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군집 / 이영진

해설이 있는 시

by 백연심 2008. 2. 24. 18:53

본문

군집 群集 / 이영진(1956~ )


누가 원한 일인가. 이렇게 많은 이름들이 한 필지의 땅
안에서 비슷한 기억들을 만들어가고 있다니. 주민등록등본
을 떼러 갈 때마다 동사무소를 둘러싼 아파트 속의 낯 모르
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베란다 앞 문짝까지 떼어내고 손님
을 치르는 비좁은 환갑 잔치와 TV 장식장 위에 영정을 모
셔놓고 차례를 지내는 제삿날이. 경조사의 기미가 느껴질
때마다 낯선 구경꾼이 되어버리는 내 어긋난 호기심을 위
해 간혹 떡접시가 건너오기도 하지만 서로의 잔치와 서로
의 슬픔이 개입할 길은 없다. 함께한 아무 기억도 없는 개
입이라니. 공유되지 못한 기억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
다. 아무 기억도 없이 우리는 너무 가까운 곳까지 도달해버
렸다.

[해설]
동일한 크기의 한 아파트 아래 똑같은 실내 구조, 거의 비슷
한 가구 배치를 한 채 거의 평균화 된 삶을 살고 있는 게 현
대인의 운명인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 더러 인사를 나
누거나 떡접시를 나누기도 하지만, 동일한 주소를 공유하고
살면서도 실은 철저한 타인들이다. 기쁨이나 슬픔이 각기 제
몫으로 남을 뿐인.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사이가 바로
이웃의 아파트 주민들이다. 자기만의 신성불가침한 자유 또
는 행복을 꿈꾸는 동안 어느새 고립되고 규격화된 삶의 시공
간에 내던져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시인 임동확

*광주일보 제 17043호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메모 :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