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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글의 소설강좌 3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6. 11. 3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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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글의 소설강좌 3 --- 영화를 닮아 가는 최근 소설들 | 조정래

 

영화를 닮아 가는 최근 소설들 | 조정래


1. 무럭무럭 자라서 제멋대로 크는 아이들

소설 장르는 자본주의 산업사회 이후 읽을거리의 주류가 되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만큼 소설 장르가 개인이 사회를 이해하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사회 성격은 어떻게 변화할 지 모르기 때문에 소설 장르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나 예측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앞으로 중심세력을 형성하여 소설 문단을 이끌어갈 젊은 작가들의 경향을 분석해보는 방법일 것이다. 이른 바 신세대작가라고 하는 이들이 바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세대작가들이 앞으로 새로운 세기가 펼쳐지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작가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경향을 지니고 있고 그 경향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예측해보면 소설문학의 단기적인 변화는 어느 정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신세대작가라는 말이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시대적 징후를 지니고 논의된 적이 세 번 있다. 신세대라는 것이야 늘 세대가 바뀌며 역사가 진행하는 법이니까,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하나의 사회적 관심 담론으로 떠오를 경우에는 그러한 당연한 현상으로서 화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세대라는 것이 시대적 특성으로 부각되는 경우이다. 즉 사회의 변화가 극심하거나 큰 변혁이 있거나 혹은 사회적 위기감이 농후하게 감지되거나 하는 그런 경우이다. 신세대작가라는 말도 이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 법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신세대작가라는 용어가 처음 제기된 것은 1930년 대 중반기이고, 두 번째는 1950년 대 전쟁 직후이다. 두 경우를 간략하게 비교해보면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두 번 다 그 시기가 사회적 위기감이나 좌절감을 크게 겪었다는 점이다. 30년 대에는 파시즘이 강화되면서 전쟁 체제가 굳어지는 시점이었고, 50년 대에는 말 그대로 전후의 허무감이 암운처럼 사회를 뒤덮었다. 그 다음, 두 번 다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작가들은 삶의 현상과 실재론적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30년 대의 김동리, 황순원 등이 삶이라는 그 현상 자체에서 서사의 핵을 찾았다면, 이범선, 김성한, 장용학, 선우휘 등의 50년 대 신세대작가들은 실존적 뿌리에 초점을 두었다. 셋째로, 그런 만큼 두 경우 다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문학 체계를 선도한 이들은 극우파적 경향을 지녔고, 그 성향 때문에 이후 문단의 형성에서 주도적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문단의 새 조류를 만들어낸 그들은 이후 어떤 권력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 대에 진입하면서 우리 문학사는 또 다시 신세대작가에 관한 논의에 마주쳤다. 물론 이들 신세대 작가들과 이전의 신세대 작가들을 같은 성격으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만한 구체적 근거를 아직 우리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전의 문학사적 현상들에서 보았던 변화를 오늘날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조짐을 느끼는 일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앞의 두 시기가 그랬듯이 사회적 위기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물론 그 성격은 30년 대나 50년 대와는 다르다. 지금의 위기감은 세기말적 현상이라는 철학사적 성격을 갖기도 하면서 과학 기술의 무분별한 치솟음에 의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동시에 경제체제의 급진적 변화와 정보통신사회의 단절감이 파생하는 사회사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위기감의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만큼 전망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기감과 절망감은 이전 시대보다 더 근원적이고 암담하며 깊다. 따라서 30년 대, 50년 대와 마찬가지로 신세대 작가들은 존재의 현상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은 늪과 같은 절망감에 대한 반응의 하나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윤대녕과 신경숙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다 존재의 내부를 들여다 보되 현상적으로 본다. 따라서 존재의 내면, 특히 객관적이고 철학적인 혹은 보편적인 내면이 아니라 주체의 자각적 현상으로서 내면을 들여다 보고 표현한다. 비록 그 방향은 작가마다 다르지만,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 현상이다. 그런데 이들 작가 이후의 최근 기준에서 신세대작가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후배작가들은 더욱 더 현상에 집착하고 실존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로 이들 신세대작가들은 비록 진보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의 진보성은 우파적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풍성한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두고 삶을 바라보며, 그만큼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비판과 현실비판과 진보추구는 산업사회가 배출해 놓은 억압과 소외 현상을 대상으로 삼는다. 셋째 이전의 신세대작가들이 그러했듯이 90년 대 신세대 작가들도 다음 세대의 문단에서 주류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세대 논의 자체가 그러한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지금 신세대 작가들의 공통된 또하나의 특징은 이들이 빠르게 문단에 흡수되고 자기 자리를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를 펼치는 데에 거침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등단한 작가들이 어느 정도의 문장 수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장력에 있어서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잡지에 올 리는 데에는 시간이 그다지 걸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런지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빠르고 쉽게 해내는 듯하다. 그러나 자기의 세계에 대한 자아집착이 강한 반면 그에 대한 깊은 성찰과 책임의식은 따르지 못하는 듯하다. 그것은 속도감에 반비례하는 것인데, 어쨌거나 이들의 창작 속도나 발표지면의 확보는 참으로 빨라서 쉽게 세대적 공유공간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이른 바 신세대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들에게서 공통된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특성을 찾아낸다면 앞으로 소설의 변신 방향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변화의 모습은 다양한 요소에서 번져갈 수 있다. 기법에서, 혹은 작가의 내면풍경에서 혹은 언어에서, 변화가 시작하고 그에 따라 소설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요소들의 총합이 소설이고 변화를 이끄는 주도적 역할을 소설의 요소 중 어느 한 쪽이 맡을 수는 있지만 결국은 같이 변하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소설의 이미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이미지, 수단에서 목적으로

