 한 사람 같은, 과오도 많은 인간을 판단하는데 있어, 추호라도 진실의 규준(規準)을 끌어내려 지게 해서는 안 된다.”

 

 

소설 창작 강의 (6)  -소설가 이호철

 

맑은 마음과 글쓰기



세번째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맑은 마음이라 하겠는데요, 이 맑은 마음을 설명하기는 간단치가 않아요.
정직, 솔직, 무사(無邪), 욕심이 없는 것. 말하자면 그런 마음.

예를 들면 초심자가 쓴 소설 보게 되면은요, 대개 분칠이 되어 있어요.
아, 내가 이렇게 책도 많이 읽었고, 인생에 대해 깊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정신들이 없지요.
그런 현시욕. 이것이 소설을 망치지요. 남을 속이려 드는 거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맑은 마음’이에요.

제가 40여 년 소설을 써 왔습니다만, 아직도 내가 그 버릇 못 버렸구나 할 때가 있어요.
말하자면 내 분수 이상으로 으시대고 싶은 거, 칭찬받고 싶은 거죠.
내 진정한 육성, 정직한, 정말 자신의 영혼 끝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장을 해 가지고….
그러나 추고(推敲) 과정에서는 이런 가식이 스스로도 보입니다.
그러면 스스로도 낯이 뜨거워지지요. 아서라, 아서, 너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권투 선수가 자기 고향에 가서 경기를 할 때 그 자기 고장 사람들한테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면 상대 선수를 KO로 제압해야 하잖겠어요?
거기에 너무 겨워 가지고 힘이 들어가요. 해설자가 그러지요.
아, 저 선수 고향에 와서 팔에 너무 힘이 들어간다고. 제 실력이 안 나온다고.
힘이 들어가고 뻣뻣하고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욕심이 있으니까요.
야구도 그렇지요. 홈런 치는 사람이 꼭 홈런을 쳐야겠다는 그 어떤 사욕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는, 몸이 유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고도의 훈련의 바탕 위에 KO의 펀치를 날리는 순간하고 홈런을 치는 순간은, 정말로 정말로 천의무봉의 맑은 경지가 되겠죠.
소설쓰기에도 그것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 마구 떠올라 원고지 옆에다 메모까지 해가며 쓰는 경우가 있어요.
평소에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 번뜩 번뜩 떠오르는 경우지요.
그런 건 지극히 많은 마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거죠.

소설쓰기의 실제 국면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 ‘맑은 마음’인데, 이것은 대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차츰 그 경지로 들어가지요.
그리고 끝머리에 가서는 자기도 놀랄 만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경지까지 가 닿아 작품이 뽑아 올라지지요.
그곳에 비로소 ‘창조의 지평’이 열리는 겁니다.

소설쓰기의 바탕이 공들여서 읽는 것, 뭐든지 쓸 것, 챙길 것, 맑은 마음을 갖는 것, 이렇게 되겠는데, 이것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읽으면서 느끼는 소설의 극적인 재미는 결국 그 작가와의 공유된 공간 속에서 누리는 재미였다는 말이죠.
즉 그것을 쓴 작가와 그 어떤 삶을 함께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자기 사는 만큼 쓰는 거예요. 물론 픽션으로 쓰지만, 구경적으로는 각자마다. 그 작가가 살아낸 만큼 쓰는 거예요.
살아낸 양(量)뿐만 아니라 살아낸 질(質)만큼, 그러니까, 내가 남하고 다른, 정말 나다운, 나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내 삶이 그만한 내용과 부피, 그만한 특색을 가져야지요.
응당 그렇지 않겠어요? 각 작가마다 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가 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조금 미친 듯한 세계, 프루스트 같은 아주아주 응석받이의 세계, 카프카 같은 이승과 저승의 그 어디 중간쯤인 것 같은 세계, 카프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시시하게 살았지요. 정말 시시하게,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 글 보게 되면 그이가 산 것만큼 쓴 거에요.

프루스트는 아홉 살 때부터 천식 걸렸으니까 어릴 때부터 누군가 늘 자기를 쓰다듬어 줘야 마음이 놓였어요.
그렇게 평생을 응석받이로 살았지요. 밤낮 계집애처럼 보호해 줘야 안심했으니까.
그런 응석받이에다가 장가도 한번 못 가고, 오십에 남색, 부르주아의 아주 타락한 사기꾼 비슷하게 살았죠.
남한테 괄시받으면서…. 그러니까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그러니 혼자 제 방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복수하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거예요.
그러니 프루스트 같은 사람은 실제 사는 것은 거짓말처럼 살았고, 그 사람의 진짜 삶은 소설로서였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아버지가 농민들한테 곡괭이로 맞아 죽었어요. 미친놈의 피가 내려오는 거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삶도 형편없었지요.
간질병, 폐병 걸린 마누라, 고생 고생하다가 『도박사』 쓸 때 구술을 받아쓰던 여비서와 맺어져서 그저 말년만은 괜찮은 편이었죠.
결국 그 사람의 삶의 투영으로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괴테는 재상까지 지냈지만 그 나름으로 불행했고, 발자크, 스탕달, 예외 없이 그 사람 생긴 만큼들 쓴 거예요.

