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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심정으로 시인의 길을 걸은 애통의 시학 -정호승론 /손희락 [문학평론 감상]

문학 자료방

by 백연심 2006. 12. 10. 20:15

본문



예수의 심정으로 시인의 길을 걸은 애통의 시학 -정호승론


손희락 



들어가면서:


시인 정호승은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詩, 첨성대가 당선되었으며 1979년 [슬픔이 기쁨에게] “출판사 창작과 비평” 첫 시집을 출간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화자를 일컬어서 논자들은 사랑시인, 민중시인, 등으로 호칭하고 있지만 왜 그가 사랑시인이며 민중시인인가에 대하여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권의 시집 속에서 시인 정호승이 노래하고 있는 애틋한 곡조들은 암울한 시대의 구조적 모순과 빈곤의 대물림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애가[哀歌]를 시적 언어로 묘사하면서 부르고 있는데 그 곡조가 너무나 구슬프고 애잔하여 그의 시를 읽다가 보면 가슴이 뻐근해오는 통증을 느끼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감정적 체험에 이르게 한다.

물론 시인이 가장 슬프게 울 때, 절창의 시가 탄생하기도 하지만, 화자의 시적 퍼소나는 눈물을 닦아 주기 전에 먼저 독자들을 실컷 울려서 속이 후련하게 만든 후, 민중들의 의식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며 한 자루, 희망의 촛불을 밝힌다.

허무와 절망의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일어날 때는 소망과 행복의 빛 가운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위로를 얻게 하고 있다.

마치 억울하게 쓰러져 간 영혼을 위로하는 살풀이굿처럼 시적 운율의 춤을 덩실덩실 추며 깨달음의 흥을 돋우며 진리가운데로 예인하고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의 심층적 구조, 사랑이 주는 평안함과 예리하고 날카로운 관조적 성찰이 갖는 이중적 힘은 먼저 시를 쓰는 화자를 울게 하고 그 다음에는 민중의 가슴 속을 파고들어 민중을 울린다.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안고 통곡한 시력 [詩歷] 30년의 작은 보상으로 2006년 제9회 가톨릭 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 화자의 작품들은 민중의 사랑을 받았고 대중적인 명망과 함께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197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지만 시집 제목도 독특한 화자의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민음사]를 중심으로 해서 초기 시세계를 탐색, 화자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보고 그가 지향하고 있는 이상적 작품 세계의 종착점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1: 열악한 시대적 현실과 개인적 환경의 연관성  


시인의 시집 [서울의 예수]는 1982년에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 나타난 시인들 중에서는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군부 독재 시절, 정치적 어두움과 민중들의 고통을 시적인 종자로 삼아서 형상화 시키고 구체화 하는 양상을 띠었는데 특히 화자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멸시천대를 받는 음지에 속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시적인 예술로 대응, 승화 시키는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970년대는 새마을 운동을 모태로 하는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서 영, 호남, 충청 할 것 없이 전국에서 서울로, 서울로 젊은 남녀들이 집중하는 시대였고 중,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맨손으로 낡은 가방 하나 들고 서울로 올라 왔지만, 갈 곳이 없는 그들은 일터를 찾아서 버스 안내양이 되고 봉제 공장 재봉틀을 밟고, 길거리에서 냄새나는 구두를 닦으며 막노동을 하며 밤과 낮이 따로 없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비참한 현실을 오직 인내로 견디던 시대였기에 화자는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면서 비참한 삶의 현실들을 시적 소재로 삼아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노래하리라 비 오는 밤마다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우리들 서울의 전쟁과 평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꿈조차 지우는 밤이 와서

우리들 함께 자는 여관 잠이

밤비에 젖고


찬비 오는 여관 문의 창문 밖으로

또 다시 세월이 지나가도

사랑에는 사랑 꽃

이별에는 이별 꽃을 피우며


노래하리라 비 오는 밤마다

목마를 때 언제나 소금을 주고

배부를 때 언제나 빵을 주는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우리들 서울의 꿈과 눈물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전문 -


