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수필문학입문 14 - 설리

수필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20

본문

윤오영

수필문학입문 - 설리




동양 수필에는 이승理勝한 글들이 많고 기개가 곁들여 방만한 정서가 횡일橫溢한 문장들을 볼 수 있다. 중국의 김성탄金聖嘆이나 우리 나라의 박지원의 문장이 다 그런 데가 있다. 서구의 문장은 사상적이거나 평론적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몽테뉴의 글이 전자의 효시라면 베이커늬 글이 후자에 가까울지 모른다. 근대의 노신魯迅의 수필이나 프루스트의 수필이 다 같이 설리적인 문장이면서 그 색향色香이 뚜렷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현대수필에서는 비교적 그 예문을 찾기가 힘든다. 이에 가까운 것으로 몇 편 들어 고찰의 대상으로 생각해 보자.


[센치멘탈론] 중 일절


센티멘탈리즘이 현대에 있어서 인기가 없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이상에 열거한 개념규정에 비추어 볼 때, 그 비난이 기필코 정당하다곤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가령 16,7세 소년 소녀의 순정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과 희생적 행위에 대한 감동과 고토故土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을 센티멘탈리즘이라 하여 비난한다는 것은 성실한 비평이 취할 바가 아니다. 독자에 요청되는 정서나 정조情操가 작품 안에 제시된 구체적 시츄에이션에 의해 충분히 통제되고 지도되어 있을 때엔, 그리고 또 그것이 실제의 질서에서 과히 어그러지지 않을 때엔 그 정서가 아무리 강렬하고 그 정조가 아무리 농밀濃密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센티멘탈하다 하여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것까지를 경멸하여 물리친다는 것은 일종의 지적知的 위축萎縮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 비겁이어서 문학의 생명을 부정함이나 다름없고 진지한 비평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최재서)


[청포도의 사상] 중 일절


서글픈 생각을 보둥켜안고 돌아오느라면 풀밭에 매인 산양이 애잔하게 우는 것이다. 제법 뿔을 세우고 세침하게 흰 수염을 드리우고 독판 점잖은 척은 하나 마음은 슬픈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나도 그 자리에 풀석 스러지고 싶다. 산양을 본받아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감상이 별안간 뼈속에 찾아드는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벌레 소리니 가을 벌레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줄달아 운다. 눈물 되나 짜내자는 심사일까? 나는 감상에 정신을 못 차리리만큼 어리지는 않으나 감상을 비웃을 수 있으리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울 것 없는 생활의 영원한 제목일 법하니까. 신비 없는 생활은 자살을 의미한다. 환상이 위대할수로 생활도 위대할 것이니, 그것이 없으면서 찹찹하게 살아가는 꼴이란 용감한 것이 아니요 추접고 측은한 것이다. (이효석)


위의 두 문장은 다 센티멘탈리즘을 긍정하는 글로 되어 있다. 동시에 센티멘탈리즘의 약점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전자는 객관적 논리에 치중하고, 후자는 주관적 설리에 치중하고 있다. 전자는 관념적이요 지적인 데 비하여 후자는 구체적이요 정적이다. 이것이 같은 설리에 있어서도 평론과 수필의 다른 점이다.



(가) 단지斷指한 처녀


들판이나 나무에 핀 꽃을 뚝 꺾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무슨 제법 야생 것을 더 귀해 한답시고 그런 게 아니라 대체가 성격이 비겁하게 생겨먹은 탓이다.

못 꺾는 측보다는 서슴지 않고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역시 - 매사에 잔인하다는 소리를 듣는 수는 있겠지만 - 영단이란 우수한 성격적 무기를 가진 게 아닌가. 한다.

끝엣누이 동무되는 색씨가 그 어머니 임종에 왼손 무명지를 끊었다. 과연 동양 도덕의 최고수준을 건드렸대서 무슨 상인지 돈 3원을 탔단다. 세월이 세월 같으면 번듯한 홍문紅門이 서야 할 계제階梯에 돈 3원이란 어떤 도량형법度量衡法으로 산출한 액수인지는 알 바가 없거니와, 그보다도 잠깐 이 단지한 색씨 자신이 되어 생각을 해보니 소름이 끼친다. 사뭇 식도食刀로 한 번 찍어 안 찍히는 것을 두 번 찍고 세 번 찍어 기어이 찍었다니 그 하늘이 놀랄 효성도 효성이지만, 이 끔찍한 잔인성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이렇게 해서 죽는 어머니를 살린다니 그것은 의학이 어떻게 설명해 줄지 도무지 신화 이상의 신화다. 원체 동양도덕으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상하는 것은 엄중히 취체한다고 과문寡聞이 들어 왔거늘 이 무시무시한 훼상毁傷을 왈曰, 중中에도 으뜸이라는 효도의 극치로 대접하는 역설적 이론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무슨 물질적인 문화에 그저 맹종하자는 게 아니라, 시대와 생활 시스템의 변천을 좇아서 거기 따르는 역시 새로운, 즉 이 시대와 이 생활에 준거되는 적확한 윤리적 척도가 생겨야 할 것이고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입법했어야 할 것이다.