결국 뭐냐?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내실이 뭐냐, 자기 삶이 타인과 다른 점이 있느냐, 예를 들면 고골리 같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의 별명을 잘 지었다고 해요.
자기 친구들의 핵심을 잘 집어 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죠? 그 사람의 문학적 자질이었죠.
각 작가들이 생득적인 특이성의 연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보게 되면, 조금 문제아들, 뭔가 변변치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잘살 것 같으면 소설 쓸 이유가 없을 거에요.
조금 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일 잘사는 사람이 뭡니까?
역시 권력 가진 사람들, 남 거느리고, 남 짓밝고, 남 자기 앞에서 꼼짝 못하게 벌벌 떨게 만들고, 제일 기분 좋죠.
그 다음 차선책은 뭐냐? 돈 버는 것. 돈 많이 벌어 가지고 거드럭대며 행세하는 것, 그러니까 모두가 권력에 탐닉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사람이 한평생 태어나서 제일 멋지게 사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권력일 거예요.
권력쪽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벌써 아이 때부터 달라요. 우두머리 노릇하고,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모시고.
권(權)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한고조 유방을 듭니다. 그 사람은 하늘이 내린 권력자였죠.
그런데 어거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아요. 권력 쪽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이러면 추해지죠. 흔히 보지요. 오랜만에 동창생들 만나면 둘이 있을 때는 아주 좋아요. 허심탄회하고.
그런데 한 네댓 사람 온다, 그때부터 잘난 척하고, 제가 한 급 위랍시고, 거기서 벌써 리더가 되려 하고. 그랬을 때는 아주 꼴보기 싫죠.
그런데 정말 권을 타고난 사람은 꼴 보기 싫지가 않아요. 당연히 거기 승복하게 되죠.
이런 권도, 부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말하자면 변변치 못하고, 주변머리 없고, 이래서 아, 나는 왜 이렇게 사나? 왜 이꼴로 생겼나, 이렇게 잔 생각이 많아져요.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왜 사나?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다 보면 책을 보고, 문학, 철학, 종교에 관심을 가지죠.

제 경우에는 조금 우둔해 가지고, 안톤 체호프다 하면 말이죠 신처럼 여겼어요.
아, 얼마나 잘생겼을까? 사진을 보면서도, 이런 사람은 얼마나 근사할까. 세상을 꿰뚫어 보고, 사람 속을 속속들이 알고, 이런 사람은 얼마나 대단할까.
그런 꿈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작가라는 사람들 보고는 항상 실망했어요. 꾀죄죄하고….

젊은 시인이 있어요. 「섬진강」이라는 절창(絶唱)이 있지요.
요즘은 시인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요. 별 개떡 같은 시도 많은데, 70년대 말쯤 이 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홀딱 반했지요.
얘가 어떻게 생긴 앨까? 수려하게 생겼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내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있을 때 어느날 누가 와서 절을 꾸벅 하더라고, 아주 못생겼어, 키도 작고, 거기다 옷차림은 빨간 잠바데이 걸치고 꼭 연극판에서 막 오르내리는 일하는 사람 있죠, 연극판 심부름꾼 같아.
누구냐니까 그 시 쓴 애더라고. 야, 니가 그 애냐? 또 내가 속았구나. 물론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요.

자신의 삶을 투영한 진솔한 글쓰기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이 꼭 뭐 드라마가 없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뭘 찾기 위해서 가출을 뒤늦게 단행하는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어거지로는 안 되고, 결국은 운명이 돼야죠.
황석영 같은 사람이 조금 우쭐하는 멋도 있고 재미있는 사람이죠.
그 친구는 경복 다닐 때, 말하자면 좀 문제아였어요. 싸우다가 누구를 연탄집게로 찍어 가지고 학교 퇴학 직전까지 가고, 엄마하고 갈등이 많았고, 대학도 못가고 돌아다니고, 「삼포 가는 길」이나 『객지』도 그렇게 경황 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동진강인가에서 품팔이 할 떄의 경험이지요.
프랑스에 오래 있던 최민 씨하고 소설가 송영하고 셋이 친했어요. 송영은 날건달, 최민은 경기고 나오고 서울대 미학과 나온 수재로, 그래도 먹물로 치면 제일 좀 나아. 그래 그집 가서 술 마시고 그렇게 뒹굴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은 가야겠고, 그래서 지들끼리, 최민이가 D대학에 대리 시험을 쳤어요. 그때는 그게 뒷구멍으로 통했나 봐요.
근데, 적당히도 아니고 일등으로 합격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황석영도 창피해서 학교고 뭐고 아예 집어쳤다나요.
이문열 같은 작가도 서울대 사대 다니다가 몸이 아팠는지 어쨌는지 학교 휴학하고 이것저것 잡박하게 읽고, 그리고 뒤에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것 썼죠.
지금도 보면 어릴 때 뭔가 그렇게 통째로 깨진 사람들이 제대로 뭘 좀 씁니다.

제가 예전에 서라벌예대에서 창작 강의를 했었는데요, 보게되면 출생부터가 사생아 비슷한 아이들이 수두룩했어요.
6ㆍ25거치면서 집안이 엉망으로 깨진 사람들.

오정희 같은 각가도 이화여고 나오고 능히 서울대 갈 실력이었지만 서라벌 문창과에 지원했단 말입니다.
왜? 김동리, 서정주에 대한,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죠. 그 사람들을 보고 싶으니까.
사람의 품위나 생김에 관계없이 그 사람 나름의 문학에 대한 들림, 미침, 이것으로부터 문학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소설가나 돼볼까? 신문에도 나고, 유명해지고, 몇자 쓰게 되면 원고료 나오고, 책 내면 인세 나오고, 아, 얼마나 좋을까, 하고 대드는 사람 더러 있겠는데, 그것 간단치가 않아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좋은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이 쓰는 것보다, 그 힘든 일보다 더 좋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 또 ‘흥, 자기는 이미 다 재미 볼 만큼 재미보고 나서 저러는군’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시골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신춘문예에 여러 번 투고하시고 그런 것도 저는 봤습니다.
인품 좋으시고 나보다 나이도 더 위시고, 이런 양반들,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나, 매우 난감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설쓰기의 길이란 그렇게 고독한 길이라는 것, 좋기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남이 모르는 고행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려면 한번 본때 있게 하고, 대강대강 그쪽이나 한번 기웃거려 볼까, 이런 정도로는, 싹수가 뻔해요. 요즘은 더러 그 무슨 글쓰기 장학생을 뽑기도 하는 모양입디다만, 저는 그것 반대입니다.
잘 자라날 아이를, 제대로 다른 능력을 발휘할 아이를 공연히 글재주 있다고 생각하게 해서 망치는 수가 있어요. 전문 글쓰기라는 것이 그렇게 누구나 해도 안되고, 그냥 정상적으로 살 사람은 잘 살 수도 있는데 공연히 백일장이나 한번 돼서, 나는 언제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착각하게 되면, 그만 문학병이 들고 말아요. 삶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문학? 저는 이건 말립니다.
물론 정말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이 드물게 있어요. 그것이 또 진짜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열에 아홉은 다른 분야로 잘 될 사람이 제 인생 망칠 수 있다, 이겁니다.