대조, 반복, 상징법이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을 살펴보면 그 당시 서울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청년들의 현실은 버스회사 기숙사 혹은 영세한 봉제공장들이 마련한 여관방 숙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얽혀 칼잠과 새우잠을 자야 했고, 반찬이라고는 단무지와 신 김치 조각 밖에 찾아 볼 수 없는 멀건 소금국에 퍼석한 밥 한 덩이 집어넣고서 배차 시간에 쫓겨 버스에 올라야 했던 생존의 빵을 위한 고단한 삶의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연에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꿈조차 지우는 밤이 와서/ 우리들 함께 자는/ 여관 잠이 / 밤비에 젖고 /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악취가 진동하는 비좁은 곳에서 씻지도 못하고 여관 잠을 잘 수 있는 직장을 구한 것조차 행복인지, 슬픔인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석할 수 없을 만큼 빵에 대한 문제 해결이 시급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4연에서는 역설의 묘사를 하고 있다. 노래하리라/ 비 오는 밤마다/ 목마를 때 소금을 주고/ 배부를 때 언제나 방을 주는/.........

왜 목마를 때 물을 주지 않고 소금을 주는가? 왜 배고플 때 빵을 주지 않고 배부를 때 주는가? 이것은 역설적 묘사이다. 다시 말해서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없고 배가 고파도 먹을 빵이 없다는 비참한 현실을 역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빵과 사랑, 꿈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인간들은 비에 젖어 있다, 슬픔에 젖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 정호승은 왜 그들에게 유난히도 관심이 많은 것일까?

1970년대 민중의 아픔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 시인들은 김명인, 고정희 등을 비롯해서 여러 시인들이 있었지만, 화자는 특히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슬퍼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경험한 현실 환경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발문을 쓴 대학동창 박해석 시인의 말에 의하면 대구에서 상경,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 유학을 와서 문예장학생으로 등록금 혜택은 받았지만 그 넓은 서울 땅에서 작은 몸뚱어리를 누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갈 곳이 없는 그들은 대학 강의실에서 깡 소주잔으로 우정을 맹세하고 문학적 낭만을 노래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교단 밑에 감추어 두었던 얇은 담요를 꺼내 덮고 추위에 떨며 새우잠을 자야했던 비참한 현실을 경험하였기에 화자는 자신의 현실을 떨치고 일어서면서 졸업 후, 미래는 배고픈 민중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고로 시인 정호승은 가난한 이들, 배우지 못하고 사회의 밑바닥에서 빵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화자가 등록금 조달에 신경을 쓰지 않고 부유한 환경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며 카페나 드나드는 화려한 문학을 하였더라면 그의 작품들은 성향을 달리하면서 배부른 자들을 위한 축제의 노래가 되어 민중의 가슴을 울리고 찢는 애통의 생명력을 지니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배고픈 민중들을 의식하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의 길을 걸어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며 시적 진리의 떡을 떼어서 정신적 배부름을 제공하는 묵시적, 신의를 지킨 고귀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격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2: 예수의 인간화 시인의 동일성


민중들이 고통 받는 암울한 시대에 시인 정호승은 현실반영과 비판을 담은 놀라운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상재한 시집 [서울의 예수] 에서 그는 앞으로 시인으로써 자신이 걸어갈 길을 예고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며 예수가 되는 것이다. 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가 된다는 말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구세주를 열망하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야로 초림 했다가 그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심정으로 미래에 닥쳐올 고난을 극복하며 흔들림 없이 자신의 목을 떼어 놓고 소신 있는 작품들을 쓰겠다는 각오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70, 80년대는 군부 독재에 의해서 시인이 시를 함부로 쓸 수가 없고 발표에도 조심을 해야 하는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대중가요에도 금지곡이 존재하고 있었던 시대이기만큼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대변하는 선동적인 문학작품을 쓴다는 것은 십자가와 같은 고난이 따르는 위험한 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

