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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의 문제점-이향아

아동문학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6. 11. 1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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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의 문제점- <우렁이 각시>와 <선녀와 나무꾼>의 비교
 

이향아               
         

  전래동화는 이름 그대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화이며, 어떤 개인이 의도적인 작의에 의해 창작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진 이야기이다.
 이 점에 대해서 원더 개그(Gag Wanda, 1893-1946)는 그녀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Gone is Gone, 1935)이라는 동화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오래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들려 준 얘기입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어렸을 때는 그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보헤미아의 어린 소년이었을 무렵, 그의 어머니가 들려 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얘기가 오래 오래된 얘기라는 것은 알겠지요.

 우리는 위의 인용문에서 '유구한 전래성'이라는 동화의 특성을 실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전승문학으로서의 동화는 문자 이전의 시대로부터 구전되다가 후에 문자로 정착한 것이므로 똑같은 얘기라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그 형태가 다르며, 구연하는 사람의 언변이나 그때그때의 신명과 흥, 심기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가감되고 변형될 수 있다.
 <신데렐라>나 <장화 신은 고양이>같은 대중적인 민담도 전래동화에 속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문학작품으로 창작된 동화인가 아니면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전래동화가 문학작품으로 정착한 것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민담은 예로부터 문학의 소재가 되어왔으며, 반대로 애초에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구비전승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대에 작자의 이름을 분명히 밝혀 창작동화로 발표한 작품 중에도 전래동화를 개작한 작품들이 더러 발견된다.
 전래동화는 실화나 전설처럼 그 이야기가 발생하게 된 동기라든지 단서가 될 만한 물적 증거는 갖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전래동화도 역시 아동을 위한 얘기이므로 경이로운 요소와 사건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은 창작동화와 다를 것이 없다. 전래동화는 유구한 시간 같은 언어 같은 풍습을 가지고, 같은 역사와 같은 기후를 살아오면서, 비슷한 사상으로 길들여진 인류 공동, 민족 공동 정서의 산물이다.
 한 나라의 전래동화가 특히 자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민족 공통의 정서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며, 민족마다 그 민족의 전래동화를 따로 갖는 것도 민족 전통과 민족 정서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童話'라는 문학 장르를 전래동화로만 국한한다면, 동화는 오늘날 문자로 정착된 그대로 오랜 후까지 보전되고 전수되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작가가 필요하지 않게 되고 기존의 민담만을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전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전래동화에 이어서 작가가 명시된 창작문학으로서의 동화가 등장하게 됨으로써 동화는 전래동화의 문화재적 의미 외에 예술성을 가진 작품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옛날 어느 곳에 한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총각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혼자서 외롭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밭을 갈던 총각은 혼잣말처럼 탄식했습니다.
 "이 밭을 갈아서 곡식을 거두면 누구와 먹고 사나?"
 그때 어디선가 예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랑 먹고 살지."
 깜짝 놀란 총각이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젊은이는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해 보았습니다.
 "이 밭을 갈아서 곡식을 거두면 누구와 먹고 사나?"
 "나랑 먹고 살지."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위에는 그런 대답을 할 만한 여인네는커녕 남자도 없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젊은이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똑같은 대답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대답이 들려 온 밭둑 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아도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우렁이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중략)
 너무도 엄청난 일에 넋을 잃을 뻔한 젊은이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다음 날 다시 숨어 있다가, 우렁이가 색시로 변했을 때 재빨리 달려가서 와락 껴안았습니다. 우렁이 색시는 깜짝 놀라며 애원했습니다.
 "제발 저를 놓아 주세요. 때가 될 때까지는 저를 못 본 척해야 해요."
 그러나 젊은이는 우렁이의 간청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색시를 놓치지 않겠어요."
 그리하여 그날부터 그 예쁜 우렁이 색시는 젊은이의 아내가 되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젊은이가 일하고 있는 밭에 점심을 날라다 주기 위해 색시와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냥을 나왔던 임금님 일행이 그 마을을 지나가다가 예쁜 우렁이 색시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임금님은 그 색시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색시를 궁궐로 데려가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색시가 애원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있는 몸이옵니다. 남편의 허락 없이는 임금님일지라고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님은 젊은이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여봐라, 나는 이 색시를 두고 그대와 내기를 하고자 한다. 이 산과 저 산의 나무를 누가 먼저 베는지 내기를 하되, 만일 네가 이기면 나라의 반을 줄 것이며, 만일 내가 이기면 이 색시를 데려 가기로 하겠노라."
