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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시에 나타난 고정관념들

아동문학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6. 11. 1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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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나타난 고정관념들  

 

동시 창작에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사람은 예외에 속하겠지만, 아동문학 지망생
들 대부분은 童詩 創作 혹은 그 인식이나 감상법에 있어 어떤 고정관념을 갖고 있
습니다. 고질적이고 쉽게 고쳐지지 않는 잘못된 고정관념의 실체를 요약해 보면,

⊙ 동시란 단순하게 쓰여지며 그 만큼 쉬운 장르다.
⊙ 유치한 발상에서 시작한다.
⊙ 아주 예쁘게 꾸며놓으면 된다.
⊙ 어차피 성인의 회고담일 수밖에 없다.
⊙ 사회적 발달과 정신 연령의 향상으로 인해 동시 역시도 난해해져야 한다.

등 동시의 본질을 왜곡, 전도시키고 있는 갖가지 폐해를 말합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잘못된 문학 교육과 독서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는
데, 동시의 올바른 이해와 감상에 큰 장애가 될 뿐더러 동시를 창작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뛰어넘어야 할 벽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 벽과도 같은 고정관념을 이겨내기 위해 예문을 들어가며 설명하겠습니다.

여울의 아기 붕어
다 커서 어디론가
가고 없어도

고 또래 고 만큼
그 때 그 여울

골목의 아이들
다 커서 어디론가
가고 없어도

고 또래 그 만큼
그 때 그 골목

――――― 김동극, 『고 또래 고 만큼』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 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 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 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론가 걸어보고 싶다.
걸어보고 싶다.

――――― 이준관, 『길을 가다』

위 두 편은 동심의 세계를 시로 잘 형상화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이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대상을 골라
관찰을 섬세하게 했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 보이는 묘사가 적절했고,
또한 詩의 작자로부터 독자에 이르는 그 인식 전달이 명쾌합니다.

바로 이런 작품이 우리나라 현대 동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바, 앞서 열거한
고정관념들이 끼여들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습작품을 눈 여겨 살펴보기 바랍니다. 동시에서의 고정관념이 어떤
폐해를 남기는가?

엄마가 예쁘게 가꾼 잔디밭에서
해님이 하루 종일 뒹굴다
서산 너머 잠자러 가면

달님 달님 보름 달님
안녕하세요.
어서 어서 나에게로 찾아오세요.

――――― 습작품, 『보름 달님』

위 습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詩的 對象(소재인 보름달)에 대한 작자의 인식이 너
무 단순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해가 서산 너머 잠자러 갔으니
이번에는 달이 와야 할 것 아니냐는 발상이 그것입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온다는 식
은 분명 우주적 질서에 속하는데, '보름 달님, 어서 어서 나에게로 찾아오세요.'라는
힌트만을 가지고 굳이 작품화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단순함과 그 겉으로 금방 드러나는 꼴뿐만 아니라,
'엄마가 예쁘게 가꾼 잔디밭'이라느니 '해님이 하루 종일 뒹굴다'느니 하는 표현 역
시 단순한 인식에 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함이란, 그 누구든지 ―어린이를 포함해서― 다 알고 느끼고
기술할 수 있는 정도의 인식 수준을 말하는 바, 그 흔한 인식과 표현만을 가지고
구태여 작품화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역설적 판단을 말합니다.
자고로 문학은 상식 이상의 것입니다. 문학인은 보통 사람들의 인식 수준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물 즉, 사물에 대한 새롭고도 독창적인 관찰법을 보여주
어야 합니다. '서산 너머 잠자러 가고' '보름 달님, 어서 어서 나에게로 찾아오세요.'
식의 참으로 흔하고 상식적인 인식만으로 그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을까요.
동시란 그렇게 단순하게 쓰여지는 문학 장르가 아닙니다.

잔잔한 햇살의 눈과
맑은 이슬 샘으로
들꽃은 피어난다.

미움을 버린 기도로
눈꽃 같은 기도를 열고

――――― 습작품, 『들꽃』

위 습작품에서는 우선적으로 두 가지의 지적 사항이 드러납니다.
그 첫째는, 작자가 동심을 바라보는데 있어 '동심은 유치하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들꽃이라는 대상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둘째는,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눈
가림하기 위해 이렇다할 근거도 없이 철학적 묘사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위 습작품의 주 소재는 들꽃이고 그 들꽃의 개화 상태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 나타난 개화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차용 문제를 덮어두고라도 더 중요한 점은, 국화는 구체적 꽃
이름인데 비해 들꽃은 포괄적 대상물임을 위 작자는 간과했습니다. 들꽃이란 대체
몇 백 가지 꽃을 포괄하는 낱말이며 어느 계절에 어떤 꽃이 피어남을 표현하려고
했을까요? 창작에 있어서 그 현장성의 결여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위 작자는 들꽃이야말로 '잔잔한 햇살의 눈'과 '맑은 이슬 샘'으로 인해 피
어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 시상을 살펴보건대 그렇게 인식되기 위한
설득적 상황이 보이질 않습니다.
또한 동시란 예쁘고 고운 낱말들만 동원해서 이리저리 짜 맞추면 된다는 식의 참
으로 잘못된 인식 ―동시는 유치한 것이라는―을 금방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인 '맑은 이슬 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이슬'은 맑습니다. 그러나 그 이슬 자체의 맑은 이미지만으
로는 부족함을 느꼈는지, 위 작자는 뒤에다가 '샘'자를 붙였고 또 앞에다가 '맑은'자
를 붙이는 3중 기교를 부렸습니다.