새벽의 사람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절벽 위에 길을 내어

길을 걸으면

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

사람의 바람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용서하는 들녘의 노을 끝

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워 하는

아름다움의 깊이


날마다 사랑의 바닷가를 거닐며

절망의 물고기를 잡아먹는 그는

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

홀로 켠 인간의 등불


-시인 예수 전문-

화자는 시인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있고 시인의 사명은 신의 거룩함과 인간에 대하여 휴머니즘, 사랑에까지 이른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예수께서 절망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시인이 희망적이고 소망적인 시를 써서 발표하는 것은 성질 면에서는 동일한 선상에 놓고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로 시인의 직임은 예수와 같이 민중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화자가 이렇게까지 시대적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심정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슬픔의 먹구름이 덮어서 고통의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2연에서 절벽 위에 길을 내어 /길을 걸으면 /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 사람의 바람/

절벽 위에 길을 내어서 길을 걷는 다는 시적인 묘사는 행복의 길이 사라진 상태에서 길을 찾아서 울고 있는 민중들의 절망의 모습, 그 극치를 그려내고 있는데

그들이 소망을 삼아 무거운 생존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백년사에 있어서 70, 80년대는 한국의 영적 신앙부흥기에 속한다. 수많은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고 예배당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찬송의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진 것은 인간들에게 소망의 탈출구가 종교밖에는 없었기 때문이고 교회는 기복신앙과 샤머니즘적인 설교로 그들을 맞아 피난처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창작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동 시대 시인들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시인의 길을 걸어갈 때, 예수의 심정을 지니고 걸어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한 편의 시를 창작하더라도 허공을 울리는 괭가리가 되지 말고 진정 민중들의 삶 속에서 절망을 뒤집어엎고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자는 것이다.

시인이 예수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먼저 깨달은 자의 원초적 거룩한 지향일 뿐, 도달할 수 없고 꿈꿀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임을 화자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인간화 시키고 인간화 시킨 예수를 당대의 모든 시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함으로써 시인이란 가장 순결한 양심의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할 존재임을 인식 시키고 있고 시대적 어두움을 걷어 내는 일에 십자가를 져야하는 시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평화 있으라

오늘도 쓸쓸한 봄풀을 바라보며

너희는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라

서울에는 진정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아직 없나니

빈들에 마른 풀 같은 너희는 이제

서울의 이름으로 봄밤을 흔들어 깨우라

목마른 자가 물 마시는 꿈을 꾸다가

새벽에 깨어나서 더욱 목말라하고

송장메뚜기 한 마리가

온 나라의 들풀을 갉아먹고 혼자 웃나니

사람들이 뜯어 먹을 풀 한포기 없는

서울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기다림이 있으라


-서울 복음1 부분-


“서울 복음1”의 내용을 보면 화자는 마치 메시야처럼 민중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있는

현대판 예수가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과연 시인 정호승은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영웅주의나 신비적 환상주의에 빠져 있는 것인가?

질책과 책망, 경고와 조소가 함께 어우러진 이 한 편의 시에서는 송장메뚜기 한 마리가 온 나라의 들풀을 갉아 먹고 혼자 웃는다고 했다.

