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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2) -소설 읽기의 실제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3. 3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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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 (2) -소설가 이호철

 

소설 읽기의 실제

소설 읽기라는 실제 국면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 소설 많이 읽으셨지요? 사실 소설 읽기라는 것은, 분명한 어떤 실체를 잡기가 힘들어요.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면 그냥 읽어 나가면서 반 너머는 잊어버립니다. 어디, 하나하나 다 챙기면서 읽어 나가나요? 자잘한 것들은 잊어버리면서, 그냥저냥 읽어 나가요. 읽으면서 잊어버리면서 자꾸 읽어 나가요. 어떤 이미지는 그동안에 누적이 되지요. 알게 모르게 뿌옇게. 그리고 다 읽고나면, 어이가 없지요. 남는게 별로 없어요. 그 소설 전체가, 명확하게 실체로서 잡히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냥 다 안개 속을 뚫고 나온 듯이 스러져 버렸어요. 죄다 스러져 버리고 뭐만 그냥 남았으냐 하면, 어떤 인물의 표정이라든지, 인물의 어떤 모습 혹은 대목 대목의 자기 취향에 맞는 어떤 장면이라든지, 그런 부분 부분들이 조금 남을까 말까 하지요. 그 밖엔 죄다 흘러갔어요. 이렇게 딱 눈을 부릅뜨고 내가 이때까지 뭘 읽었나 따져 보게 되면, 실제 남는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오랜 세월 지나게 되면 어떠냐, 어렵쇼, 그 어떤 분위기, 잔영(殘影)같은 것이 강하게 남아 있게 되지요.
여러분들이 더러 친구들과 만나서 『죄와 벌』을 읽었다고 들었을 떄, 자기도 그걸 읽었으면 꽤나, 반갑지요. 아, 나두 읽었어하고. 그런데 그 읽은 것을 당장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잔영으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분명히 있거든요. 소냐면 소냐, 라스콜리니코프면 라스콜리니코프 혹은 『부활』같으면 네플류도프, 카츄사, 어느 장면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전체 덩어리로 어떤 분위기는 어느새 자기한테 깊이 와 닿아 있었단 말이에요. 자기 핏속에 녹아 들어 있었어요. 그렇지요?
실제로, 『부활』은 톨스토이가 거짓말로 만들어 낸 이야기고 『죄와 벌』도 도스토예프스키가 픽션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인데, 그것을 읽고 난 지금, 내 기억의지평에는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어떤 체험처럼 남아 있어요. 우리가 뭐 실제 라스코리니코프를 만나 보기를 했습니까, 소냐를 만나보길 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실제 만나 본 사람 이상으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제가 1991년에 모스크바엘 갔었는데요. 전철을 타고 보니까.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는데요, 도스토에프스키가 『죄와 벌』을 쓴 것이 1866년이니까 130~140년 전이란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전철 속에 서니까, 아, 라스콜리니코프 저기 있네, 아, 저 사람은 그 검사 닮았네, 『죄와 벌』에 나온 그 인물들이 전철 속에 고스란히 있더라구요. 머리도 더부룩하고 그냥 착해빠지게 생겼고 책 몇 권 끼고 서 있는데, 영락없는 라스콜리니코프에요. 그리고 안조끼 받쳐 입은 회색 신사복 차림으로 날카롭게 생긴 사람 하나도 영락없는 『죄와 벌』의 그 검사더라구요. 그러니까 러시아라는 풍토 속에 연면하게 이어져 오는 ‘사람살이’ 자체가 130~140년이라는 시공을 뚫고 지금 20세기 말에도 내게는 그대로 보이더라는 거죠.
우리가 소설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말하자면 소설이라고 하는 그 시공의 사람살이로써 강렬한 체험을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이 된다는 말이죠.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는 픽션으로 만들어 낸 것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강렬하고 리얼리스틱한 그런 체험으로 직접 겪는 것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풍요’지요. 읽는 것과 안 읽는 것은 바로 사람살이의 여러 국면을 체험으로 겪어 보느냐, 못 겪어 보느냐의 차이가 되지요. 알게 모르게, 사람살이에 대한 자기 족의 대응이라는 쪽을 풍부하게 하는 거지요.
우리가 『죄와 벌』이나 『부활』 같은 소설을 읽게 되면, 그 안에 나오는 사람들의 아주 극적인 사람살이 국면에 홀딱 반해서 읽어 가는데,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것을 써 낸 사람의,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인생에 대한 생각, 경험, 그 당대의 풍속 혹은 당대 러시아 사람들의 심성, 이런 것들을 그 작가들이 포착한 대로 읽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달리 말하면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작가가 이 세상을 보는 안목의 깊이, 넓이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많이 안다. 깊이 알고 그것을 우리는 작품을 읽어 가며 알게 모르게 체험하는 것이죠. 결국 읽는 동안 그 작가하고 같이 사는 거죠. 그렇지 않겠어요? 자꾸 읽으면 톨스토이니, 도스토예프스키니, 체호프니, 하는 작가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아져요.
제가 안톤 체호프를 열일고여덟 살 때 가장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체호프에 대해서는 훤히 알아요. 세월이 오래 지나더라도,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같이 그렇게 선렬(鮮烈)하게 읽어낸 소설의 분위기에 대한 기억, 인상, 이런 것은 죽을 때까지 남지요. 저는 지금도 여러 가지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좌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가 라스콜리니코프하고 처음 만나면서, 소냐, 즉 자기의 의붓딸 이야기를 할 때, 허름한 맥주집에서 탁상을 두드리며 하느님을 원망하며 지껄이는 상황. 그걸 읽던 열일고여덟 살 때 느꼈던 그 강렬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그 소설 속의 태반의 부분 부분은 죄다 빠져 나가고, 읽고 나서는 뭐를 읽었는지 그냥 구름 잡듯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분위기라든지, 대목대목 장면들만 조금 기억이 있을까말까 그런데, 세월이 오래 지나서 보면 그 부분부분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그 소설의 핵심적인 분위기는 확 기억으로 살아나게 마련이란 말이에요. 이것이 소설 읽기의 실제입니다.
나도 그런 소설을 써 낸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죠.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소설도 예외없이 서푼어치 머리끝으로, 계산대로, 의도껏, 자기 생각대로 뭘 써 내겠다고 해서 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가의 영혼의 저 끝머리까지와의 치열한 실랑이 속에서 뽑아 내는 어떤 것이란 말이죠. 예술가에게 있어 자질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인데, 이것이 무슨 머리가 좋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인생 식견이 많아서 이것을 소설로 써 내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건 어떤 운명적이 뭣이 있어야 가능한 것니다. 아주 구경(究竟)적으로 끝머리에 가 닿는 건, 거창하게 말해서 우주적이라고나 할까요.

다음 강의에서는 소설을 쓸 수 있는 기초 자질에 대하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처: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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