 젊은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임금님에게는 많은 신하가 있으니 나무 베는 일이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젊은이는 혼자서 나무를 베어야 하니 내기는 하나마나 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기를 앞두고 젊은이가 근심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예쁜 우렁이 아내가 편지를 써서 가락지에 매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바닷물에 던지세요. 그러면 저의 아버지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오면 임금님과의 내기에서 이기실 수 있을 거예요."
 젊은이는 색시가 시킨 대로 바닷물에 가락지를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바닷물이 갈라지며 용궁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젊은이는 그 길을 따라가서 용왕님을 만났습니다. 용왕님은 젊은이를 반가이 맞아 주며 딸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사정을 알고난 용왕님은 젊은에게 조그만 표주박 하나를 주었습니다. 젊은이는 표주박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육지로 돌아왔습니다.(중략)
 그래서 이번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내기를 했습니다. 젊은이는 이번에도 우렁이 각시가 준 가락지를 가지고 용왕님에게 가서 조그만 나룻배 한 척을 얻어 왔습니다. 내기를 하는 날이 오니, 임금님은 그 나라에서 가장 빠르고 튼튼한 배 한 척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에 비하면 젊은이의 조그만 배는 그야말고 나뭇잎처럼 보였습니다.
 내기가 시작되자 그 작은 배는 임금님 배를 앞질러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닷가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기뻐했습니다. 젊은이의 조각배가 이미 목적지에 닿았을 때, 임금님의 배는 아직도 바다 한 가운데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어디선가 거대한 비구름이 몰려왔습니다. 순식간에 바다에는 무서운 폭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님의 배는 폭풍우와 산더미만한 파도 속에서 얼마 동안 나뭇잎처럼 흔들리더니 이윽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을 받아서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임금님 대신 그 젊은이를 임금님으로 모실 것을 결정했습니다.
 젊은이는 우렁이 색시의 도움을 받아서 훌륭하고 인정 있는 임금님이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민서출판사 간행, 한상남 엮음 한국전래동화 참고함-

 소재와 줄거리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전래동화의 형태는 대략 위의 <우렁이 각시>와 대동소이하다. 전래동화의 특성을 좀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하여 [우렁이 각시]의 내용을 분석해 보자.
 첫째, 서두가 고정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고 주인공에 대한 대략적 신분을 소개하였다. '옛날 어느 곳에 한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와 같은 동화의 시작은 전래동화 서두의 공통적 패턴으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라는 결말과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다. 또 '한 총각'이라는 주인공을 맨 앞에 내세워 앞으로 전개 될 이 동화의 스토리를 암시하고, 독자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부분의 동화가 '옛날'이라는 시간과 '어느 곳'이라는 공간을 제시한다. '옛날'이라는 시간은 다만 오래 전의 시간일 뿐, 특정한 시간은 아니며, '어느'라는 장소 역시 우리의 보편적 이해를 벗어난 특별한 장소가 아니다. 만일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를 지적하였다면 그것은 역사적 기록이나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우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총각이 밭에서 한탄하고 있을 때 우렁이가 그 한탄에 응수한 일이나 총각이 우렁이를 집으로 대려온 행위에는 필연성이 부족하다. 왜 우렁이가 밭에 있는가? 혼자서 살아가는 총각과 우렁이와는 이 사건의 이전에 어떤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해명되지 않았다.
 예컨데, 근면하고 정직한 총각에게 하늘이 내린 노동의 대가라거나, 선량하고 성실한 삶의 결과로 받게 된 축복이라는 암시가 본문에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독자가 행간의 의미까지 동원하여 그렇게 보려고 해도 그 동기가 약하다.
 그러나 우연적인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독자들은 동화를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문맥상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어도 대부분의 전래동화의 주인공이 그러듯이 <우렁이 각시>의 주인공 총각 역시 그러리라고 추측하고, 주인공이 받은 신의 가호 역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공통적인 도덕관과 가치관이기도 하다.
