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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입문 15 - 서사

수필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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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1907-1976)

수필문학입문 - 서사




서사, 설리說里, 서정, 사경寫景이 수필의 중요 내용이요 소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편의상 그 비중에 따라 설명하기 위한 것이요, 반드시 그렇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니, 비서정적인 사경이 없고, 서사나 설리도 서정을 떠나서 존립하지 않는 동시에, 서사가 아닌 설리나 서정도 없다. 다만 서정과 사경이 시적 표현을 소중히 여긴다면, 서사는 소설적 수법을 취하고 설리는 격언적 평론적 문장에 가깝다. 따라서 서사에 있어서는 가장 기교적으로 발달된 단편의 구성과 작법을 이해할 필요가 잇다. 우선 단편, 콩트掌篇, 수필의 차이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산막山幕

슈아렌바흐의 산막은 겜미산 나그네들의 피난소였다. 쟝 하우젤 일가는 1년에 6개월만 이곳에서 산막을 열고, 겨울이 되어 길이 눈에 막히게 되면 늙은 안내자 가스팔드 하리와 젊은 안내자 울릭흐 쿤지와 또 쌈이라는 산개를 남겨 두고 마을로 내려온다. 그 해도 겨울이 닥쳐와 길이 험하여졌으므로 주인집 식구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산허리까지 내려온 울릭흐는 주인집 딸의 귓전에 "산 사람들을 잊지 말아요"라고 속삭이고 작별했다. 까마득한 골짜기에 보이는 로엑크의 부락은 마치 심연 속에 뿌려 놓은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었다.

이튿날 아침 노인은 노변爐邊에서 담배를 피우고, 울릭흐는 어제 여자와 작별한 곳까지 와서 눈 위에 엎드려 산록의 마을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어느날 아침 사냥을 나간 노인이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울릭흐는 쌈을 데리고 노인을 찾으러 3주일 만에 산막을 나섰다. 그는 귀를 째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길게 노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죽은 듯한 침묵 속에 사라질 뿐이다. 그때에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침묵, 적막, 산들의 죽음 - 이 모든 것이 그를 덮쳐 혈액의 순환은 정지되고 사지가 빳빳하여지는 것 같아서 그는 부리나케 산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노인은 와 있지 않았다.

그는 쓰러져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어느 때인가 별안간 '울릭흐!'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그는 문 밖으로 뛰어나가 연달아 세 번이나 노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눈보라가 칠 뿐이었다. 그는 무서운 생각에 덜덜 떨며 들어와 아마도 노인이 죽으면서 지른 소리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 밤이 오자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이튿날 밤도 또 그 이튿날 밤도 그는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 모양으로 설치고, 개는 짓고 으르렁거리고 발톱으로 벽을 할퀴고 하였다. 기진하여 쓰러져 있던 울릭흐는 브랜디를 대여섯 잔 들었다. 몽롱하던 머리에도 용기는 회복되고 열병과 같은 작열灼熱이 그의 혈관을 달음질쳤다.

그는 오륙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술 취한 짐승 모양으로 지냈다. 그래도 노인의 생각만 하면 '울릭흐' 하고 부르는 소리가 마치 머리를 뚫고 나가는 총알같이 그를 깨웠다. 그는 또 브랜디를 물 마시듯했다.

어느날 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나 뼈가 저린 바람이 뺨을 갈길 뿐이었다. 당황하여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개가 나간 줄도 모르고 그대로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화독에 나무를 지피며 덜덜 떨고 있다가 별안간 후닥닥 뛰어올랐다. 밖에서 빠작빠작 벽을 갉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놈이야, 이놈아!" 하고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질렀으나 밖에서는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밖에서는 구슬픈 소리로 애원하면 안에서는 무서운 욕으로 대답하고, 이러헥 며칠을 지낸 뒤에 어느날 밤 괴상한 소리는 뚝 끊어지고 말았다. 그도 그만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잠이 깬 울릭흐는 배가 고파 밥을 먹었다. 겨울이 다 가고 눈이 녹기 시작하였으므로 하우젤 일가는 또다시 노새에 짐을 싣고 산으로 올랐다.

마중 나온 사람은 없고 산막에서 연기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기어 가까이 와 보니, 문득 옆에 독수리가 파먹고 남은 동물의 해골이 있었다. 그것이 쌈의 해골인 줄은 짐작할 수 있었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섰을 때 한편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광인이 누구인지 얼른 알아채지 못하였다. (모파상)



추격자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은 한길에서 골목길을 세 번이나 ㄱ자로 꺾어 접어 들어가 있엇다. 게다가 골목이 좁고 깊고 어두워서 밤이 늦어서 다니기에는 여간 불편한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요즘 서울과 같이 강도 절도 깡패들이 득실거리는 이 판에 밤마다 그것도 대개는 술까지 좀 취해서 이곳을 지나다녀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나는 아무리 술이 취했을 때라도 이 골목을 지나는 동안에는 정신이 바짝 긴장되곤 햇따. 더욱이 품안에 현금이라도 좀 낫게 가졌을 때엔 우정 동행이 될 만한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이라도 기다렸다가 같이 골목으로 들어서곤 했다.