그런데 최근의 신세대작가들은 90년 대 초의 신세대작가들과는 조금씩 다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윤대녕, 신경숙, 박상우, 구효서 등이 기존의 작법에 대한 반감을 보이면서 더 세밀하게 존재의 내면에 침투해가는 문장을 다듬으면서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미적 감각은 언어에 기반을 둔 것이고 언어를 활용한 서사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물론 이전의 작가에 비하면 인과율을 바탕으로 한 서사성 자체를 신뢰하지 않아서 서사성의 골격을 많이 와해시키기는 하였지만 서사성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서 배운 후배들은 이제 그 서사성에 대한 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서사성 자체의 고유한 골격을 부수려하고 있다. 그들은 이야기가 본질인 소설을 쓰면서도 서사에 의존하기 보다는 서사적 언어에 기대면서 실상은 시각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데에 더 치중하고 있다.

이미지란 생각과 느낌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상적 상을 의미한다. 슬프다, 기쁘다, 그립다, 귀엽다 등의 느낌이나 감각 혹은 마음의 작용등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는 있지만 그 있음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야기를 만들고 대화를 소통할 때 우리는 진실을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상적인 영상을 만들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꾸미고 그 영상을 매개로 하여 서로의 소통을 나누는 것이 이미지 기법의 개발이다. 즉 이미지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매개 수단이었다. 그 수단을 치밀하게 기법화하여 언어로서 영상을 만들어 낸 이들은 시인들이었다. 물론 화가들은 훨씬 실상적으로 이미지를 직접 이용하였다.

이미지로서 소통을 하는 수단은 매우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현상적이어서 고도의 형이상학이나 성찰을 담아내기에는 그 자체로는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성찰의 철학적 전개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문학은 직접 감각을 이용하는 미술이나 음악과 달리 언어를 매체로 이용하기 때문에 가장 깊은 상상력과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소통을 구체화할 수 있는 장르인데, 너무 이미지에 집착하면 그런 언어 매체의 장점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갈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관계도 다중적이 되며 사물을 이해하는 각도도 넓어지게 되었다. 반면에 사물을 주체가 수용함에는 속도감을 요구하게 되었다. 더 쉽게 더 빨리 라는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 이미지의 활용이었다.

특히 통신매체가 발달하고 정보사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모든 사물을 이미지로 환원하여 통신의 대상으로 삼고, 이미지 자체를 통신의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어떤 기업의 로고는 그 기업을 상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상품에 대한 신뢰도의 이미지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사랑, 행복, 가슴떨림, 죽음, 고독 등의 사물들도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 이미지로서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 수단의 범람에 큰 몫을 하는 것이 CF들이다. 영화관이나 TV에서 보는 CF는 이미지를 미화하고 모든 전언을 이미지로 바꾸는 데에 탁월한 기법과 흡인력을 개발해내었다. 이런 영상들은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하고 심지어는 하루하루가 이런 영상 이미지로 채워진다고 여길 정도이다.

이미지 수단에 의한 상품화, 통신화, 정보화 하는 사회는 자연스럽게 시각적 문화를 중심으로 끌어오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각적 문화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시각문화의 흐름은 그 자체가 정보통신사회의 산물이고 그런만큼 소통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며, 또 시각문화로의 추이는 소비적 욕망에서 출발한 시장문화이기 때문에 어렵고 까다로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최근의 이미지화에 다른 시각 중심 문화는 통속적이고 풍속적이며 생활적이다. 한편 정보통신화에 따른 개인의 소외감과 격리감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개인의 사정을 위로해줄 수 있으면서 개인과 사회를 연결짓는 것이어야 한다. 서사를 담고 있되 서사 본래의 골치아픈 관념성을 떨쳐 버리고 쉽고 편안하며 빨리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언어적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수용할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 방법으로 쉽게 수용할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이런 욕구에 가장 합당한 장르가 영화이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지만 근본적으로 이미지를 결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각적 문화체이다. 따라서 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문화권역에서 급격하게 영화가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다. 물론 그 지배력은 대중문화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예술적 영역에서도 영화가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이미지를 중심 매체로 삼는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점 이미지는 수단에서 목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어떤 메시지와 생각이나 정서를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던 이미지가 이제는 표현의 목적 자체로 대두하는 것이다. 이제 독자 혹은 관객들은 무슨 이미지가 있는가를 보려고 예술에 접근한다.