 <우렁이 각시>에서 그저 '한 총각'이었을 뿐 '마음씨 착한 총각'이라고 제시하지 않은 것은, 문자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옛날 어느 곳에 한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총각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혼자서 외롭게 살았습니다.'는 '옛날 어느 곳에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총각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혼자서 외롭게 살았지만 인정이 많고 정직하여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인근에 칭송이 자자했습니다.'라고 정정하여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정정은 총각이 장차 받게 되는 특혜를 정당화하고, 자연스럽고 무리 없는 결말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주인공의 소극성과 수동성을 들 수 있다. 주인공 총각은 우렁이 각시의 도움만 받았을 뿐,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공로나 업적은 아무 것도 없다. 총각은 임금님과 대결할 때마다 우렁이 각시의 지시에 따라 용왕님을 만나고 번번히 용왕이 시키는 대로 따름으로써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같은 점은 지나치게 의타적이고 무력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 동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지혜나 노력으로 이룬 일이 있는가? 그의 승리에는 과연 리얼리티가 뒷받침 되어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 동화를 감상할 때 독자들은 아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렁이 각시]에서 주인공 총각이 순전히 남의 도움(우렁이 각시와 용왕님의)으로 승리하는 내용은, 막강한 상대인 임금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농부의 신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접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총각의 수동성과 소극성, 안이한 의타심이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덕이라도 되는 양 시종 일관성 있는 중량을 유지한 점은 진지하게 검토해 볼 일이다.
 넷째, 모험이나 개척의 정신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작중인물은 적극적으로 나아가 발견하고 능동적으로 도전하여 극복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천명만을 기다린다. 이는 위에서 지적한 소극성과 수동성, 의타성과 연관되는 사항이다. 총각이 임금을 이긴 것은 용왕님의 도움이며 왕 위에 오른 것은 적수인 임금이 풍랑에 휩쓸려 죽었기 때문이다. 이는 총각의 뜻이라기 보다 하늘이라고 하는 절대력에 의한 것이다.
 다섯째, 논리에 맞지 않아 납득되지 않는다. 우렁이 색시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총각이 색시를 껴안자 색시는  "제발 저를 놓아 주세요 때가 될 때까지는 저를 못본 척하셔야 해요"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총각은 색시의 말을 듣지 않고 그날부터 우렁이 색시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렸다. 우리는 우렁이 색시가 강조한 '때가 될 때까지'라는 말이 암시하는 의미가 심상치 않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은 우렁이 색시가 내놓은 조건적 타부(tabu)라고 할 수 있다. 총각이 타부를 범했음에도 그 결과로 발생된 아무런 사건의 반전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동화 진행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가당착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비유컨데 자신이 제정한 법을 자신이 범하는 것과 같다. 엄연히 법을 범했음에도 우렁이 각시나 총각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으로 하여금 임금의 군사를 무난히 물리친 후 우렁이 각시를 아내로 맞게 하였고 후에는 임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였다. 사건을 이런 결말에 이르게 하려면 차라리 우렁이 색시가 '때가 될 때까지'라는 조건을 말하지 말았어야 한다.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라는 우렁이 각시의 말은 중요한 사건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동화는 처음부터 논리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해피앤드에만 급급했다. 또 우렁이 각시가 어쩌다가 용궁을 쫓겨나 우렁이 각시로 되었는지를 끝까지 밝히지 않았으며, 언제쯤 완전한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아 독자를 당혹하게 한다.
 여섯째, 자연의 순리에 따르려고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선량한 인간성을 선양하려는 의식을 나타내었다.