맑은 + 이슬 + 샘

얼마나 더 맑아야 할까요? 이런 식은 이미지의 불신이고 시상의 낭비에 다름 아
닙니다. 오히려 겉치레로 느껴질 뿐더러 이런 기교주의가 동시를 타락시키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습작품은 시적 대상에 대한 집중적 관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선 지적
할 수 있는 것이 '햇살의 눈'입니다. '해(日)에게도 눈이 있다.'라는 표현은 비유법으
로 가능한 일입니다. 해는 얼굴처럼 생긴 일정한(둥근)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
입니다. 반면, '햇살에도 눈이 있다.'라는 식은 표현의 무리함을 넘어 햇살의 본질을
따져볼 때 불가해할 정도입니다. 더욱이 단순 명쾌하게 창작되어야 할 동시에서의
표현 아닌가요.
아울러,

⊙ 마음을 버린 기도
⊙ 눈꽃 같은 기도를 열고

이런 식의 철학적 용어를 동원한 표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대 동시에서 철학적 내용이 담긴 좋은 동시가 나와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러
나 분명한 것은, 철학적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과 철학적 기교를 구사했다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 글 첫 동시로 꼽은 김동극의 『고 또래 고 만큼』을 눈여겨보세요. 골목의 아
이들이 다 커서 어디론가 가고 없어도 그 골목에는 그 만큼의 새 아이들이 몰려와
놀고 있다는 시인의 인식이야말로, 보기에 따라서는, 인생사의 연속성 혹은 세대 교
체 등을 음미할 수 있는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꽃』에서는 어떤가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철학적 용어와
기교로만 채워진 채 이렇다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미지가 난해하고 추상적이라 시
야에 잡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버린 기도가 대체 어떤 그림일까요?
어려운 세상사를 쉬운 낱말로 진술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별 것 아닌 세상사를 어
려운 낱말을 동원해 독자를 헷갈리게 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동시란 유치한 언어로 유희하는 문학 장르가 아닙니다.

우리 집 작은 꽃밭
꽃들이 화알짝 피었어요.

한낮 불볕 더위 아랑곳없이
탐스러운 자태 뽐내며
백일홍이 화알짝 피었어요.
우리 아기 예쁜 고사리 손톱에
빠알갛게 물들이라고
봉숭아가 화알짝 피었어요.

――――― 습작품, 『꽃밭』

아동문학 지망생들에게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습작품 유형입니다. '꽃밭'이라는
가장 흔하고 구태의연한 소재를 택한 것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화알짝 피었어요.'라
는 서술어를 두 개의 연에 걸쳐 세 번씩이나 구사하는 태도가 우선 유치함을 드러
냅니다.
'어린이 혹은 아기는 꽃이며 그보다 더 예쁜 존재다.'라는 고정관념이 극명하게 나
타난 위 습작품에서 우리는 어떤 감흥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의 실제적 생활
과 사고 영역을 외면한 소위 천사주의가 작품 전체를 장식하고 있으며 표현 하나하
나 역시 너무 상투적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린이=꽃'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위 습
작품이 동시라는 형태로 나왔고 그러니 만큼 어린이 독자에게 동시로서의 합당한
미적 바탕과 그 감흥을 제시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꽃밭에 꽃이 핀다. 당연하다. 백일홍도 피고 아기 손톱에 물들이라고 봉숭아도
핀다. 그럴 수 있다.)
이런 식, 평범한 사람도 다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보여주
겠다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쁘고 귀엽고 곱고' 등등만 제시하면 동시가 되고
아동문학이 된다는 안일한 판단의 결과물에 다름 아닙니다.
동시는 예쁘게 꾸미기만 하면 되는 어설픈 문학 장르가 아닙니다.

순이네 초가 지붕에
달이 내려와
잠자는 식구들 숨소리 듣고 있다.

잠결 가득 꿈을 키워
박덩이처럼 키워
주렁주렁 순이네 꿈이 익는다.