3. 가상현실과 허구적 서사

더욱 소설의 사정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가상현실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가상현실은 컴퓨터가 발전하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말그대로 가상적 시공간인데, 원래는 어떤 논리전개의 필요상 가설적으로 상정한 단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가상현실은 논리적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과정에서만 필요한 것이며 어떤 필요성이 충족되면 바로 사라지는 그러한 세계이다. 그런데 시각적 문화와 가상 현실이 결합하면서 가상현실을 하나의 상상세계로 격상시키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자체를 문화적 작업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가상현실에 심취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주위에서 볼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이 컴퓨터게임과 애니매이션이다. 그런데 이런 가상현실을 즐기고 가상현실을 현실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그 세계에 심취하여 가상현실을 현실 반영의 하나로 착각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허구와 혼돈하는 현상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이 또한 이미지를 목적으로 삼는 착각 현상과 하나로 통한다.

가상현실과 소설의 허구는 당연히 다르다. 그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가상현실은 논리적으로 혹은 공상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므로 거기에는 현실의 다양하고 총체적인 구조적 관계와 삶의 환경이 내재하지 못하는 반면 소설의 허구는 논리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담기 위한 미적 성찰로 구조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가상현실에는 어떤 진실도 들어있지 않은 반면에 소설의 허구는 진실을 규명하고 소통하려는 의도와 그 형성 과정이 담겨있다. 영화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좀 복잡해서 단순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가상현실을 영화의 세계로 내세우는 경우도 있고 삶의 과정을 재현하는 허구적 현실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보다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가상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문화감각에는 더 가까운 장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의 신세대 작가들은 급격하게 이미지 추구, 가상현실적 방법, 이야기의 영화화에 쏠리고 있다. 이제 이 문제를 소설의 장르 성격 변화와 관련하여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금년도 현대문학사에서 발간한 <올해의 좋은 소설>에 실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선택한 이유는 없지만, 여러 현장 비평가들이 올해의 좋은 소설로 추천한 작품들이니만큼 객관성에 비추어 최근 경향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 작품들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윤대녕은 신세대작가의 좌장격인데, 이 작품집에는 <3월의 전설>이란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하동, 구례 지역을 원거리 배경으로 삼고 서울의 거리를 근거리 배경으로 삼으면서 두 배경을 병합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현실과 현실의 뿌리라 할 시원의 세계를 중첩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물론 이렇게 시원의 세계를 찾는 여정은 윤대녕의 특징적 소설 세계이고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은어, 벚꽃, 매화등의 자연물을 그를 위한 소재로 활용한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목각, 레코드판 등의 사물들도 인연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존재 원리를 해명하려는 이야기의 소재로 쓰인다. 여기에 네 명의 여인이 나타나서 그 네 명이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한 모호한 설정을 통하여 우리 내면의 모호함을 끌어들이면서 그 근원의 아릿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고 현실 또한 모호하기만 해진다. 윤대녕의 이 작품은 결국 현실을 가리고 추상적 이미지로만 기능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연기 속에 아른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있다고만 알려준다.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하여 현실의 어디에서 출발하여야 하는지 혹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듣지 못한다. 아른거리기만 하기 때문에. 실제의 우리 삶이 아른거리기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항변을 신세대 작가들에게서 우리는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아른거리는 것을 아른거린다고 말하기는 쉽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더 멋지게 할 수 있음을 자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적어도 볼려는 의지라도 없으면 시원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삶의 한 풍속도를 집약하고 축조한 이미지 한 쪽이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은 윤대녕보다 더 이미지적이고 가상현실적이며 훨씬 영화적이다.

김영하의 <흡혈귀>는 벰파이어, 호러, 공포물 영화를 닮았다. 두말 할 것 없이 이 작품은 드라큐라식 영화 문법에 즉해 있다. 한 개인의 소외 현상과 반사회적 아웃사이더로 변해가는 현상을 통하여 우리 삶의 억눌림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된 목소리로 보인다. 그러나 인물의 엽기적 기행이 작품 안에서 해명될 가능성은 없다. 현상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이 작품은 드라큐라식 영화를 현실 해부에 이용하려고 시도했는지 모르나 결국은 드라큐라식 인식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을 빌려온 꼴이 되었다. 원재길의 <먼지의 집>은 이 작품 과는 그 성격이 다르지만 기법면에서는 컬트무비적이어서 흡사함을 보여준다. 침대에 누워있던 여인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먼지로 화해가는 모습은 영화의 한 씬을 연상하게 한다.

