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수필문학입문 13 - 명작 감상

수필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19

본문

윤오영



이번에는 명작 세 편을 감상하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가장 쉽고 짧은 명明, 청淸 서사소품敍事小品에서 특색이 두드러지게 다른 세 편을 추려 번역해서 예문으로 삼아 본다.


민노자閔老子의 차茶


주묵농周墨農이 내게 민영수閔泳水 집 차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무인년戊寅年 9월에 유도留都에 갔다가 강안江岸에 닿는 길로 도엽도挑葉渡로 민閔을 찾아갔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민은 출타했다가 늦게 돌아오고, 노파와 말을 주고 받으려는데, "아차, 지팡이를 놓고 왔다"면서 또 가 버린다. 나는 '오늘은 세상 없어도 거저는 안 간다' 하고 오래도록 기다렸다. 민이 돌아온 때는, 밤이 훨씬 들어서다.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저 손이 그저 아니 갔네, 손님은 무엇을 하시려는 거요?"
"내가 노인을 만나려 든 지를 오래 됐소. 오늘은 댁의 차를 마음껏 마시기 전에는 결코 떠나지 않겠소." 민은 반기면서 손수 차를 끓이는데, 금방 우르르 폭풍같이 끓는다. 한 방안으로 인도를 받아 들어갔다. 창은 환하고 상床은 고요한데, 형계산荊溪産 병甁이며, 성선成宣의 도기며, 십여 종의 도자기들이 다 절품絶品이었다. 등불 밑에서, 차빛은 그릇빛과 잘 구별할 수가 없으나, 향기가 훅 끼친다. "아!" "이것 어디 산이오?" "낭원 것입니다" 나는 다시 마셔 보며 "속이지 마시오, 제법制法은 낭원 제법이요. 그러나 맛이 낭원이 아니요." 민이 웃음을 가리면서 그럼 "어디 산이요?" 다시 마시며, "야! 나개산이 분명하구나." 민이 혀를 내두르며 "야!" 하고 감탄한다. "물은 어디 물이요?" "혜천惠泉 물이지요." "여보시오, 사람 또 속이지 마시오. 여기서 혜천이 천 리인데, 거기서 길어 온 물이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온단 말이요?" 민이 "이제는 더 못 속이겠소." "혜천 물을 길어 올 때는, 우물을 말끔히 쳐서, 새 샘이 고이기를 기다려, 증 밤중에 독에다 길어 붓소. 그리고 산의 돌을 독 밑에다 차복찹고 깔고, 배로 실어 올 때도, 순풍이 아니면, 오지 않소. 그러면 물맛이 결코 체삽하지 않소. 보통 때의 혜천 물도 못 따르는데, 딴 물하고야 말이나 되오?" 다시 혀를 내두르며, "야" 소리를 연방하더니, 곧 들어가서, 병을 하나 들고 나온다. 한 잔 가득 부어 주며, "이번에는 이것 한 번 들어 보시오." "야! 향기는 방열 하면서도 맛이 부드럽고 혼후渾厚하다. 이것은 봄에 따서 말린 것이 분명하다. 아까 것은 가을에 따서 말린 것이구나." 민은 크게 웃으며, "내 70평생에 이렇게 차에 정통한 분은 처음이오, 손님 같은 분은." 하고 드디어 친교를 맺었다.



만명晩明 작가 장대張垈의 글이다. 나의 서투른 번역으로도 그 솜씨를 엿볼 수 잇을 것이다. 그 깨끗하고 빈 구석 없이 흐르는 문맥, 간결하고 긴박하면서도 깨끗하고 다듬어 나가는 솜씨, 그 짧은 속에서도 기복과 농담이 잇다. 지팡이를 찾으로 가는 일구의 삽화도 묘하거니와 결미가 더욱 좋다.

