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이 성 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 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작품감상 -------------------------------------------------
‘홀로’ 와 ‘함께’의 삶
이 시는 생명의식과 민족의식, 그리고 민중의식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어
서 관심을 끕니다.‘벼’라고 하는 생명표상 또는 먹이상징을 통해서 눈물
과 땀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의 험난한 민족적 삶, 민중적 삶의 모습을 형상
화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시에서 ‘벼’는 생명과 먹이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한포기 한포기로서
의 벼가 개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개체로서의 단독자가 인간
세계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하나하나 따로 분리될 때는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것은 <깊이 익어 스스로
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길 때>,즉 공동체의식으로 연결되고 확대될
때 강한 생명력과 힘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
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과 같이 서로 결합되고 역동적으로 단합될 때, 비
로소 역사의 주체이자 기반으로서 민중적 생명력과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
이지요. 그러면서도 개체로서의 민중은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 가을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과 같이 선량하면서도 그 속에 슬기로움을 간직하
고 있는데서 이 시의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지성이 엿보이는 것이지요. 참
다운 개인의 발견과 그 소중함의 자각을 기초로 할 때 비로소 올바르고 강
한 민중의식, 바람직한 공동체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시에는 운명에 대한 사랑과 자기 희생정신을 통한 실천적 사
랑만이 인간을 권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제시되어 있는 듯 합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
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 이 넉넉한 힘.....> 이라는 구절 속에는 실천적
사랑의 소중함과 함께 인류에 대한 희생정신, 민중에의 신뢰의 정신이 담겨
져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시는 공동체의식과 개
인의식, 실천성과 예술성이 탄력 있는 조화를 획득함으로써 바람직한 민중
시의 한 모습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흔히 민중시라고 하면 소리 높
여 현실에 대한 울분과 저항을 토로하고 적개심을 강조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벼라는 민족적 삶, 민중적 삶의 상징
을 통해 삶의 어려움과 노동하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홀로’와 ‘함
께’의 조화 속에서 올바른 삶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깨달음을 날카로우면서
도 따뜻하게 보여 준 이 시야말로 바람직한 의미의 민중시가 아니고 그 무
엇이겠습니까?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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