정말 미친 사람은, 미치게 읽는다든지, 미치게 쓴다든지 이렇게 시작되지요.
자기 생긴 만큼의 끝에 가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자기가 찾아내야지요.
이성적으로 머리로 찾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느 끝머리까지 가세요.

예술가란, 정말 훌륭한 예술가란,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죠.
좀 모자라거나, 괴팍하거나, 상식 수준으로 사는 데 성이 안 차는 사람. 물론 노력도 해야지요.
매일의 반성.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 나는 어떤 종류로 글을 써야 할까, 늘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 어떤 이의제기도 나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이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다, 할 때, 정정당당하게 맛설 수 있는 용기. 이런게 중요하지요.
남들 따라, 뭐, 민중문학, 민중문학 해야 평론가들이 알아준다더라, 이런 식의 생각이라면, 아예 애초에 집어치우는 것이 좋아요.
누구나 다 같은 말 할 때, 나는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자기 육성이 생길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조세희의 70년대 소설이 무엇이냐, 남들 다 문인 행세 할 때, 그 사람 독했어요.
잡지기자 할 때도 무척 꼼꼼했던 사람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독한 마음 먹고 구로공단에 들어가서 하숙하면서 공단 공원들 삶을 면밀히 노트했을 거예요.
야근 수당 얼마 받고, 라면은 언제 끓여 먹고, 몇 달 살면서 노트한 것 가지고, 픽션 가미해서 70년대 산업 사회의 단면을 그렇게 그려 낸 거죠. 아주 착안을 잘 했어요. 착안과 노력의 결과죠.

한눈에 보는 감각, 세계적인 문학 추세도 이런 여성적인 특유의 기질이 잘 발휘되는 쪽으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이념이니 이런 장중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에 더하여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소설쓰기라는 것의 전제로 밑자락에 깔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읽는 것. 문학에 들리는 것. 쓰는 것. 많이 쓰다보면 자연히 문장은 세련되집니다.
맑은 마음. 자기가 진정으로 정직하냐, 진솔하냐. 벌써 우쭐해서 어거지로 폼부터 잡으며 쓰려고 하지는 않느냐, 그런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하고, 사는 자세. 자기의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을 철저히 챙길 만큼 챙겨야 합니다. 소설은 기술로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온몸이 달아올라서 혼신으로 쓸 때만 제대로 써지는 거예요.

끝으로 간디 자서전 첫머리에서 한마디 인용을 헤보겠습니다.
“진실탐구를 위한 수단은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론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한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지만, 사심(邪心)없는 아이들에게는 대번에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대체로 진실의 탐구자는, 먼지나 티끌에게도 그닥 신경을 안 써야한다. 세간 사람들은 먼지, 티끌을 그 발로 짓밟는다.
그러나 진실 탐구자는 그 먼지, 티끌에조차 짓밟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때만이, 그리고 그런 때가 되어서 비로소, 그는 진실을 흘낏이나마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쓴 것을 읽고, 독자가 무언가 우쭐거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면, 내 탐구 속에 무언가 옳지 않은, 껄쩍지근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아낸 번뜩임도 허깨비 같은 신가루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하고 독자들은 생각할 게 틀림없다. 나 같은 범상한 사람은 스러져도 좋다, 하지만 진실만은 이겨 내겠끔 해야 한다.
하찮은 나 한 사람 같은, 과오도 많은 인간을 판단하는데 있어, 추호라도 진실의 규준(規準)을 끌어내려 지게 해서는 안 된다.”

 

 

소설 창작 강의 (6)  -소설가 이호철

 

맑은 마음과 글쓰기



세번째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맑은 마음이라 하겠는데요, 이 맑은 마음을 설명하기는 간단치가 않아요.
정직, 솔직, 무사(無邪), 욕심이 없는 것. 말하자면 그런 마음.

예를 들면 초심자가 쓴 소설 보게 되면은요, 대개 분칠이 되어 있어요.
아, 내가 이렇게 책도 많이 읽었고, 인생에 대해 깊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정신들이 없지요.
그런 현시욕. 이것이 소설을 망치지요. 남을 속이려 드는 거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맑은 마음’이에요.

제가 40여 년 소설을 써 왔습니다만, 아직도 내가 그 버릇 못 버렸구나 할 때가 있어요.
말하자면 내 분수 이상으로 으시대고 싶은 거, 칭찬받고 싶은 거죠.
내 진정한 육성, 정직한, 정말 자신의 영혼 끝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장을 해 가지고….
그러나 추고(推敲) 과정에서는 이런 가식이 스스로도 보입니다.
그러면 스스로도 낯이 뜨거워지지요. 아서라, 아서, 너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권투 선수가 자기 고향에 가서 경기를 할 때 그 자기 고장 사람들한테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면 상대 선수를 KO로 제압해야 하잖겠어요?
거기에 너무 겨워 가지고 힘이 들어가요. 해설자가 그러지요.
아, 저 선수 고향에 와서 팔에 너무 힘이 들어간다고. 제 실력이 안 나온다고.
힘이 들어가고 뻣뻣하고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욕심이 있으니까요.
야구도 그렇지요. 홈런 치는 사람이 꼭 홈런을 쳐야겠다는 그 어떤 사욕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는, 몸이 유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고도의 훈련의 바탕 위에 KO의 펀치를 날리는 순간하고 홈런을 치는 순간은, 정말로 정말로 천의무봉의 맑은 경지가 되겠죠.
소설쓰기에도 그것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 마구 떠올라 원고지 옆에다 메모까지 해가며 쓰는 경우가 있어요.
평소에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 번뜩 번뜩 떠오르는 경우지요.
그런 건 지극히 많은 마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거죠.