 대부분의 전래동화나 고대소설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듯이 <우렁이 각시>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둘째 항목에서도 언급했듯이 총각의 인간성이나 성격에 관해서는 전혀 명확한 제시가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선량하고 순직할 것이라고 독자들이 전후 스토리의 전개를 통하여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전래동화는 필연성의 부족, 비현실적이며 비과학적인 스토리의 진행, 권선징악이라는 강한 주제의 표출 등, 창작동화에 미치지 못하는 결함을 지적받기도 하지만 구성면에서 창작동화보다 우수한 작품도 없지 않다. 이는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오는 동안 공동의 취향에 맞게 수정을 거듭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옛적 어느 산골 마을에 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해서 판돈으로 홀어머니와 함께 근근히 살아가는 나무꾼은 집안이 가난하여 나이가 차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나무꾼이 산 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보세요, 나무꾼님! 저를 좀 살려 주세요. 지금 제 뒤에 사냥꾼이 쫓아오고 있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사슴이었습니다. 사슴은 숨을 할딱거리며 나무꾼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나무꾼은 사슴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어디가 좋을까? 옳지, 여기에 숨어 있거라."
 나무꾼은 자기가 해 놓은 나뭇단을 들추고 사슴을 숨게 했습니다. 조금 있으려니까 사슴의 말대로 사냥꾼이 물었습니다.
 "여보시요, 혹시 이쪽으로 사슴 한 마리가 오지 않았소?"
 "왔지요. 조금 전에 사슴 한 마리가 저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납디다."
 나무꾼은 시치미를 뚝 떼고 산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사냥꾼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쪽을 향해서 달려내려 갔습니다.
 사냥꾼이 멀리 사라진 뒤, 나무꾼은 나뭇단을 들추고 사슴을 나오게 했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좋을 게다."
 나뭇단 속에서 나온 사슴은 나무꾼에게 큰 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습니다.
 "나무꾼님, 목슴을 살려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혹시 소원이 있으시면 한 가지만 말씀해 보세요. 제가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드릴께요."
 나무꾼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반은 농담삼아 말했습니다.
 "내 소원은 그저 참한 색시를 만나서 장가를 가는 것이지, 집이 너무 가난하여 이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거든."
 사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생각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그러면 장가를 드실 수가 있습니다."(중략)
 얼마 후,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하나씩 나와서 날개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린 선녀는 옷을 찾지 못하여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언니들, 어쩌면 좋아요? 내 옷이 왜 없어졌을까요?"
 "글쎄, 이상한 일이구나! 정말 어쩌면 좋지!"
 선녀들은 한참 동안 함께 막내의 옷을 찾아보더니, 안됐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막내야, 시간이 다 되었어. 우리 먼저 올라갈 테니 옷을 찾아 입고 올라오렴."
 선녀들은 하나씩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섯 선녀가 올라가고 난 뒤 잠시 있으려니까, 무지개 다리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혼자서 연못가에 남게 된 어린 선녀는 옷도 입지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위 뒤에 있던 나무꾼이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선녀님! 날개옷을 잃어버리셨군요. 나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제가 잘 돌봐 드릴께요. 산 밑에 내려가면 우리 집이 있으니 함께 가십시다. 그리고 앞으로 내 색시가 되어 주세요."
 이렇게 해서 나무꾼은 준비해 간 헌 옷을 선녀에게 입혀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선녀는 그날부터 나무꾼의 아내가 되어서 다정하게 살았습니다.(중략)
 나무꾼은 아기 넷을 날 때까지 날개옷을 내주어선 안 된다고 했던 사슴의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더 이상 두고 보기에는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춰 두었던 날래옷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 내 날개옷!"
 날개옷을 받은 선녀는 서둘러 그것을 몸에 걸쳤습니다. 나무꾼은 한 번 입어 보려는 것이겠지 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옷을 다 입은 선녀는 한 아이를 등에 업고 두 아이는 양 팔에 하나씩 끼더니, 그만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 여보! 안돼요. 가지 말아요!"
 나무꾼은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 사라진 선녀와 아이들은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그날부터 나무꾼은 살아갈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무를 하다가도 어여쁜 선녀와 귀여운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보고 싶은 한숨만 나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산에 올라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은 하늘 나라로 사라진 선녀와 아이들이 생각나서, 그만 도끼를 집어 던지고 땅에 주저앉아서 마구 흐느껴 울었습니다. 나무꾼이 아무리 보고싶어 해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무꾼이 땅을 치며 흐느껴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돌아보니, 그것은 옛날예 나무꾼이 살려 준 사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에게 선녀를 만날 수 있게 해 준 바로 그 사슴이지요.