이것은 독재정권, 위정자와 불의의 축재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뜯어 먹을 풀 한 포기 없는 서울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기다림이 있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목사나, 신부의 축도를 변형 시켜 희망적으로 들려오는 내용들 속에서 함축되어져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곧 봄이 오고 있다는 알리고 싶은 것이다. 이제 곧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풀을 만나게 될 것이니 희망의 줄을 놓지 말고 인내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서울 복음1”의 내용대로 정치적인 과도기를 거치면서 경제적인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고 시인 정호승의 시적인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한다. 길거리에서 코를 막고 눈물을 흘리던 최루탄 냄새가 사라지고 학생들의 데모가 없는 평화로운 시위문화가 형성되었고 사회는 안정을 찾았으며 봄풀들이 자라기를 기다리던 민중들이 풍족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서울의 예수]는 한 권의 시집이면서도 미래를 예언하는 복음서적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고로 시인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예수처럼 소망적이고 미래적인 구원을 예언하는 창작의 등불이어야 한다는 화자의 주장은 영웅주의에서 비롯된 자기도취의 환상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시인 정호승은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성공과 실패, 그늘과 햇빛 등으로 때로는 변주하는 것이 삶이지만, 민중이 당하는 고통이, 고통에서 절망으로 끝나지 않도록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어야한다는 시인의 엄숙한 사명을 자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로, 창작을 하는 시인이라면 적어도 예수의 심정을 지니고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불의에 대항해서는 지혜롭게 대항할 수 있는 문인정신, 작가정신을 소유하고 있어야한다는 의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죽음을 통과한 부활의 시편들


예수의 죽음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소망적인 열매로 나타나서 과거의 비참과 처절한 고통이 환희와 축복으로 일순간에 바뀐 사건이다.    

화자의 시편들이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고 상업적으로 성공, 쇄를 거듭하게 된 것은  역설의 시법과 반복법, 독특한 비유, 그리고 건성으로 울지 않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진실의 염분 농도가 높은 눈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직설하지 않고 핵심적인 진리는 사물을 동원하거나 비유를 들어서 상징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청지기의 비유 등이 이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신학적, 교리적인 논쟁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그 정확한 본질을 찾아서 접근하고 있는 수많은 신학자들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화자의 시를 감상해 보면 그만의 독특한 시법이 존재하고 있다.


창밖에 기대어 흰눈을 바라보며

얼마나 거짓말을 잘할 수 있었으면

시로써 거짓말을 다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통하여

거짓말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거짓말의 시를 읽고 겨울밤에는

그 누가 홀로 울 수 있을까


밤이 내리고 눈이 내려도

단 한 번의 참화도 사랑도 없이

얼마나 속이는 일이 즐거웠으면

품팔이 하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생활은 시 보다 더 진실하고

시는 삶보다 더 진하다는데

밥이 될 수 없는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어떻게 살아 있기를 바라며

어떻게 한 사람의

희망이길 바랄 수 있을까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전문-


시적인 이미지를 묘사할 때는 단어의 중복 사용을 피하는 것이 기본인데 화자의

시법은 문학적 이론, 기존 지식을 뛰어 넘어서 창작의 지평을 열고 있다.

분문의 작품에서는 거짓말이란 시적 모티프가 6회 반복되고 있는데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채, 시를 쓰고 있는 문인들에 대하여 도전적인 반박이고 야유이며, 신랄한 비판으로도 비쳐 질 수 있는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화자는 시의 본질과 본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4연에서 생활은 시보다 진실하고/ 시는 삶보다 진하다는데/ 하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암울한 현실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선구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시를 써서 어둠을 밝히는 진리적 묘사를 하는 시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숫자는 매우 미미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시집, 제 1부 첫 장에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이 시를 수록한 것은 시집에 담겨 있는 후속 시편들에 대하여 자기 보증을 하고 있는 성격이 강하다.

나의 작품들은 배가 고파도 양심을 팔지 않았고 속이는 즐거움 때문에 품팔이를 하지 않은 진실이 숨쉬는 순결한 작품들이니 때가 묻지 않았다. 고로 감성의 눈을 크게 뜨고 사색, 탐독해서 힘을 얻고 소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래서 평자는 화자의 작품들을 죽음을 통과한 부활의 시편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시인 정호승은 예수처럼 죽었으며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언제 정호승이 죽었는가? 그는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쓰면서 날마다 죽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거나 고집과 교만, 명예를 쫒고 불의의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물질적 탐욕본능에 대하여 철저히 죽은 흔적이 보인다는 말이다.