일이 없으면 글이 없고, 사람이 없으면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을 읽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을 읽는 데 있다. 민과 장이 없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이런 글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장과 민의 아취雅趣를 흠모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은사隱士나 기인을 직접 만나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스스로 지란芝蘭의 향기가 배어 옴을 느끼지 않는가. 차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에 대한 승벽이 얼마나 강한가. 자기의 일품逸品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기쁨이 얼마나 큰가. 차에 대한 설명이 없이 솔직히 적어 나가는 속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가 있다. "드디어 친교를 맺었다"는 결구는 원문에 "수정교遂定交"라 했다. 이 석 자, 전편의 주옥 같은 구요, 만고지기의 기쁨과 눈물이다. 이 글이 어찌 차에만 한한 글이겠는가. 이것이 서사문의 가장 높은 경지다.

나더러 차에 대해서 쓰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해박한 지식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왜? 다경茶經도 있고, 다심문多心文도 있고, 다화집茶話集도 있고, 문인들의 다시송茶詩誦도 있고, 일본인의 다도茶道에 대한 책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학衒學이요, 췌사贅辭요, 야담野談일 뿐이다. 이 한 편의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내 아직 차의 참맛을 모르기 때문이요, 그런 아취雅趣에서 살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이 글의 귀한 까닭이 여기 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라면 귀할 것이 없다. 다만 우리는 이런 글을 읽음으로써 몇 부분이나마 고인의 아취에 접근해 보는 체험을 갖는 것이다.

장대張垈의 자는 도암陶菴, 호는 접암거사蝶菴居士, 명말明末 검주劍州 사람이다. 어떤 이가 장대는 소품문을 씌우기 위해서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어려서 뷔귀한 가정의 귀공자로 태어나서, 최고의 호강으로 자란 사람이다. 중국 최상류 귀족계급의 갖은 사치, 갖은 문화를 다 누리고, 또 기벽寄癖이 대단해서 명산대천은 물론 기이하다는 기이한 것은 다 보고 향락해 본 사람이다. 또 문재가 뛰어나서 6세 때부터 독서와 문필에 경인驚人의 신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 미만에 명나라가 망하자, 그 자신도 따라 망했다. 국파신망國破身亡이다. 그 후 거의 유랑하는 걸인의 신세로 70여 세를 살았다. 스스로 자기 만장輓章을 써 놓고 죽으려다가, 집필하던 것을 완성하려는 집념에서,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평생의 번화한 자취가 지나고 보니 모두 덧없고 오십 년 인생이 모두 한바탕 꿈일 뿐인데 공부를 일삼는 문인의 한점 명예를 향한 집착이 견고하기가 불가의 사리舍利와 같아 겁화劫火가 맹렬해도 불사를 수 없다"고 했으니 그의 문학에 대한 정렬이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방대한 저서도 불행히 소실되고 몇 권의 소품문만이 전한다. 그러한 기구한 일생이 그로 하여금 만명 소품의 대표적 작가의 지위를 차지하게 했던 것이다. 소품문의 이론을 들고 나와 기염을 토한 것은 원굉도袁宏道 일파였지만(그리고 그 이론은 중국 현대 수필문학에서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것을 작품으로 성과를 보여 준 이가 곧 장대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전파 정통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까닭에 극히 멸시당하고 배격을 받았었다. 중국 신문학 수립 후에 비로소 새로운 주목을 끌어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구기口技


서울에 구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큰 연희가 있었다. 한편 구석에 8척 병풍을 둘러치고 구기하는 사람이 그 안에 자리잡고 앉았는데, 그 안에는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무척撫尺하나 뿐이었었다. 손들이 쭉 둘러 앉고 조금 있다가, 딱 딱 무척이 한 번 울리자 좌중이 조용해지며 모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온다. 부인이 잠을 깨서 하품을 한다. 남자가 잠꼬대를 한다. 뒤따라 어린애가 깨서 운다, 남자도 깬다. 부인이 어린애를 토닥거려 준다. 어린애는 젖을 문 채로 운다. 부인은 더 크게 토닥토닥한다. 큰 아이가 또 깨서 칭얼댄다. 이때 부인이 어린애 토닥거리는 소리, 어린애가 입 속을 우는 소리, 젖 빠는 소리, 큰애 우는 소리, 남자 야단치는 소리가 한꺼번에 일제히 나는 것이 신기했다. 좌중이 모두 목을 길게 느리고 눈으로 지긋이 웃으면서 묘기를 절찬했다.