 사슴은 울고 있는 나무꾼을 보며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슬픈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것 보세요. 선녀가 아이를 넷 낳기 전에는 절대로 날개옷을 주어선 안된다는 제 말을 잊으셨나요?"
 "잊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아이를 셋이나 낳으면서 다정하게 살아왔기에 설마 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아이들까지 모두 데려가고 말았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잊어버리려고 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고 날이 갈수록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나는 이제 미칠 것만 같단다."
 나무꾼은 울면서 사슴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선녀와 아이들을 꼭 만나야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해요."(중략)
 나무꾼은 보름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옛날 그 연못으로 갔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과연 하늘로부터 금줄에 달린 커다란 두레박 하나가 스르르 내려왔습니다. 젊은이는 사슴이 시킨 대로 그 두레박에 재빨리 올라탔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늘에서는 두레박을 슬슬 끌어올렸습니다.
 얼마 후, 나무꾼은 마침내 하늘 나라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졌던 선녀와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무꾼은 그날부터 하늘 나라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에게는 또 한 가지 새로운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땅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니가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중략)
 "오, 그런 용마가 있었구려. 정말 고맙소!"
 "하지만 이 말을 타기 전에 꼭 알아 둘 것이 있어요. 당신이 이 말을 타고 땅으로 내려가거든 절대로 말에서 내려서는 안돼요. 일단 말에서 내려 땅을 밟으면, 그 순간 당신은 이 말을 놓치게 되고 다시는 하늘 나라로 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만나시더라도 말에 탄 채 작별 인사를 드리도록 하세요."
 선녀는 말에서 내리지 말 것을 몇 번이나 일러 주었습니다. 선녀의 말을 명심한 뒤, 나무꾼은 용마를 타고 마침내 그리운 어머니의 집을 향해서  쏜살같이 내려왔습니다. 용마는 과연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꾼이 전에 살던 집 마당에 내려와 발을 멈추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말 울음 소리에 달려 나온 어머니는 용마를 타고 온 아들을 보고는 너무나 반가와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고, 내 아들아! 어디 갔다가 이제 온단 말이냐? 어서 내려오너라, 어디 한 번 안아 보자."
 어머니는 나무꾼의 소맷자락을 끌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지금 하늘 나라에서 잘 살고 있어요. 어머니께 작별 인사를 못드려서 이렇게 찾아 뵈었지만, 이 말에서 내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곧 하늘 나라로 돌아가야 해요. 어머니,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시고,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나무꾼은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얘야,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너무나 섭섭하구나. 마침 네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쑤어 놓았으니 그것이나 한 그릇 먹고 가거라."
 어머니는 서둘러서 김이 펄펄 나는 호박죽을 한 그릇 내왔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정성을 물리칠 수 없어, 나무꾼은 용마의 고삐를 놓고 죽 그릇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죽그릇이 너무나 뜨거워서 말 잔등에 죽을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깜짝 놀란 용마가 큰 소리로 울면서 펄쩍 뛰어오르는 바람에 나무꾼은 그만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무꾼이 땅으로 떨어지자, 용마는 눈깜짝할 사이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나무꾼은 용마가 사라진 하늘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으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된 나무꾼은 날마다 선녀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짓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어 얼마 못 가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나무꾼의 넋은 수탉이 되었고, 그때부터 수탉은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오늘날 수탉이 울타리며 나뭇 가지며 지붕 위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것은, 선녀와 아이들이 있는 하늘 나라에 좀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나무꾼의 넋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한상남 엮음, [한국전래 동화](민서출판사) 중 선녀와 나무꾼 -

  대부분의 전래동화가 그러듯이 이 동화 역시'옛날 옛적 어느 산골에'로 시작된다.
이는 서양의 전래동화가 'Long long ago'로 시작하는 것과 똑같다. 주인공의 이름도 없이, '한 나무꾼' 혹은 '한 총각'으로 부르는 것은 口演상의 복잡성으로 삭제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이해하기 위해서 같은 전래동화인 <우렁이 각시>와 비교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하겠다. 이는 물론 동화의 구연자가 누구인가, 그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소양이 어떤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동일한 출판사(민서출판사)의 동일한 편찬자(한상남)에 의해 엮어졌기 때문에 동일한 척도로의 측량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요컨데 <선녀와 나무꾼>은 <우렁이 각시>에 비해 훨씬 리얼리티가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나무꾼의 처지와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주인공은,
  ① 홀어머니를 모시고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나무꾼이며, 가난하여 나이가 차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처지에 있다.