소설쓰기의 실제 국면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 ‘맑은 마음’인데, 이것은 대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차츰 그 경지로 들어가지요.
그리고 끝머리에 가서는 자기도 놀랄 만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경지까지 가 닿아 작품이 뽑아 올라지지요.
그곳에 비로소 ‘창조의 지평’이 열리는 겁니다.

소설쓰기의 바탕이 공들여서 읽는 것, 뭐든지 쓸 것, 챙길 것, 맑은 마음을 갖는 것, 이렇게 되겠는데, 이것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읽으면서 느끼는 소설의 극적인 재미는 결국 그 작가와의 공유된 공간 속에서 누리는 재미였다는 말이죠.
즉 그것을 쓴 작가와 그 어떤 삶을 함께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자기 사는 만큼 쓰는 거예요. 물론 픽션으로 쓰지만, 구경적으로는 각자마다. 그 작가가 살아낸 만큼 쓰는 거예요.
살아낸 양(量)뿐만 아니라 살아낸 질(質)만큼, 그러니까, 내가 남하고 다른, 정말 나다운, 나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내 삶이 그만한 내용과 부피, 그만한 특색을 가져야지요.
응당 그렇지 않겠어요? 각 작가마다 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가 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조금 미친 듯한 세계, 프루스트 같은 아주아주 응석받이의 세계, 카프카 같은 이승과 저승의 그 어디 중간쯤인 것 같은 세계, 카프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시시하게 살았지요. 정말 시시하게,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 글 보게 되면 그이가 산 것만큼 쓴 거에요.

프루스트는 아홉 살 때부터 천식 걸렸으니까 어릴 때부터 누군가 늘 자기를 쓰다듬어 줘야 마음이 놓였어요.
그렇게 평생을 응석받이로 살았지요. 밤낮 계집애처럼 보호해 줘야 안심했으니까.
그런 응석받이에다가 장가도 한번 못 가고, 오십에 남색, 부르주아의 아주 타락한 사기꾼 비슷하게 살았죠.
남한테 괄시받으면서…. 그러니까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그러니 혼자 제 방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복수하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거예요.
그러니 프루스트 같은 사람은 실제 사는 것은 거짓말처럼 살았고, 그 사람의 진짜 삶은 소설로서였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아버지가 농민들한테 곡괭이로 맞아 죽었어요. 미친놈의 피가 내려오는 거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삶도 형편없었지요.
간질병, 폐병 걸린 마누라, 고생 고생하다가 『도박사』 쓸 때 구술을 받아쓰던 여비서와 맺어져서 그저 말년만은 괜찮은 편이었죠.
결국 그 사람의 삶의 투영으로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괴테는 재상까지 지냈지만 그 나름으로 불행했고, 발자크, 스탕달, 예외 없이 그 사람 생긴 만큼들 쓴 거예요.

결국 뭐냐?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내실이 뭐냐, 자기 삶이 타인과 다른 점이 있느냐, 예를 들면 고골리 같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의 별명을 잘 지었다고 해요.
자기 친구들의 핵심을 잘 집어 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죠? 그 사람의 문학적 자질이었죠.
각 작가들이 생득적인 특이성의 연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보게 되면, 조금 문제아들, 뭔가 변변치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잘살 것 같으면 소설 쓸 이유가 없을 거에요.
조금 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일 잘사는 사람이 뭡니까?
역시 권력 가진 사람들, 남 거느리고, 남 짓밝고, 남 자기 앞에서 꼼짝 못하게 벌벌 떨게 만들고, 제일 기분 좋죠.
그 다음 차선책은 뭐냐? 돈 버는 것. 돈 많이 벌어 가지고 거드럭대며 행세하는 것, 그러니까 모두가 권력에 탐닉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사람이 한평생 태어나서 제일 멋지게 사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권력일 거예요.
권력쪽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벌써 아이 때부터 달라요. 우두머리 노릇하고,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모시고.
권(權)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한고조 유방을 듭니다. 그 사람은 하늘이 내린 권력자였죠.
그런데 어거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아요. 권력 쪽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이러면 추해지죠. 흔히 보지요. 오랜만에 동창생들 만나면 둘이 있을 때는 아주 좋아요. 허심탄회하고.
그런데 한 네댓 사람 온다, 그때부터 잘난 척하고, 제가 한 급 위랍시고, 거기서 벌써 리더가 되려 하고. 그랬을 때는 아주 꼴보기 싫죠.
그런데 정말 권을 타고난 사람은 꼴 보기 싫지가 않아요. 당연히 거기 승복하게 되죠.
이런 권도, 부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말하자면 변변치 못하고, 주변머리 없고, 이래서 아, 나는 왜 이렇게 사나? 왜 이꼴로 생겼나, 이렇게 잔 생각이 많아져요.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왜 사나?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다 보면 책을 보고, 문학, 철학, 종교에 관심을 가지죠.

제 경우에는 조금 우둔해 가지고, 안톤 체호프다 하면 말이죠 신처럼 여겼어요.
아, 얼마나 잘생겼을까? 사진을 보면서도, 이런 사람은 얼마나 근사할까. 세상을 꿰뚫어 보고, 사람 속을 속속들이 알고, 이런 사람은 얼마나 대단할까.
그런 꿈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작가라는 사람들 보고는 항상 실망했어요. 꾀죄죄하고….