단지 - 이 너무나 독한 도덕행위는 오늘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생활 시스템이나, 사상적 프로그램으로 재어 보아도 송구스러우나, 일종의 무지한 야만적 사실인 것을 부정키 어려운 외에 아무 취할 것이 없다.

그러자 수삼일 전에 이 색씨를 보았다. 어머니를 잃은 크낙한 슬픔이 만면에 형언할 수 없는 추색을 빚어내는 인상은 독하기는커녕 어디 한군데 험잡을 데조차 없는 가련한 온순, 하아디의 테스 같은 소녀였다. 기적으로 상처는 도지지도 않고 그냥 아물었으니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했다. 여하간 이 양이나 다름 없는 소녀가 제 손가락을 넓적한 식도로 덱걱 찍어내었거니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다만 가련한 무지와 가증한 전통이 이 색씨로 하여금 어머니를 잃고, 또 저는 종생終生의 불구자가 되게 한 이중의 비극을 남게 한 것이다. (이상의 글에서)


(나) 명성名聲


릴케가 로댕을 말한 것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로댕은 자기의 명성을 얻기 전에 고독하였다. 이윽고 그가 얻은 명성은 아마도 더욱 그를 고독케 하였다. 명성이라는 것은 결국 새로운 이름, 주위에 모여든 모든 오해의 총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명성이란 괴물의 정곡正鵠을 찌른 것 같다. 명성이란 대개의 경우 명성을 얻은 본인과 떨어진 곳에 있다. 진가를 인정받는 것과 인기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수가 없다. 세상을 떨치는 명성을 가진 사람이 쌀값을 갚지 못하여 싸전 주인에게 시달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빛나는 이름은 그의 생활을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합리적인 주택의 설계자로서, 명성이 높은 어느 건축가의 자택을 방문하고 기이한 느낌을 가졌던 일을 잊을 수 없다. 합리적인 주택의 설계자로서, 명성이 높은 어느 건축인 주택에 비해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어둡고 불편하고 전근대적이었다. 신을 고쳐 신어야 갈 수 있는 구식 변소가 수세水洗로 되어 있는 것이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의 명성과는 확실히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활 속에 있었다. 단순하던 나는 모순을 느끼기 전에 실망을 느꼈다. 명성이란 속성이 아니로 그것만으로 독립된 존재이며 그것대로의 성격을 갖는 모양이다. 명성은 그것을 얻은 사람에게 영광을 주기보다는 그 이름으로 하여 그 사람을 구속해 버린다. 조금이라도 명성이라는 것을 얻은 사람은 명성의 다과多寡에 따라 공간을 좁혀야 한다. 둘레가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고, 둘러쳐진 거울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의식해야 된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를 두는 것이고, 한없는 고독 속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명성을 가진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보지 않고, 명성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살마에게 있어 명성은 평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일상을 초월한 무엇이어야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식사 중에 어쩌다 밥풀을 흘릴 때는 흉이 되지 않아도, 명성을 가진 사람이 같은 실수를 하는 경우에는 흉까지는 안 갈지라도 화제가 되는 수가 많다. 명성이란 틀 안에 사람을 가두어 두고 생활을 좁히려는 것이다. 명성이란 따지고 들면, 실질을 상반하지 않는 허명에 불과하다.

옛날에 어느 이름 높은 고승을 어떤 권문세가의 청에 못 이겨 그 집에서 법사를 하게 되었는데, 약속한 시간보다 앞서 그는 우정, 떨어져 살이 드러나는 법의法衣를 걸치고 껍질만 벗긴 꾸부렁 생나무 지팡이를 짚고 그 집을 찾았다. 곳으을 맞는 준비로 안팎을 조심스럽게 청소하고 큰 법사에 알맞는 기구를 갖추고 기다릭 있던 가인家人들은 보시를 청하는 걸승乞僧을 버릇 없고 부정不淨하다고 노발대발하여 몽둥이질까지 하여 쫓았다.

얼마 후에 사인교四人橋에 올라탄 고승의 일행이 화려하게 당도한다. 황공하게 맞는 가인들 앞에서 그 고승은 금색이 찬란한 홍가사紅袈裟를 훌떡 벗어 내동댕이치며 외쳤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기다리구 있었던 건 이것뿐이란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권문세가의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도 실지로는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느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어느 유명한 작품에 접할 때, 대개의 경우 작품 그 자체에 갈채를 보내지 않고, 작품으 성공에 갈채를 보낸다. 이 경우 작품은 명성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유명한 상점의 상표가 붙은 것이라면 품品의 양부良否를 떠나 그것만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는다. 일류품이면 보기 전부터 벌써 감탄을 하는 사람은 생각한 것보다 많을 것이다. 명성이라는 허명을 싸고 이렇듯 오해는 자꾸만 쌓여가는 것이다. 명성을 얻는 사람은 스스로의 명성을 처리할 수 없다. 처리하려고 들 때 그는 비로소 명성이라는 것의 정체에 부딪친다. 그러면 알 수 없는 괴물이 자기 위에 덮여 있는 것을 깨닫고 어느 저주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예외를 빼놓고는 누구나가 이 허허한 명성에 급급하는 것 같다. (한무숙의 글에서)