이윽고 남자가 코를 곤다. 부인의 토닥거리는 소리도 점점 느리고 미약해진다. 이번에는 쥐가 찍찍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항아리 같은 게 쓰러지는 소리가 난다. 부인이 자면서 쿨룩쿨룩한다. 긴장되었던 좌중도 차차 자리를 바로한다.

별안간 웬 사람이 불이야! 한다. 그러자 남자도 불이야 소릴 치고, 부인도 불이야 소릴 치고, 두 아이가 한꺼번에 으아 울어대고, 잇따라 수천 수백 명의 불이야 외치는 소리, 수천 수백 아이들의 으아 우는 소리, 수천 수백 마리 개들의 멍멍 짖는 소리, 건물이 타서 쓰러지고 부서지는 소리, 발마에 불 붙는 소리, 탁하고 터지는 소리, 으직근 부서지는 소리. 거기에 또 와글와글 불 끄는 소리, 펌프로 물 뽑는 소리, 한 편에서 집을 헐어 내고, 끌어내는 소리, 있을 수 있는 소리 치고 없는 소리가 없다. 사람의 손이 백이 있고 손마다 손가락이 백이 있어도 안 될 일이고, 좌중이 모두 낯빛이 변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두 다리를 벌벌 떨며, 자리를 떠 먼저 내뺄 차비를 했다.

이때 홀연히 딱딱 무척이 한 번 울리자, 모든 소리가 뚝 그친다. 병풍을 열어 제치니, 사람 하나,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무척 하나뿐이었다.



청조의 문인 임사환林嗣環의 글이다. 이런 글은 원문의 '인유백수人有百手, 수유백지手有百指' 인유백구人有百口, 구유백설口有百舌' '일인一人, 일탁一卓, 일의一椅, 일선一扇, 일무척이이一撫尺而已' 의 시각적 효과가 음조와 어울려 일종 더 뚜렷한 이미지를 준다.

문장을 5단에 나누어, 1은 구기의 시작, 2에서 묘기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다가 3에서 물굽이가 수그러지며, 다음 물결을 준비하고, 4에서 격랑이 산악같이 일어 최고조에 달했다가 5에서 구기가 끝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문세인 것은 누구나 쉽게 알 것이다. 문세의 굴곡과 음조의 억양과 템포의 완급이 일점의 체삽滯澁이 없이 생동하며 구기의 묘를 서술해 나가는 솜씨도 알 것이요, 특히 문미에 와서 태풍이 한 번 지나간 뒤에 만뢰萬瀨가 구적俱寂한 한 정적의 여운이 길게 이어짐을 깨달은 것이다. 실은 위의 허다한 충절과 정황한 묘사가 다 이 한 마디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글의 묘처는, 구기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데 있지 않고 구기를 보며 느낀 자기으 주관적 율동의 기록인 점에 있다. 이것이 서사문의 또 하나의 은밀한 수법이다. 이 필자는 눈으로 구기를 보면서, 마음으로 [장자壯子] 제물론齊物論의 천뢰장을 읽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재자才子가 명산대천을 보면 복중腹中의 만권기서萬卷奇書가 나타나고, 기문을 읽으면 눈 앞에 명상대천이 나타난다. 꽃을 사랑하고 달을 보는 것은 실상 내 뱃속의 시를 읽는 것이다. 내 속의 시가 없으면 경도 허무하거니, 내 속에 이미 만권기서가 없이 어찌 만권기서를 읽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있으랴" 해싸. 이 글을 읽으면 필자의 흉금에 부딪치는 듯, 상쾌함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또 깊은 사색에 잠기게도 한다. 단순히 묘기를 묘사하려는 데 그쳤다면, 서두와 서미가 그렇지 아니했을 것이요, 아무리 과장이라 해도, 좌중이 이미 구기를 구경하고 있으면서 두 다리가 떨리고 내빼려고 했다는, 비사실적非寫實的인 말을 서슴지 않고 씌는 아니했을 것이다. [명청문감明淸文鑑]의 절세의 묘기가 "절세의 묘문을 얻어 비로소 길이 전했다"는 평어는 이 글을 심독深讀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글이 그의 추성시秋聲詩 자서自序의 일부라고 전해 오는 기록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나는 차라리 그 구기가 사실이 아니거나, 약간의 힌트를 구기에서 얻어 자기의 낭만을 그린 것일 편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구기자口技子의 성명을 기록하지 아니했다. 이럴 경우에 그의 감동적인 표현이 실이냐 허냐 하는 것은 억양과 템포에서 나타난다. 감동이란 고조된 비상적인 율동인 까닭이다. 심장의 고동과 맥박이 확대되어서 지면에 그래프로 나타나게 하는 기계가 있다. 그 그래프가 곧 문장에 나타나는 억양과 템포라고 생각하면 좋다. 이것이 독자에게 같은 감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임사환의 자는 철애鐵崖, 청淸 순치順治 때 진강晉江 사람이다. 오래 적거謫居 생활을 하다가 무림武林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저작은 분명치 않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작품도 전하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글 한 편이 명청문장明淸文章으 선집마다 빠지지 않고 반드시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널리 애독되었던 모양이다. 문장으로 보아서는 공안파公安派의 계류에 속할 것 같고, 호탕한 맛은 김성탄金聖嘆에 가까운 데가 있다.