젊은 시인이 있어요. 「섬진강」이라는 절창(絶唱)이 있지요.
요즘은 시인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요. 별 개떡 같은 시도 많은데, 70년대 말쯤 이 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홀딱 반했지요.
얘가 어떻게 생긴 앨까? 수려하게 생겼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내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있을 때 어느날 누가 와서 절을 꾸벅 하더라고, 아주 못생겼어, 키도 작고, 거기다 옷차림은 빨간 잠바데이 걸치고 꼭 연극판에서 막 오르내리는 일하는 사람 있죠, 연극판 심부름꾼 같아.
누구냐니까 그 시 쓴 애더라고. 야, 니가 그 애냐? 또 내가 속았구나. 물론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요.

자신의 삶을 투영한 진솔한 글쓰기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이 꼭 뭐 드라마가 없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뭘 찾기 위해서 가출을 뒤늦게 단행하는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어거지로는 안 되고, 결국은 운명이 돼야죠.
황석영 같은 사람이 조금 우쭐하는 멋도 있고 재미있는 사람이죠.
그 친구는 경복 다닐 때, 말하자면 좀 문제아였어요. 싸우다가 누구를 연탄집게로 찍어 가지고 학교 퇴학 직전까지 가고, 엄마하고 갈등이 많았고, 대학도 못가고 돌아다니고, 「삼포 가는 길」이나 『객지』도 그렇게 경황 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동진강인가에서 품팔이 할 떄의 경험이지요.
프랑스에 오래 있던 최민 씨하고 소설가 송영하고 셋이 친했어요. 송영은 날건달, 최민은 경기고 나오고 서울대 미학과 나온 수재로, 그래도 먹물로 치면 제일 좀 나아. 그래 그집 가서 술 마시고 그렇게 뒹굴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은 가야겠고, 그래서 지들끼리, 최민이가 D대학에 대리 시험을 쳤어요. 그때는 그게 뒷구멍으로 통했나 봐요.
근데, 적당히도 아니고 일등으로 합격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황석영도 창피해서 학교고 뭐고 아예 집어쳤다나요.
이문열 같은 작가도 서울대 사대 다니다가 몸이 아팠는지 어쨌는지 학교 휴학하고 이것저것 잡박하게 읽고, 그리고 뒤에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것 썼죠.
지금도 보면 어릴 때 뭔가 그렇게 통째로 깨진 사람들이 제대로 뭘 좀 씁니다.

제가 예전에 서라벌예대에서 창작 강의를 했었는데요, 보게되면 출생부터가 사생아 비슷한 아이들이 수두룩했어요.
6ㆍ25거치면서 집안이 엉망으로 깨진 사람들.

오정희 같은 각가도 이화여고 나오고 능히 서울대 갈 실력이었지만 서라벌 문창과에 지원했단 말입니다.
왜? 김동리, 서정주에 대한,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죠. 그 사람들을 보고 싶으니까.
사람의 품위나 생김에 관계없이 그 사람 나름의 문학에 대한 들림, 미침, 이것으로부터 문학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소설가나 돼볼까? 신문에도 나고, 유명해지고, 몇자 쓰게 되면 원고료 나오고, 책 내면 인세 나오고, 아, 얼마나 좋을까, 하고 대드는 사람 더러 있겠는데, 그것 간단치가 않아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좋은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이 쓰는 것보다, 그 힘든 일보다 더 좋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 또 ‘흥, 자기는 이미 다 재미 볼 만큼 재미보고 나서 저러는군’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시골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신춘문예에 여러 번 투고하시고 그런 것도 저는 봤습니다.
인품 좋으시고 나보다 나이도 더 위시고, 이런 양반들,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나, 매우 난감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설쓰기의 길이란 그렇게 고독한 길이라는 것, 좋기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남이 모르는 고행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려면 한번 본때 있게 하고, 대강대강 그쪽이나 한번 기웃거려 볼까, 이런 정도로는, 싹수가 뻔해요. 요즘은 더러 그 무슨 글쓰기 장학생을 뽑기도 하는 모양입디다만, 저는 그것 반대입니다.
잘 자라날 아이를, 제대로 다른 능력을 발휘할 아이를 공연히 글재주 있다고 생각하게 해서 망치는 수가 있어요. 전문 글쓰기라는 것이 그렇게 누구나 해도 안되고, 그냥 정상적으로 살 사람은 잘 살 수도 있는데 공연히 백일장이나 한번 돼서, 나는 언제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착각하게 되면, 그만 문학병이 들고 말아요. 삶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문학? 저는 이건 말립니다.
물론 정말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이 드물게 있어요. 그것이 또 진짜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열에 아홉은 다른 분야로 잘 될 사람이 제 인생 망칠 수 있다, 이겁니다.

정말 미친 사람은, 미치게 읽는다든지, 미치게 쓴다든지 이렇게 시작되지요.
자기 생긴 만큼의 끝에 가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자기가 찾아내야지요.
이성적으로 머리로 찾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느 끝머리까지 가세요.

예술가란, 정말 훌륭한 예술가란,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죠.
좀 모자라거나, 괴팍하거나, 상식 수준으로 사는 데 성이 안 차는 사람. 물론 노력도 해야지요.
매일의 반성.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 나는 어떤 종류로 글을 써야 할까, 늘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 어떤 이의제기도 나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이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다, 할 때, 정정당당하게 맛설 수 있는 용기. 이런게 중요하지요.
남들 따라, 뭐, 민중문학, 민중문학 해야 평론가들이 알아준다더라, 이런 식의 생각이라면, 아예 애초에 집어치우는 것이 좋아요.
누구나 다 같은 말 할 때, 나는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자기 육성이 생길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조세희의 70년대 소설이 무엇이냐, 남들 다 문인 행세 할 때, 그 사람 독했어요.
잡지기자 할 때도 무척 꼼꼼했던 사람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독한 마음 먹고 구로공단에 들어가서 하숙하면서 공단 공원들 삶을 면밀히 노트했을 거예요.
야근 수당 얼마 받고, 라면은 언제 끓여 먹고, 몇 달 살면서 노트한 것 가지고, 픽션 가미해서 70년대 산업 사회의 단면을 그렇게 그려 낸 거죠. 아주 착안을 잘 했어요. 착안과 노력의 결과죠.