이와 같이 불안과 불편이 극성한 골목이건만 나같이 좀체 집을 옮길 수도 술을 아니 마실 수도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어두운 골목이 그대로 운명같이 나에게서 떠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또 설상가상이라더니 그해 봄에는 그 골목 속의 한 집에서 아들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서모)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일까지 생기고 보니 그곳이 더욱 몬서리나게 싫고 무섭고 거북하기만 했다. 그 뒤부터는 한길에서 그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 때마다 두 눈을 꽉 감으며 혼자 속으로 될대로 되어라고 뇌이는 버릇까지 붙게 되었다. 그러한 어느날 바이었다. 그날 밤에도 술이 얼근했었고 품에는 현금이 한 이만 환 들어 있었다. 시간은 통행금지 준비 사이렌을 들은 지도 한참 지난 뒤였다.

품안에 현금을 지닌 나는 그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부지중 머리 끝이 쭈삣해짐을 느꼈다.

나는 두 눈을 꽉 감으며 혼자 속으로 될 대로 되라고 뇌까렸다. 그리고서 몇 발을 떼어 놓았을 때였다.

그때 나는 언젠가 권총 사건이 났다는 집 가까이 와 있었다. 갑작 내 뒤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쩌벅쩌벅 들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온 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이제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당장 내 등에는 단도가 날아와 꽂히든지 권총알이 날아와 박힐 것 같이만 느껴지며 양쪽 옆구리가 짜릿짜릿 조아드는 듯하였다.

그러는 중에서도 나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 어두운 골목을 얼른 빠져 나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에서보다는 지금까지 걷고 있던 행동에서 멈추어 선다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라고 무의식중에 헤아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곧 뒤의 놈에게 어떤 행동의 기틀을 끼치는 것이 된다고 역시 무의식중에서도 헤아려졌기 때문이었다.

걸음을 멈출 수도 없는 그때의 나로서는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더욱 생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걸음을 멈추는 것보다는 훨씬 더 대담하고 위험한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달릴 수도 없었다. 그냥 걷다가 달음박질을 시작한다는 것도 또한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직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처음엔 지금까지 걸어오던 바와 같은 그만한 속도와 자세로써 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걸음 걷는 동안에 나의 걸음걸이는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뒤에 오는 자의 발자취 소리도 꼭 그만치 빨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빨리 걸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두 번째 ㄱ자를 꺾어 접어들었을 때부터는 나의 힘과 재주가 허락하는 한껏까지 나는 빨리 그리고 멀리 발을 떼어 놓고 있었다. 그러면 뒤에 오는 자도 역시 그만치 빨리 발을 떼어 놓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것은 늘 그만치 가까운 거리에서 발자취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우리집 대문 앞에 닿았다. 나는 쓰러질 듯이 손으로 대문을 짚으며 목이 찢어지도록 높은 목소리로, "윤호야!" 큰 애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렇게 목이 찢어지도록 높은 목소리로 큰 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바로 내 뒤에서 나를 추격하던 자가 내 곁을 휙 지나쳤다. 그러나 그것은 여학교 제복을 입고 한쪽 손에 책가방을 든 열 예닐곱 살 나 뵈는 달발머리의 여학생이었다. 우리집 대문이 열리기 전에 아까의 그 소녀가 자기네 집 대문을 두르리며 자기네 아주머니를 부르든 새된 목소리가 이웃에서 들렸다. (김동리)



구두


구두 수선을 주었더니 뒷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막에 역했다. 더욱이 시멘트 보도步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소리다.

어느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 곁담을 끼고 걸어 나려오느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20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떠니 얼마쯤 가다가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고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웅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소리는 그거 자연이요 고의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써 공포에의 암신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항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이러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을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함참 석양 노을이 내려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 위에서 이 음향의 속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3보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①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②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③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휭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그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④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⑥ 살아가노라면 별한 데다가 신경을 써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계용묵)




[산막山幕]은 최재서崔載瑞 번역 모파상의 단편, [추격자]는 김동리金東里의 콩트, [구두]는 계용묵桂鎔默의 수필이다. 다 소설적 서술의 체를 얻었다. 그런데 [산막]에서는 밀폐된 세계, 고독의 공포를 위해서 끝까지 긴박한 수법으로 독자를 몰아넣고 있다. 그의 인생관이 뚜렷이 독자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추적자]는 [산막]에 뒤지지 않는 긴박감이 독자를 어필했지만 끝에 와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기경寄警한 전환으로 독자를 웃겨 버리고 만다. 이것이 단편과 콩트의 다른 특색이다. [구두]는 소설적 서술에서 오는 문맥이 일상 사소한 사건을 긴장미 있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추격자]와 같이 치밀한 계획적 설계에서 된 것도 최후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구상도 아닌 하나의 일상사의 발견이요 술회다. 이것이 또 수필이 단편이나 콩트와의 다른 점이다. 그러나 그 서사의 묘는 소설적 서술인 데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수필이 그 표현에 있어서 단편의 수법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내용에 있어서 수필의 문학적 사상이 얼마나 담겨 있느냐 하는 것이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수필의 끝은 ②가 삭제되고 ①이 ③의 끝으로 와서 ⑥으로 끝나야 했을 것이다. 남의 감정까지 써야 할 여유도 없고 '그 뒤'의 일까지 쓸 필요도 없다. 더욱이 ④⑤는 사족이다.





<수필문학입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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