기산시초期山詩草에 적음


기미년己未年 가을도 깊어서다. 왕미王微를 서호西湖에서 만났기로 서호 사람이거니 했다. 얼마 후 초중苕中으로 간다기에 또 초중 사람이거니 했다. 분단장은 아니해도 머리는 빗었기로 여사女師우리들과 같이, 늘 물가, 단풍 사이로 오가며 일 없이 지났기로 한가한 살마이구나 했다. 이치에 맞는 옳은 말을 잘 하기에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구나 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암자 같은 초막에서 살면서 세사에는 관심이 없다기에 도인인가 했다. 시초詩草 한 권을 들고 와서 보여주기에 그가 시인이었구나 했다. 시 속에는 항간의 글도 있고 귀인의 글도 있고 도인의 글도 있어서 아련하게 비취며, 멀었다 가까웠다 잡히지 않는 것이, 어쩌면 그 사람과 똑 같은고. 순봉천의 "부인婦人이란 재지才智로 논할 게 못되고 마땅히 색이 주라"고 한 말이 진실로 천속한 말이다. 이 시를 읽고도 색을 말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그를 모르고서 예사 부인이라 한다.



명나라 사람 담원춘譚元春의 글이다. 서사문의 이색적인 또 하나의 수법이다. 한 특수한 여성을 그리되 극히 범연한 듯이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실은 가장 정확하고 독특하게 다각도로 부각시키고 있다. 평범한 사이 같으면서도 실은 허교許交하는 지기의 한 사람이다. 이성異性으로서가 아닌 도교道交로서다. 문장에 굴곡이 없는 듯하면서 굴곡이 있고 담연한 듯하면서 심정深情이 깃들여 있다. 끝에 와서는 예사 부인이 아니건만 세상이 몰라 준다고 탄식까지 하고 있다. 이른바 곡정은필曲情隱筆의 수법이다. 그러나 실은 기미년 만추 이래의 자기들의 생활의 서시敍事다. 파라독스 아닌 파라독스가 이 글의 묘미다.

담원춘의 자는 우애友愛. 명말 경릉竟陵 사람이다. 종성鐘惺과 더불어 유심고초幽深孤梢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이론은 삼원三袁의 주창과 같으나 공안파의 참배 맛 같은 문장이 평이한 데 지나쳐 예술성의 격하를 초래했다고 하여 감람 맛 같은 문체로 특색을 삼았다. 번역문으로는 알기 어렵겟으나 원문은 문자의 선태과 조구造句에 특색이 뚜렷하다.