한눈에 보는 감각, 세계적인 문학 추세도 이런 여성적인 특유의 기질이 잘 발휘되는 쪽으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이념이니 이런 장중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에 더하여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소설쓰기라는 것의 전제로 밑자락에 깔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읽는 것. 문학에 들리는 것. 쓰는 것. 많이 쓰다보면 자연히 문장은 세련되집니다.
맑은 마음. 자기가 진정으로 정직하냐, 진솔하냐. 벌써 우쭐해서 어거지로 폼부터 잡으며 쓰려고 하지는 않느냐, 그런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하고, 사는 자세. 자기의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을 철저히 챙길 만큼 챙겨야 합니다. 소설은 기술로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온몸이 달아올라서 혼신으로 쓸 때만 제대로 써지는 거예요.

끝으로 간디 자서전 첫머리에서 한마디 인용을 헤보겠습니다.
“진실탐구를 위한 수단은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론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한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지만, 사심(邪心)없는 아이들에게는 대번에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대체로 진실의 탐구자는, 먼지나 티끌에게도 그닥 신경을 안 써야한다. 세간 사람들은 먼지, 티끌을 그 발로 짓밟는다.
그러나 진실 탐구자는 그 먼지, 티끌에조차 짓밟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때만이, 그리고 그런 때가 되어서 비로소, 그는 진실을 흘낏이나마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쓴 것을 읽고, 독자가 무언가 우쭐거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면, 내 탐구 속에 무언가 옳지 않은, 껄쩍지근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아낸 번뜩임도 허깨비 같은 신가루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하고 독자들은 생각할 게 틀림없다. 나 같은 범상한 사람은 스러져도 좋다, 하지만 진실만은 이겨 내겠끔 해야 한다.
하찮은 나 한 사람 같은, 과오도 많은 인간을 판단하는데 있어, 추호라도 진실의 규준(規準)을 끌어내려 지게 해서는 안 된다.”

 

 

소설 창작 강의 (6)  -소설가 이호철

 

맑은 마음과 글쓰기



세번째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맑은 마음이라 하겠는데요, 이 맑은 마음을 설명하기는 간단치가 않아요.
정직, 솔직, 무사(無邪), 욕심이 없는 것. 말하자면 그런 마음.

예를 들면 초심자가 쓴 소설 보게 되면은요, 대개 분칠이 되어 있어요.
아, 내가 이렇게 책도 많이 읽었고, 인생에 대해 깊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정신들이 없지요.
그런 현시욕. 이것이 소설을 망치지요. 남을 속이려 드는 거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맑은 마음’이에요.

제가 40여 년 소설을 써 왔습니다만, 아직도 내가 그 버릇 못 버렸구나 할 때가 있어요.
말하자면 내 분수 이상으로 으시대고 싶은 거, 칭찬받고 싶은 거죠.
내 진정한 육성, 정직한, 정말 자신의 영혼 끝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장을 해 가지고….
그러나 추고(推敲) 과정에서는 이런 가식이 스스로도 보입니다.
그러면 스스로도 낯이 뜨거워지지요. 아서라, 아서, 너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권투 선수가 자기 고향에 가서 경기를 할 때 그 자기 고장 사람들한테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면 상대 선수를 KO로 제압해야 하잖겠어요?
거기에 너무 겨워 가지고 힘이 들어가요. 해설자가 그러지요.
아, 저 선수 고향에 와서 팔에 너무 힘이 들어간다고. 제 실력이 안 나온다고.
힘이 들어가고 뻣뻣하고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욕심이 있으니까요.
야구도 그렇지요. 홈런 치는 사람이 꼭 홈런을 쳐야겠다는 그 어떤 사욕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는, 몸이 유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고도의 훈련의 바탕 위에 KO의 펀치를 날리는 순간하고 홈런을 치는 순간은, 정말로 정말로 천의무봉의 맑은 경지가 되겠죠.
소설쓰기에도 그것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 마구 떠올라 원고지 옆에다 메모까지 해가며 쓰는 경우가 있어요.
평소에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 번뜩 번뜩 떠오르는 경우지요.
그런 건 지극히 많은 마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거죠.

소설쓰기의 실제 국면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 ‘맑은 마음’인데, 이것은 대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차츰 그 경지로 들어가지요.
그리고 끝머리에 가서는 자기도 놀랄 만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경지까지 가 닿아 작품이 뽑아 올라지지요.
그곳에 비로소 ‘창조의 지평’이 열리는 겁니다.

소설쓰기의 바탕이 공들여서 읽는 것, 뭐든지 쓸 것, 챙길 것, 맑은 마음을 갖는 것, 이렇게 되겠는데, 이것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읽으면서 느끼는 소설의 극적인 재미는 결국 그 작가와의 공유된 공간 속에서 누리는 재미였다는 말이죠.
즉 그것을 쓴 작가와 그 어떤 삶을 함께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자기 사는 만큼 쓰는 거예요. 물론 픽션으로 쓰지만, 구경적으로는 각자마다. 그 작가가 살아낸 만큼 쓰는 거예요.
살아낸 양(量)뿐만 아니라 살아낸 질(質)만큼, 그러니까, 내가 남하고 다른, 정말 나다운, 나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내 삶이 그만한 내용과 부피, 그만한 특색을 가져야지요.
응당 그렇지 않겠어요? 각 작가마다 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가 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조금 미친 듯한 세계, 프루스트 같은 아주아주 응석받이의 세계, 카프카 같은 이승과 저승의 그 어디 중간쯤인 것 같은 세계, 카프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시시하게 살았지요. 정말 시시하게,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 글 보게 되면 그이가 산 것만큼 쓴 거에요.

