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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글의 소설 강좌 1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6. 11. 3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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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글의 소설 강좌 1 


관찰, 통찰, 성찰 | 조정래

문학 창작은 관찰에서 시작합니다. 관찰이 주제로 변화하는 원리를 간략하게 설명한 글입니다.

1. 글은 나와 세계가 만나는 자리이다.

문학은 왜 필요한가? 우리는 왜 글을 읽고 쓰는가? 잘 살기 위해서이다. 잘 사려면 삶을 이해하고 삶의 원리를 판단해야 한다. 삶이란 나와 세계의 만남을 의미한다. 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나와 세계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 내가 세계와 부딪히고 억눌릴 때, 나는 불행하고 피곤하다. 내가 잘 살기 위한 길은 나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화합하려면, 우선 나를 알아야 하고 다음에 세계를 알아야 한다. 물론 나는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를 알려면 세계와 나의 관계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알고, 세계를 안 다음에 나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세계와 화합할 수 있을 터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고 판단하며, 궁극적으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글을 통해서 그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언어로 세상과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로 숨쉬고, 언어로 사유하며, 언어로 느낌을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를 통하여 나를 생각하고 나의 삶을 발견하며, 나를 이루는 세계를 타진한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가 하면, 남이 쓴 글을 읽으면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을 재정립한다.

그러므로 글은 나와 세계가 만나고 소통하는 광장인 셈이다. 나라는 존재가 단순하고 세계가 확연하다면 우리는 굳이 글을 통하지 않아도 잘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직관으로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성인이나 도인들은 이런 시각을 얻은 사람이리라. 나와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각성을 얻었기 때문에 언어가 필요없을 듯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염화시중의 미소, 언어 이전의 깨달음은 그래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필히 우리 인간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 테지만, 사회는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나도 복잡하고 다중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와 세계의 관계는 직관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 눈에 소통하는 길을 찾아버리면 되는데, 현대 사회의 복잡성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많은 방법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글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화될수록 삶의 길을 찾는 글도 다양하고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갈수록 문학의 장르가 해체되고 여러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제 장르를 초월하는 장르인 수필 혹은 에세이가 더욱 중요해지는 시점에 있다.


2. 나를 발견하는 길은 직시하는 것이다.

글이 나와 세계의 만남, 혹은 소통의 광장이라면, 이 광장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소통을 시도하려면, 가장 먼저 나를 바로 정립해야 한다. 나를 알지 못하면 세계와 내가 어찌 소통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나를 알고 세상과 나의 관계를 알려면 우선 내 체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나를 중심에 두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체험을 통하여 거기에서부터 생각을 펼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숱한 경험을 한다. 산다는 것은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경험이라 부른다. 그리고 경험이 글쓰기의 출발선임을 우리는 잘 안다. 경험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이 바로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한 것을 그대로 옮겨서 글이 되면 좋겠지만, 그것은 문학적인 글이 되지 않는다. 문학의 본질은 허구이다. 즉 현실에서 겪은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꾸미고 바꾸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경험이 바로 글의 내용이 되지는 않지만, 경험에서 글쓰기의 작업이 시작함은 사실이다.

간혹 경험이 적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이는 경험을 잘 못 이해한 탓이다. 우리가 산다는 자체가 경험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경험이 없다고 여길까? 그것은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을 자기 것으로 체화시켜서 새겨둘 때 그 경험은 문학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이를 체험이라 부르도록 하자.

체험은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 아니 내가 살면서 새겨 만든다. 경험이 체험으로 승화하려면 거기에 나라는 주체가 작용하여야 한다. 내가 의미를 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숱한 경험에서 새겨지는 체험은 적다. 경험을 체험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관찰이다. 관찰이란 자연 세계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발견함을 뜻한다.

우리는 하루의 삶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행동을 하고 많은 일을 겪는다. 거기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며, 소중하고 하찮음이 없다. 그 일들을 크고 작다든가, 하찮고 귀하다든가,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아무리 큰 일도 자신이 모르고 지나면 하찮게 되고, 아주 사소한 일도 자신이 거기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소중한 것이 되는 법이다. 따라서 관찰이란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관찰을 잘 하는 방법은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무시하는 시각, 부정하는 시각, 도피하는 시각, 그리고 직시하는 시각이다. 무시하는 시각은 세계를 업수히여기고 가볍게 보는 것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확대하기 때문에 생기는 시각이다. 광신도들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부정하는 시각은 무엇이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늘 싸울 일만 만나고 다닌다. 자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어렵다. 도피하는 시각은 어떤 일을 만나든 도망갈 궁리부터 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세계와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 세계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미신도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세계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도피해서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즉 관찰하고 거기에서 자기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음이 당연하다. 따라서 세계와 바르게 소통할 길이 열리지 않는다.

직시하는 것만이 세계와 내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직시함은 "있는 그대로,세밀하게, 끝까지" 보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세밀하게 끝까지 보다보면 거기에서 큰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뉴튼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그 사소함에서 만유인력이라는 큰 법칙을 발견하였듯이. 바로 이것이 관찰이다.
관찰을 잘 하려면 평소에 관찰하는 연습을 해두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을 끝까지 세밀하게 보되,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그래서 사물을 투시하는 시각을 얻는 연습을 하면 저절로 세계에서 내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직시를 하는 것은 내 눈 밖의 대상을 보는 것이지만, 이 일을 통해서 나 자신도 관찰할 수 있음이 중요하다.