명청소품을 개관하면 청신한 것을 취한 나머지 함축미를 잃은 것이 원중랑袁中郞 일파의 글이요, 이미지에 치중한 나머지 유려한 맛을 잃은 것이 담원춘 일파의 글이요, 두 점을 다 살려서 조화시켜서 새로운 문자을 성취한 것이 장대張垈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체의 특색은 우리에게 별 관심거리가 못 된다. 왜냐하면 시대와 지역과 언어와 환경과 개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 문학의 전공자가 아닌 이상 그것을 따르거나 파고 들어갈 아무 필요도 없다. 이것은 영문학에서나 독문학에서나 불문학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 한 가지 공통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어느 것이나 그들의 생활 속에서 소재를 취했고 그들은 제각각 그들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결코 천속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필문학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또 문장에 있어서도 공통 수법이 있다. 처음서 끝까지 문맥이 일관되어 있다는 것, 문맥을 흐리게 하는 군소리가 일체 배제되어 잇는 삽입되는 마디마다 이미지가 청신하다는 것, 어느 것이나 서정적이면서 정서적 문구가 문장에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 문장의 기복에서 긴장미를, 농담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 결어結語가 항상 전편을 함축시키며 여운을 주고 있다는 것, 이것은 동서고금의 성공한 문장들의 공통점이다.

나는 50원짜리 담배 '신탄진'을 피워 왔다. 그런데 누가 150원짜리 '은하수' 한 보루를 선사해 왔기로 한 대 피워 봤더니, 신탄진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이왕 생긴 것인 깓락에 그것을 다 피울 때까지는 신탄진을 사지 아니했다. '은하수'가 다 떨어진 후에 다시 '신탄진'을 사서 피워 보니 맛이 나빠서 피기가 곤란해졌다. "신탄진 맛이 왜이러냐"고 했더니 아내가 "당신이 요새 고급 담배만 피워서 입이 높아졌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다. 격이 높은 문장도 처음 대하면, 우리들이 쓰는 글보다 별 것이 아닌 것같이 느껴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격조 높은 글을 많이 읽고 나면 비로소 저속한 글이 곧 구별된다. 여깃 진문장眞文章의 맛을 알고, 그 따라갈 수 없는 높은 경지를 경탄하게 된다 .그러기에 명문을 많이 읽고, 또 여러 본 읽어보지 않고 문장을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또 글을 모르고 글을 쓴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내가 처음부터 누누히 초심자에게 독서를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물론 세평에 맹종할 것은 아니다. 또 어느 정도 글을 써 본 사람이 아니면 남의 글을 안다는 것도 믿지 못 할 말이다. 그러므로 독서와 습작은 병행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사람더러 장대처럼 다향茶香 속에서, 임사환처럼 허무의 정적감靜적感에서, 담원춘 같이 은둔의 여사女士와 더불어 단풍 사이로 한유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수백여 년 전의 지나간 생활의 정황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에서 살기에는 너무나 다른 현실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자기의 생활 속에서 지정至情의 문자를 쓰는 데 있어서는 과거의 저명한 문장들의 수법이나, 일관되어 온 수필의 성격에서 취할 점이 있다는 것이요, 특히 문장의 두서를 모르고 시정잡담으로 만필을 자랑하는 속문이 수필의 특징가팅 생각되는 현실에서, 다른 것은 사상과 문사文辭요, 같은 것은 문학의 본질과 문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독자의 참고를 위하여 졸작 [양잠설養蠶說]을 한 편 부기해 둔다.


양잠설養蠶說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면기催眠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初蠶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면,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一齡 이령二齡 혹은 한 잠 두 잠 잤다고 한다. 오령五齡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때는 문학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때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 대로 빛난다. 이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자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더서 제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한 사색에 잠긴다. 최면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을 벗는다. 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벽에 몸부림친다. 이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대결하다 부서진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를 요사夭死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여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탈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 대로의 세곙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일등품 삼등품으로 후세의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새 사람의 일생을 육십을 일기고 한다면 이십대가 일령기요, 삼십대가 이령기요, 사십대가 삼령기요, 오십대가 사령기요, 육십대가 되면 이미 오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지속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은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며 지어 논 고치[境地]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으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십대-육십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원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나므이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까지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오령기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지,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수필문학입문> 中

 

 

절제 (11/06, 07:58) : 제시된 예문은 윤오영 옹이 명청조의 한문체를 우리말로 번역한 듯한데, '구기'에 '테이블'이라고 번역했더군요. 탁자가 맞습니다. 옛날 쭝국 수필을 번역하는데 '테이블'이 웬 말이냐~~ 양잠설은 특히, 문학도를 명심하세요!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