프루스트는 아홉 살 때부터 천식 걸렸으니까 어릴 때부터 누군가 늘 자기를 쓰다듬어 줘야 마음이 놓였어요.
그렇게 평생을 응석받이로 살았지요. 밤낮 계집애처럼 보호해 줘야 안심했으니까.
그런 응석받이에다가 장가도 한번 못 가고, 오십에 남색, 부르주아의 아주 타락한 사기꾼 비슷하게 살았죠.
남한테 괄시받으면서…. 그러니까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그러니 혼자 제 방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복수하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거예요.
그러니 프루스트 같은 사람은 실제 사는 것은 거짓말처럼 살았고, 그 사람의 진짜 삶은 소설로서였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아버지가 농민들한테 곡괭이로 맞아 죽었어요. 미친놈의 피가 내려오는 거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삶도 형편없었지요.
간질병, 폐병 걸린 마누라, 고생 고생하다가 『도박사』 쓸 때 구술을 받아쓰던 여비서와 맺어져서 그저 말년만은 괜찮은 편이었죠.
결국 그 사람의 삶의 투영으로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괴테는 재상까지 지냈지만 그 나름으로 불행했고, 발자크, 스탕달, 예외 없이 그 사람 생긴 만큼들 쓴 거예요.

결국 뭐냐?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내실이 뭐냐, 자기 삶이 타인과 다른 점이 있느냐, 예를 들면 고골리 같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의 별명을 잘 지었다고 해요.
자기 친구들의 핵심을 잘 집어 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죠? 그 사람의 문학적 자질이었죠.
각 작가들이 생득적인 특이성의 연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보게 되면, 조금 문제아들, 뭔가 변변치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잘살 것 같으면 소설 쓸 이유가 없을 거에요.
조금 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일 잘사는 사람이 뭡니까?
역시 권력 가진 사람들, 남 거느리고, 남 짓밝고, 남 자기 앞에서 꼼짝 못하게 벌벌 떨게 만들고, 제일 기분 좋죠.
그 다음 차선책은 뭐냐? 돈 버는 것. 돈 많이 벌어 가지고 거드럭대며 행세하는 것, 그러니까 모두가 권력에 탐닉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사람이 한평생 태어나서 제일 멋지게 사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권력일 거예요.
권력쪽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벌써 아이 때부터 달라요. 우두머리 노릇하고,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모시고.
권(權)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한고조 유방을 듭니다. 그 사람은 하늘이 내린 권력자였죠.
그런데 어거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아요. 권력 쪽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이러면 추해지죠. 흔히 보지요. 오랜만에 동창생들 만나면 둘이 있을 때는 아주 좋아요. 허심탄회하고.
그런데 한 네댓 사람 온다, 그때부터 잘난 척하고, 제가 한 급 위랍시고, 거기서 벌써 리더가 되려 하고. 그랬을 때는 아주 꼴보기 싫죠.
그런데 정말 권을 타고난 사람은 꼴 보기 싫지가 않아요. 당연히 거기 승복하게 되죠.
이런 권도, 부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말하자면 변변치 못하고, 주변머리 없고, 이래서 아, 나는 왜 이렇게 사나? 왜 이꼴로 생겼나, 이렇게 잔 생각이 많아져요.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왜 사나?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다 보면 책을 보고, 문학, 철학, 종교에 관심을 가지죠.

제 경우에는 조금 우둔해 가지고, 안톤 체호프다 하면 말이죠 신처럼 여겼어요.
아, 얼마나 잘생겼을까? 사진을 보면서도, 이런 사람은 얼마나 근사할까. 세상을 꿰뚫어 보고, 사람 속을 속속들이 알고, 이런 사람은 얼마나 대단할까.
그런 꿈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작가라는 사람들 보고는 항상 실망했어요. 꾀죄죄하고….

젊은 시인이 있어요. 「섬진강」이라는 절창(絶唱)이 있지요.
요즘은 시인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요. 별 개떡 같은 시도 많은데, 70년대 말쯤 이 시는 아주 좋았어요. 제가 홀딱 반했지요.
얘가 어떻게 생긴 앨까? 수려하게 생겼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내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있을 때 어느날 누가 와서 절을 꾸벅 하더라고, 아주 못생겼어, 키도 작고, 거기다 옷차림은 빨간 잠바데이 걸치고 꼭 연극판에서 막 오르내리는 일하는 사람 있죠, 연극판 심부름꾼 같아.
누구냐니까 그 시 쓴 애더라고. 야, 니가 그 애냐? 또 내가 속았구나. 물론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요.

자신의 삶을 투영한 진솔한 글쓰기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이 꼭 뭐 드라마가 없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뭘 찾기 위해서 가출을 뒤늦게 단행하는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어거지로는 안 되고, 결국은 운명이 돼야죠.
황석영 같은 사람이 조금 우쭐하는 멋도 있고 재미있는 사람이죠.
그 친구는 경복 다닐 때, 말하자면 좀 문제아였어요. 싸우다가 누구를 연탄집게로 찍어 가지고 학교 퇴학 직전까지 가고, 엄마하고 갈등이 많았고, 대학도 못가고 돌아다니고, 「삼포 가는 길」이나 『객지』도 그렇게 경황 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동진강인가에서 품팔이 할 떄의 경험이지요.
프랑스에 오래 있던 최민 씨하고 소설가 송영하고 셋이 친했어요. 송영은 날건달, 최민은 경기고 나오고 서울대 미학과 나온 수재로, 그래도 먹물로 치면 제일 좀 나아. 그래 그집 가서 술 마시고 그렇게 뒹굴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은 가야겠고, 그래서 지들끼리, 최민이가 D대학에 대리 시험을 쳤어요. 그때는 그게 뒷구멍으로 통했나 봐요.
근데, 적당히도 아니고 일등으로 합격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황석영도 창피해서 학교고 뭐고 아예 집어쳤다나요.
이문열 같은 작가도 서울대 사대 다니다가 몸이 아팠는지 어쨌는지 학교 휴학하고 이것저것 잡박하게 읽고, 그리고 뒤에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것 썼죠.
지금도 보면 어릴 때 뭔가 그렇게 통째로 깨진 사람들이 제대로 뭘 좀 씁니다.