  ②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준 것으로 볼 때, 인정이 많은 나무꾼임을 알 수 있으며 주인공의 이러한 성격은 도처에 일관성 있게 나타나 있다.
 둘째, 몇 가지의 秘訣과 동시에 禁忌를 설정하고 있다. 비결은 사건을 열어 주고 금기는 인물의 행위를 제한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뒤받침하면서 갈등과 해결을 만들고 사건을 전개하는 역할을 한다.
 셋째, 주인공이 금기 사항을 지키지 못함으로 사건을 극적으로 이끈다. 문학작품에서 설정된 금기 사항들은 모두 지켜지지 않는다. 만일 금기 사항이 지켜진다면 구태여 금기사항을 제시한 필요가 없을 것이며, 소설이나 동화에서 금기의 파기가 없다면 반전을 기대하가 어렵다.
 위 동화의 경우, 아이 넷을 낳기 전에는 날개옷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주인공은 날개옷을 선녀에게 주었으며, 그때문에 선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용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가더라도 절대로 용마에서 내려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나뭇군은 결국 용마로부터 내리게 되었으며, 그때문에 나무꾼은 영원히 하늘의 선녀와 아이들과 이별하게 되었다.
 이런 점은 비단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에서만 발견되는 특징은 아니다. 유럽 민담의 하나인 <신데렐라>에서도 신데렐라가 왕자님의 파티에서 돌아올 시간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된다는 금기 사항이 있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모든 스토리가 반전하게 된다. 희랍신화에서도 판도라가 열어서는 안된다고 한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온갖 재앙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결국 금기는 어기기 위해서 설치해 놓은 장치이다. 금기를 설정함으로 긴장을 유도하고 금기를 어김으로써 사건의 새로운 실마리를 열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넷째, 드물게 결말이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 동화에서 볼 수 있는 결말의 비극성은 천국의 질서나 계율을 인간 세계의 행. 불행보다 중시했다는 점에서 정서적 극복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하늘에서 내온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이 끝끝내 사실을 고백하지 않고 (감추워 두었던 선녀의 옷을 돌려 주지 않고) 스토리가 종결되었다면 어떨가. 그 후로도 나무꾼의 행복한 삶은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결말에 독자들은 만족할 수 있을까.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도 축복받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끝이 났을 때, 그러한 결말에 부수되어 나타날 도덕적 윤리적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독자들은 그러한 결말에 수긍하지 않을 것이고, 어떠한 감동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동화는 오히려 나무꾼의 비극적 종말로 승화된 미감을 창조한 예가 되겠다.
 나무꾼이 비록 비극적으로 생명을 종결하기는 하였지만 죽어서 수탉이 된다. 이러한 진행은 주인공의 생명을 사후의 세계로까지 확장하고 작품 자체의 비극성을 완화하게 되며, 동화가 종결된 후까지 상상의 세계를 연결하여 진한 여운을 남긴다. 수탉이 하늘을 보면서 우는 것을 하늘의 선녀를 사모하는 나무꾼의 모습으로 해석하여서 마치 증거물을 가지고 있는 전설을 읽는 것 같은 흥미를 느끼게 한다.
 다섯째,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며 끝내는 아내의 곁이 아닌 어머니의 곁에서 목숨을 마침으로써 '효(孝)'라고 하는 전통적 윤리관에 부합시킨 것도 공감을 얻는 데에 유리하다. 모성애와 호박죽의 연결, 선녀의 부탁대로 말에서 내려 오지는 않았으나 어머니가 떠 준 뜨거운 호박죽이 말등에 쏟아져 불가피하게 발을 땅에 딛게 된다는 상황묘사는 전래동화에서 흔히 외면하는 리얼리티에 접근하는 훌륭한 기법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 미루어 생각할 때, <선녀와 나무꾼>은 매우 우수한 구성을 보여 주는 전래동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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