3. 생각을 통하여 이해하고 판단한다.

글쓰기의 초보 단계에서는 관찰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그것으로도 보통 사람이 얻을 수 없는 자기 만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 혹은 문학은 더 깊은 자기 삶의 초월을 꿈꾼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관찰을 지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해하고 판단하는 작업이다. 이해하고 판단하는 일은 생각의 작용을 거쳐야 한다. 관찰을 통해서 우리가 마주치는 자기의 내면은 보통 두 가지이다. 욕망과 감정이 그것이다. 우리는 욕망과 감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기 욕망과 감정과 상관이 없으면 우리는 지나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작은 일에도 욕망과 감정은 얽혀들므로, 작은 일을 직시하면 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욕망과 감정을 통하여 세계를 만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새로운 인식을 끌어내려면, 그 욕망과 감정을 이해하고 판단해 보아야 한다. 이해와 판단이란 바로 생각의 작용에서 이루어진다.

생각의 작용을 통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통찰은 어떤 일이나 사물의 앞, 뒤 관계를 한꺼번에 살핀다는 뜻이다. 어떤 사물이든 그 사물의 현상이나 작용에는 그에 대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물의 현상이나 작용은 또 다른 결과를 예비하고 있다. 이를 우리는 인과관계라고 한다. 인과의 법칙은 말 그대로 씨앗과 열매의 관련성을 뜻한다. 인과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인과의 관계를 따져서 우리에게 닥친 일을 살펴보는 것이 통찰이다.

인과의 법칙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읽게 한다. 그러므로 인과의 법칙은 시간의 연속성에서 파생한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시간의 연속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인과 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숱한 인과의 고리 안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는 것이 생각의 작용이다. 통찰은 인과관계를 통털어 읽어내고 거기에서 어떤 씨앗을 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 방향의 탐구는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설정할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뜻을 세울 때 그 길도 보이는 법이다. 통찰은 뜻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욕망을 뜻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운 연인을 만나고 싶다, 명예로운 삶을 살고 싶다, 많은 돈을 벌고 싶다, 등등을 뜻이라고 생각하기 싶다. 이는 뜻이 아니라 욕망이다. 혹은 죽고 싶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싶다, 몽롱한 취함의 세계에 빠지고 싶다, 등등을 뜻이라 생각하기 싶다. 이는 감정에 속한다. 어떤 사물을 직시하면 그 사물과 나의 관계를 찾아낼 수 있다. 이 관찰은 욕망과 감정의 축에서 이루어짐을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욕망과 감정에 머물지 말고, 거기에서 그런 욕망과 감정이 열매라면 그 씨앗을 즉 그 욕망이 생긴 원인을 찾아보고, 그 욕망과 감정이 무엇을 배태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생각의 과정으로 나의 참된 뜻을 찾는 것이 통찰인 것이다.


4. 마음의 각성을 통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관찰을 통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삶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일에 그쳐서는 문학적 글쓰기, 혹은 글읽기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문학과 예술의 참된 목적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학에서는 흔히 심미적 인식이니, 심미적 성찰이니, 심미적 이성이니 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이런 미학적 용어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음을 뜻한다. 그런데 문학의 아름다움이란 감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예쁜 옷을 입은 소녀도 아름답고, 단풍이 잘 우거진 산자락도 아름답지만, 고운 마음을 나누는 우정도 아름다운 법이다. 자연과 인위적 장치와 삶 모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심미적 인식이나 각성은 일차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언어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 닿을 곳은 나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바른 정립, 그래서 참된 나의 행복 추구에 있다. 나와 세계의 일차적 관계를 직시하는 것이 관찰이고, 거기에서 인과적 관련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통찰이라면, 그를 통해서 아름다운 삶을 실천해나가기 위한 구체적 발걸음이 성찰이다.

물론 성찰은 마음으로 이루어내어야 한다. 성찰은 마음 속에서 자기를 재발견하고, 자기의 삶을 구체화하는 방법이다. 성찰은 실제적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생각해 보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이 현상, 즉 나의 체험이고 머리로 보는 것은 그 현상의 뒤에 있는 뜻이라면, 마음으로 보는 것은 나의 솔직한 깨달음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삶(나와 세계의 관계)에서 깨달음을 가질 때 자기의 행복한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깨달음이란 나의 가장 솔직한 내면을 만나는 것이고, 구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참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삶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이해하며, 나아가 나를 깨닫는 것. 또한 동시에 세계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내가 살아야 할 세계를 마음에서 구성해 나가는 것. 그러므로 아름다운 글은 실제적 삶에 작용하여 내 삶을 반성하고, 내 삶을 성찰함으로써 세계와 더 아름답게 소통하는 그런 실제적 삶의 길을 찾는 것이다.


#이 글은 드림위즈 문학동호회 '글쓰기의 즐거움' 시샵인 조정래님의 글입니다. 조정래님은 현재 서경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법신 (3/13, 20:11) : 조정래님은 소설 '태백 산맥'의 조정래님이 아닌 서경대 교수 조정래님이시고 동명이인임을 밝힘니다. 본 강좌는 4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 교수님의 동호회에 저도 가입된 상태이나 동호회 운영은 폐쇄 직전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료를 옮겨와서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교수님을 홍보하는 자리도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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