(다) 도하淘河와 청장靑莊


세상에 가장 가련한 것은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것이요, 그 대신 가장 가증한 것은 놀고도 잘 먹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불평과 눈물의 반 이상이 여기에서 연유함이라 하여도 트림이 없을 것이다. "도하는 수고롭지만 늘상 굶주리고, 청장은 편안한 데로 언제나 배부르다淘河勞而常飢 靑莊逸而常飽" 라는 말이 있다. 도하라는 것은 일명一名으로 제호니 속명 '사다새'다. 이 새는 하루종일 고기를 엿보며 강물이 진흙 속으로 다니면서, 날개와 입부리를 더럽혀 가며 고기를 찾느라고 애를 쓴다. 그러나 꾀 많은 고기들은 도하의 그림자를 피하여 물가로 숨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청장靑莊은 항상 물가에 멀쑥하니 서서, 겉으로는 한가로운 척 아무것도 구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이나, 도하에게서 쫓겨 물가로 숨어 나오는 고기들을 아무런 수고도 없이 날름날름 배부르게 잡아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일찍이 도하와 청장을 세간이욕인世間利慾人에게 비겨 말해 온 것이다. 도하와 같이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 복 없는 자, 가련한 자가 동서고금에 어느 곳, 어느 때에 없었으며, 또 청장과 같이 와양 멀쑥한 자, 가면으로 제 속은 혼자 챙기는 자, 이렇듯 가증한 자도 없은 적이 없다. 이러한 비극이 계속되는 한, 세상은 면할 수 없는 고해苦海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원호도 없이 그날그날의 목숨을 이어가려고 먼지와 땀을 둘러쓰고 흘리는 거리의 인파, 그리고 산야의 기슭에서 허우적거리고 애쓰는 노동대중들, 그리고 농민대중들, 해가 진 뒤에 그들의 주머니에 무엇이 있나? 과연 그들의 배가 채워졌던가? 오늘도 의연히 애쓰고 못 먹는 가련한 도하는 그들이다. 애쓰는 이들에게 가야 할 복리福李를 따로 앉아 수고도 없이 받아먹고 있는 교활한 신사층 청장이 있음을 우리는 슬퍼하지 아니할 수 없다. 도하는 가증한 자요, 청장은 가련한 자다. (이은상의 글에서)


위에 든 예문들은 편의상 초략한 곳이 많아 반드시 원문대로 다 실은 것은 아니다(원문은 국제문화사에서 펴낸 한국수필문학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가)는 비판정신 내지 반항의식을 바탕으로 한 신랄한 풍자요, (나)는 사색의 차탄嗟歎을 곁들인 평론적인 수필이요, (다)는 종래 문장가들의 관용되던 수법에 의한 평론적인 문장이다.

(가)와 같은 문장에서 주의할 점은 비양거리는 말투로 시종하거나 이기죽거리는 사설로 엇먹는 문장을 쓴다는 것은 문장의 품위를 상할 뿐 외라, 정정情的 유로流露보다 교지巧智의 각색刻索이 방향芳香을 잃기가 쉽다. 좀더 저하되면 고십이나 속문을 면할 수 없다.

(나)와 같은 문장에서 주의할 점은, 위트와 유머가 결여되고 문장이 지나치게 수월하면 평범을 초래하기 쉽고, 좀더 저하되면 통속적인 강단수필이 되기 쉽다.

(다)와 같은 문장에서는 머리의 인용문의 질적 비중이 전문을 지배하면 설명이나 부연같이 되어 전문의 생동하는 맛을 잃고, 인용문의 해석이 지나치게 상세하면 현학적인 감을 주고, 후문後文이 산만하면 문맥이 집중력을 잃어 산미散迷하게 되기가 쉽다. (다)원문에서도 약간 그런 혐嫌이 없지도 않았따. 박지원의 풍자는 신랄하되 완곡한 서술과 유머가 있어 통창한 맛이 있고 노신魯迅의 풍자는 예리하고 침통하되 정열과 함축이 짙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설리에 낭만이 없으면 문장이 각색하고 기경奇警한 표현을 동반하지 아니하면 청신한 맛이 없고, 유머가 없으면 문장의 고갈枯渴을 면하기 어렵고, 정열이 없으면 진실감을 주기 어렵고, 묘사妙辭의 구사驅使가 아니면 독자에게 기쁨을 주기 어려우니, 문장이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수필문학입문> 中

 

 

절제 (10/14, 22:45) : 설리편은 수필문학입문의 10번째입니다. 저는 13번과 14번을 좋아합니다.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수필창작강의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문학입문 16 - 문맥  (0) 2007.04.01
수필문학입문 15 - 서사  (0) 2007.04.01
수필문학입문 13 - 명작 감상  (0) 2007.04.01
수필문학입문 12 - 독서  (0) 2007.04.01
수필문학입문 11 - 습작과 수련  (0) 2007.04.0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