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조은글의 소설 강좌 2

소설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6. 11. 30. 13:08

본문

조은글의 소설 강좌 2 --- 작가의 경험과 문학적 체험 | 조정래

 

작가의 경험과 문학적 체험 | 조정래

흔히 좋은 소설을 창작하려면 경험이 많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는 소설은 혹은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일상에서 매일 겪는 경험이라는 것이 바로 문학 창작의 재료가 되는 체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경험이라는 단어와 체험이라는 단어를 잘 구별해서 용어로 삼지는 않지만, 소설의 창작 과정과 의미화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이 두 단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경험을 삶의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음이란 의미로 쓰고, 체험을 어떤 일을 겪음으로써 그 일과 관련된 자신의 인식을 자신 속에 새김의 뜻으로 사용한다. 즉 경험은 의도적으로 겪을 수도 있고 우연적으로 겪을 수도 있으며, 또 스치고 지나가는 일회성일 수도 있고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지각적으로 겪는 일을 가리킨다면, 체험은 경험의 내면화 과정 혹은 자기 마음이나 생각 속에 입력하는 단계를 거쳐서 주체 속에 새겨진 어떤 것을 가리킨다. 즉 경험을 통하여 주체 속에 새겨진 것이 체험이라고 보면 쉽겠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여름에 시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놀다가 몸에 쥐가 나거나 하여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물에 잠기는 일을 겪었다고 가정해 보자. 숨이 막히고 순간적으로 죽음에 직면하는 듯한 두려움을 우리는 겪는다. 이렇게 지각적으로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혹은 체험)을 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일을 필자는 체험이 아니라 경험이라 부르고자 한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어떤 일을 겪는 것과 그 겪음을 예술의 재료로 활용하는 과정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물에 빠져서 숨이 막히는 엄청난 위험을 경험하고 나면, 물은 두려운 것, 끔찍한 것, 혹은 물놀이는 위험한 것, 더 나아가 물과 관련한 모든 이미지는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것 등 물과 관련된 어떤 인식이 우리 속에 새겨지게 된다. 이런 새김을 극도로 보편화한 것을 우리는 원형이라 부르는데, 체험은 그런 원형도 포함할 수 있지만 보통은 개인적인 새김을 가리킨다. 물에 빠지는 사건을 경험한 그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가졌거나 더 깊은 사고 능력을 가졌다면, 그 과정을 마음속에 새겨 둔 결과도 개성적이고 독특한 남과 다른 어떤 특징을 지닐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경험을 여럿이 함께 겪는다 하더라도, 그 체험은 각자가 다르게 지니게 된다. 즉 체험은 보편적인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지만 종국에는 개인적이고 특수한 성질을 지니게 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다가 새벽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변을 산책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곧 그 흥취를 잊어버리는가 하면 그 일원이었던 어떤 시인은 물안개를 보면서 그 물안개가 주는 깊은 외로움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가 시 창작의 재료로 쓴다. 물안개와 외로움을 연계 지어 입력해 둘 수 있는 것은 그 시인의 개인적 경험이 발전하여 주관적으로 새겨두는 어떤 마음 작용의 결과이다. 이를 체험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체험을 문학 창작에 수용하는 일은 그 주관을 객관화시킬 때 가능해진다.

우리는 경험한 것을 재료로 삼아 문학을 창작한다. 소설에 국한하여 논의를 하더라도, 작가가 직접, 간접으로 경험한 일이 문학 창작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것이 다 문학의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재서 식으로 표현하자면, 가치 있는 경험이 문학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가치 있는이란 수식어는 참으로 모호하다. 우리의 경험에서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가치 없는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가치 있고 가치 없고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그 경험을 승화시켜 작가가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면 그때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경험이 체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겪는 주체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을, 얼마나 새길 수 있느냐에 따라 문학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체험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냥 새겼다가 잊어버리는 체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경험 자체가 문학의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주관화와 내면화의 정도에 따라 문학의 재료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 자체만으로 창작을 하려 하면 소재주의의 천박함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흔히 경험을 많이 해야 작품을 잘 쓸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뜻은 많은 일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경험에 부딪혔을 때 깊은 관찰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사용하는 용법으로 표현하자면, 경험이 아니라 체험이 있어야 의미 있는 창작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체험은 주체의 여러 요소가 상승 작용을 한 결과로 형성됨을 알 수 있다.

한 개인이 경험을 통하여 얻은 일을 체험으로 승화시키려면, 그 과정에는 그 개인의 존재적 조건과 사회적 여건 등이 서로 조합하고 합성하는 작용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내면적 특수성은 그 주체의 개인적 특수성에서 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삶의 과정도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체험은 그 일차적 경험이 어떠하든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으로 번지게 되고, 여기서 미학적 특수성으로 승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한 개인이 체험을 갖게 되는 과정은 다양하고 복잡하겠지만, 그 과정을 대체적으로 구분하여 보자면 다음과 같은 요소의 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욕망, 감정, 생각, 의지 등이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이다. 물을 마시지 못하여 죽음에 직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물은 곧 생명력이라고 새겨둘 것이다. 이때 물은 마시고 싶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 욕망이 물은 내게 필요한 것이라는 체험을 형성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물에 빠져서 두려움을 느낀 사람은 물은 곧 무서운 것이라는 체험을 새기게 되는데, 이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체험 만들기에 작용한다.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철학을 가진 철학자는 물을 통하여 생각을 얻고 그 생각이 체험으로 작용하여 자기 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의지가 체험으로 형성되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테면 사막에서 물이 부족하여 며칠 간 물을 마시지 않고 지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가정하자. 물은 곧 의지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물에 대한 의지는 삶의 길이라는 것이 새겨질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요소가 기본적인 체험의 구성 요소로 발전하고 더 세분해 들어가자면 아주 다양한 요소들이 거기에 작용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욕망이냐 감정이냐 혹은 생각이냐에 따라 체험의 차원은 달라지고 그에 따른 국면도 달라지므로 체험이 어떤 의미로 소설에서 재료로 쓰이느냐 하는 미학적 기능이나 주제론적 기능도 달라질 것이다.

1998년 7월 31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