하성란의 <양파>는 우연을 계기로 하여 전개하는 우리 삶의 굴곡을 담아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서술자의 기능이 거의 제거되고 있다. 모든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을 카메라로 보여주듯이 보여진다. 물론 거기에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서술자의 기능이 완전히 제거될 수 없고 다만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표현 양상 역시 영화적이다. 이 소설에서는 회칼, 유모차, 찌그러진 자동차 등의 이미지가 소설 전면에서 이야기를 감싸고 있다. 삶을 이야기하려는 소통의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독자는 작가의 눈이 무엇을 보는가를 볼 뿐이다. 하성란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작가들의 이미지 추구는 마치 홍콩의 왕가위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런 이미지 추구 작업이 미적 감수성을 촉진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을 모두 이미지로 치환함으로써 현실을 몽롱하게 문질러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우려감을 갖게 한다.

백민석도 신세대작가 중 특이한 기풍으로 자기의 세계를 나름대로 축조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데 그는 기본적으로 폭력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폭력 자체를 미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음을 뜻한다. 물론 어느 작가가 폭력을 지향하겠는가? 그가 폭력적 세계를 지향한다는 말은 폭력 자체를 즐기게 하거나 자신이 즐긴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작품의 세계를 폭력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 관계를 폭력에 기반하여 보려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백민석이 다루는 방식은 느와르 영화식이다. <목화밭>은 한 대학강사와 그 부인을 중심에 두고 그 부부가 폭력으로 삶의 의미를 형성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어떤 근원적 이유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이야기로 현실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부각시킬 수가 있겠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폭력을 사랑한다는 케케묵은 발견 외에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처럼 최근의 소설들은 영화적 논리, 영화적 기법, 영화적 문맥에 빠져있다. 그로써 얻는 것은 현실 감각의 미적 탐구, 이미지의 새로운 개발, 우리 개인의 내면적 다양화와 그 황폐한 그림자 보기 등이겠지만, 잃는 것은 소설 자체의 힘이다. 이 작가들이 설정하는 주인공의 환경이란 거의 다 가상현실이다. <먼지의 집>의 먼지 투성이 집, 형과 말없는 여인 등도 가상현실적이고, 김영하의 <흡혈귀>가 설정한 부부의 삶도 가상현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목화밭>에서 그려지는 삼촌과 그의 사무실, 삼촌과 주인공과의 관계, 부부 폭력 등도 가상현실적이다. 배수아, 하성란, 정경린 등이 그려내는 비일상적 일상화도 역시 현실의 문맥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현실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한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소설들은 현실을 왜곡되게 조작한 이미지들일 뿐이다. 거기에는 구체적 삶의 과정과 연결할 어떤 고리도 없기 때문이다.

4. 새로운 소설의 세계 찾기

지금까지 영화화되어 가는 소설 작품 경향을 꼽아서 소설 장르의 변화라는 취지에서 살펴보았다. 문제는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런 경향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첨단화하는 것으로 보는 착각들이다. 물론 이런한 소설들이 일정한 진보적 열정을 담고 있고 치열한 실험정신을 겸비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열고자 하지만 지금은 그 문이 보이지 않으므로 여기저기를 쳐대며 그 통로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나왔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듯하면서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단순해 보이는 현실 자체의 성격에서 나온 것임도 사실이다. 정보통시 사회가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개인적 삶의 무의미화, 관계의 단절 심화 등에 대한 어떤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가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총체적 본질을 찾으려는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다양해지는 것이 좋고 그 다양한 방법 들에 대한 이해와 탐구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삶의 중심은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을 바로 보는 것이 모든 방법의 근원에 놓여져야 한다. 그러지 위하여는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현실 속의 틀을 찾아야 하고, 여러 관계 즉 개인과 개인의 관계, 인간과 자연, 사물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 등을 이해하려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사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서사성을 회복해야 관계가 살아나고 관계가 살아나야 주체의 다양한 삶의 방법과 태도도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새로운 세기의 소설은 머지 않아 인간의 총체적 복원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 인간이 지혜로와 진다면 잘 사는 것을 새롭게 추구할 것이고, 새로운 삶의 방법과 정신을 계몽하기 위한 서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서사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서사성은 이전의 이야기 방식과는 달라져야 한다. 지금 이미지화와 영화 기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지닐 수 없으나, 근본적인 서사성을 갖춘 마당에서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 잘 가꾸면서 서사의 근본적 힘을 상실하지 않도록 지키는 노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글. 조정래(드림위즈 문학동호회 시샵, 서경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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