제가 예전에 서라벌예대에서 창작 강의를 했었는데요, 보게되면 출생부터가 사생아 비슷한 아이들이 수두룩했어요.
6ㆍ25거치면서 집안이 엉망으로 깨진 사람들.

오정희 같은 각가도 이화여고 나오고 능히 서울대 갈 실력이었지만 서라벌 문창과에 지원했단 말입니다.
왜? 김동리, 서정주에 대한,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죠. 그 사람들을 보고 싶으니까.
사람의 품위나 생김에 관계없이 그 사람 나름의 문학에 대한 들림, 미침, 이것으로부터 문학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도, 소설가나 돼볼까? 신문에도 나고, 유명해지고, 몇자 쓰게 되면 원고료 나오고, 책 내면 인세 나오고, 아, 얼마나 좋을까, 하고 대드는 사람 더러 있겠는데, 그것 간단치가 않아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좋은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이 쓰는 것보다, 그 힘든 일보다 더 좋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 또 ‘흥, 자기는 이미 다 재미 볼 만큼 재미보고 나서 저러는군’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시골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신춘문예에 여러 번 투고하시고 그런 것도 저는 봤습니다.
인품 좋으시고 나보다 나이도 더 위시고, 이런 양반들,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나, 매우 난감한 적도 있었습니다.
소설쓰기의 길이란 그렇게 고독한 길이라는 것, 좋기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남이 모르는 고행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려면 한번 본때 있게 하고, 대강대강 그쪽이나 한번 기웃거려 볼까, 이런 정도로는, 싹수가 뻔해요. 요즘은 더러 그 무슨 글쓰기 장학생을 뽑기도 하는 모양입디다만, 저는 그것 반대입니다.
잘 자라날 아이를, 제대로 다른 능력을 발휘할 아이를 공연히 글재주 있다고 생각하게 해서 망치는 수가 있어요. 전문 글쓰기라는 것이 그렇게 누구나 해도 안되고, 그냥 정상적으로 살 사람은 잘 살 수도 있는데 공연히 백일장이나 한번 돼서, 나는 언제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착각하게 되면, 그만 문학병이 들고 말아요. 삶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문학? 저는 이건 말립니다.
물론 정말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이 드물게 있어요. 그것이 또 진짜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열에 아홉은 다른 분야로 잘 될 사람이 제 인생 망칠 수 있다, 이겁니다.

정말 미친 사람은, 미치게 읽는다든지, 미치게 쓴다든지 이렇게 시작되지요.
자기 생긴 만큼의 끝에 가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자기가 찾아내야지요.
이성적으로 머리로 찾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느 끝머리까지 가세요.

예술가란, 정말 훌륭한 예술가란,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죠.
좀 모자라거나, 괴팍하거나, 상식 수준으로 사는 데 성이 안 차는 사람. 물론 노력도 해야지요.
매일의 반성.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 나는 어떤 종류로 글을 써야 할까, 늘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 어떤 이의제기도 나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이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다, 할 때, 정정당당하게 맛설 수 있는 용기. 이런게 중요하지요.
남들 따라, 뭐, 민중문학, 민중문학 해야 평론가들이 알아준다더라, 이런 식의 생각이라면, 아예 애초에 집어치우는 것이 좋아요.
누구나 다 같은 말 할 때, 나는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자기 육성이 생길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조세희의 70년대 소설이 무엇이냐, 남들 다 문인 행세 할 때, 그 사람 독했어요.
잡지기자 할 때도 무척 꼼꼼했던 사람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독한 마음 먹고 구로공단에 들어가서 하숙하면서 공단 공원들 삶을 면밀히 노트했을 거예요.
야근 수당 얼마 받고, 라면은 언제 끓여 먹고, 몇 달 살면서 노트한 것 가지고, 픽션 가미해서 70년대 산업 사회의 단면을 그렇게 그려 낸 거죠. 아주 착안을 잘 했어요. 착안과 노력의 결과죠.

한눈에 보는 감각, 세계적인 문학 추세도 이런 여성적인 특유의 기질이 잘 발휘되는 쪽으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이념이니 이런 장중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에 더하여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소설쓰기라는 것의 전제로 밑자락에 깔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읽는 것. 문학에 들리는 것. 쓰는 것. 많이 쓰다보면 자연히 문장은 세련되집니다.
맑은 마음. 자기가 진정으로 정직하냐, 진솔하냐. 벌써 우쭐해서 어거지로 폼부터 잡으며 쓰려고 하지는 않느냐, 그런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하고, 사는 자세. 자기의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을 철저히 챙길 만큼 챙겨야 합니다. 소설은 기술로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온몸이 달아올라서 혼신으로 쓸 때만 제대로 써지는 거예요.

끝으로 간디 자서전 첫머리에서 한마디 인용을 헤보겠습니다.
“진실탐구를 위한 수단은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론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한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지만, 사심(邪心)없는 아이들에게는 대번에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대체로 진실의 탐구자는, 먼지나 티끌에게도 그닥 신경을 안 써야한다. 세간 사람들은 먼지, 티끌을 그 발로 짓밟는다.
그러나 진실 탐구자는 그 먼지, 티끌에조차 짓밟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때만이, 그리고 그런 때가 되어서 비로소, 그는 진실을 흘낏이나마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쓴 것을 읽고, 독자가 무언가 우쭐거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면, 내 탐구 속에 무언가 옳지 않은, 껄쩍지근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아낸 번뜩임도 허깨비 같은 신가루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하고 독자들은 생각할 게 틀림없다. 나 같은 범상한 사람은 스러져도 좋다, 하지만 진실만은 이겨 내겠끔 해야 한다.
하찮은 나 한 사람 같은, 과오도 많은 인간을 판단하는데 있어, 추호라도 진실의 규준(規準)을 끌어내려 지게 해서는 안 된다.”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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