――――― 습작품, 『박을 보며』

한 때 위와 같은 식의 습작품들이 우리 동시 문단에 범람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달관한 老詩人의 회고담이 시로 발표되고 동시로 발표되곤 했습니다.
문제는 그 작품성이나 노시인의 노작 운운이 아니라, 그런 식의 회고시를 과연 어
떻게 동시의 교육성에 수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불행했던 한 때는 당시 통치자의 국민 교육 인식의 왜곡으로 인해 세상에
대한 달관과 체념을 담은 작품들로 어린이 및 청소년들을 최면 시킨 적이 있습니
다. 각설하고.
동시는 어린이를 위한 시입니다. 동심 혹은 천진난만한 세상이 동시의 중심 세계
가 되어야 하고, 어린이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그 사고와 감성에서 얻어낸 결
과물이 詩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어른의 회고담이 끼어 들 틈이 없습니다.
동시란 성인이 쓴다지만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스스로 어린이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발을 달고 마음으로나마 정말 어린이가 되어 그들의 세계에 좀 더 나은 미
적 가치를 부여해 주는 일입니다.
위 습작품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순이네 초가 지붕에 달이 내려와' 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요즘 무슨 초가 지붕이 있나요? 더욱이 『박을 보며』라는 제목
부터가 고답적이고 퇴락된 소재를 택하고 있습니다.
옛시인의 작품이나 이미지를 차용한 것에 다름 아닌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제
기됩니다. 그렇다면 옛 소재를 회상하며 동시를 쓰면 절대 안 되는가? 그렇다는 뜻
이 아닙니다. 옛 소재를 동시의 대상으로 취할 수는 있으되 문제는, 새롭고도 독창
적인 관찰법과 그 결과가 참신하게 나타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울긋불긋한 서양식 집들 사이에서
저 초가집 한 채
산 마을 전설을 보듬고 있다.

박 하나 쯤 보여줄래?
흥부가 타던 박 어디 두었니?

이미 잡초에 가려 날파리만 날리는 집

서울 아이가 와서
몇 번 묻고 그냥 간다.

――――― 김문기, 『초가집』 중에서

이런 식이라 할까요. 좀 성인시 취향이긴 하지만 옛 시인의 모작이 아닌, 새롭고
도 독창적인 『초가집』에 대한 관찰과 그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실 요즘 들어 老詩人의 회고담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에 대해 반성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고 다행스럽게도 어린이를 주체적 대상으로 씌어진 동시들이 많아졌습니
다. 어린이가 성인들의 일개 대상물로 전락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동시란 성인들의 회고담이나 담아내는 그런 문학 장르가 아
닙니다.

냇물은 침묵 속으로 떠나갔고
목마른 땅
하늘 향해 소리 없는 아이들의 아우성

텃밭
옥수수 수염처럼 축 늘어진 엄마의 상념
힘써 가뭄을 캐시고

――――― 습작품, 『가뭄 때문에』

여기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위와 같은 습작품을 보세요. 혹시 위 습작품을 쓴 작
자가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세상이 난해해졌으니 동심 역시 난해할 것 아니냐
고. 요즘 어린이 정신 연령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고. 일단 그의 항변을 인정하기
로 하겠습니다. 세상은 난해해졌고 어린이 정신 연령도 그 전보다 무척 높아졌습니
다.
그러나 우리는 위 습작품을 보면서, 가뭄이 든 시골 마을의 흔한 풍경을 기술하는
데 있어 저토록 상투어와 관념어를 남발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부터 갖게 됩
니다. 상투어와 관념어의 남발로 인해 시의 흐름이 불분명해졌고 무엇을 말하려는
지 의도가 드러나지 않은 채 멋만 부린 꼴이 되었습니다. 난해하다는 지적은 바로
시적 흐름의 불분명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뭄이 들어 냇물조차 끊긴 상황을 두고 '침묵 속으로 떠나갔고'라는 표현을 써서
어린이 독자를 헷갈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목마른 땅'이라고 땅을 人性化시킨
뒤 '하늘 향해 소리 없는 아이들의 아우성'을 내지르는 식도 문제가 됩니다. 성인시
에나 있을 법한 기교니까요.
그럼 여기서 '옥수수 수염처럼 축 늘어진 엄마의 상념'이란 구절을 가지고 난해하
다는 뜻과 그 폐해를 풀이해 보겠습니다.

⊙ 엄마의 상념이 과연 어떠해야 옥수수 수염처럼 축 늘어진단 말인가?
⊙ '상념'이란 관념어가 과연 시어로서 적절한가?
⊙ 그 많은 농작물 중에 굳이 옥수수를 보조관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 이 구절이 꼭 필요한가? 없으면 안되나?
⊙ 이 구절과 그 뒤의 '힘써 가뭄을 캐시고' 와는 연관짓기 힘들지 않은가?

이상의 질문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만큼 시적 이미지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못하
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미지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기에 우리는 위 습작
품을 보며 난해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뒤로 이어진 '힘써 가뭄을 캐시고' 역시 난해한 표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관념어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힘써 가뭄을 캐시고'라는 상황이란 대체 어떤 모양
새며 어떤 그림인가요? 그것을 어떻게 어린이적 영상에 담아낸단 말인가요?
그러기에 동시는 난해함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동시의 표현 기법에서 흔히 노출되는 잘못된 고정관념들과 그 해결책을
개략적이나마 검토해 보았거니와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극복하는 노력이 가장 어
려운 관문이랄 수 있습니다. 너무 고질적이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처:http://www.haword.com/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연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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