고로 화자는 일평생, 민중들을 위하여 진실한 메시지를 담은 소망적 작품만을 쓰겠다는 스스로의 언약 속에서 시인의 좁은 길을 마치 예수처럼 걷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시는 누가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몇 번을 거듭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함축,

지성과 감성이 잘 변주되어 있는 시적 언어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시적 구성이 탄탄하다 못해 치밀하다고 할 것이며 핵심 주제를 찾는 노력 없이 건성으로 읽고 지나갈 수 없는 것이 특색이다. 그 이유는 화자의 작품들은 끊임없이 상상의 강을 따라 흘러가다 변화무쌍하게 폭포로 추락하는 큰 낙차를 보였다가 다시 평온하게 흐르는 것을 반복하고 있어 독자들의 가슴 속을 이리저리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서울에는 사람 낚는 어부가 없다

바다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서울에는 동백꽃이 피지 않는다

서울의 눈물 속에 바다가 보이고

서울의 술잔 속에 수평선이 기울어도

서울에는 갈매기가 날지 않는다

갯바람이 불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조차 두려워하며

누구나 바다가 되고 싶어 한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전문-


이 작품에서 보듯이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도입하면서 출발하고 있는데 시적 정황을 감싸고 있는 주제는 바다이다.

그 당시 서울의 현실을 이처럼 잘 표현하고 있는 화자의 시적인 기교는 가슴과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지성과 감성의 한계를 초월하면서 독보적인 형태로 구성 감탄을 하게 만들고 있다.

서울에는 사람 낚는 어부가 없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동백꽃이 피지 않는다./ 등은 현실 절망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절망을 거듭 환기시키기 위해서 갈매기도 날지 않는다. / 갯바람이 불지 않는다./ 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에 가서는 그렇지 않다. 않는다. 등에서 변환 누구나 바다가 되고 싶어 한다. /고 끝을 맺고 있다. 이것이 정호승시의 독특함이고 극한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아서 스스로 흘리던 눈물을 닦고 걸어 나오는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2횡에서 말하고 있는 서울에는 사람 낚는 어부가 없다는 표현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전도의 열기가 뜨거워 고속터미널, 서울 역, 할 것 없이 노방 전도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시대가 80년대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열열이 전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이 시에 도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로 시인 정호승의 시세계는 참으로 깊이가 있다. “서울의 예수”라는 작품에서처럼 한강이 아닌 시인의 시집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사색에 잠기면 시의 강물 속에서 대어를 건져서 희망과 성공의 길을 달려 갈 수 있는 교훈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다.

이런 절창의 작품들이 그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은 시인 정호승은 세상이 주는 모든 호화로운 것들에 대하여 죽고 오직 민중을 위해서 진리를 외치는 전도자로 예수의 심정을 지니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역동적으로 변모하면서 상처받은 민중들의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이며 소망적인 방법론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나가면서: 

 

시인 정호승은 1970년대 말부터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실비판적인 리얼리즘시를 쓰기 시작해서 1982년 [서울의 예수] 출간 후, 3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 흘렀다.

세상은 급변하여 대중 버스에서 안내양의 모습도 사라지고 밤새워 일하던 청계천의 노동자들도 이제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눈물 젖은 빵 한 조각 때문에 코피를 쏟지 않아도 되고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이 존재하고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한 단체들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공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 시인, 정호승의 작품세계는 어떻게 변하였으며 이제는 통곡과 애통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시를 쓰고 있을까?

1997년 5월에 출간된 화자의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7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을 내게 되었다. 그동안 시를 쓰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 후회스럽다.” 고 말하며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이 보여 진다. 그러나 평자의 눈에 비치는 시인의 모습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같아 보인다.

노동자들도 구걸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배고픈 절대 민중들도 임대 아파트에서 나마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는 왜 여태껏 애통하고 있는 것일까?


수녀들이 날마다 강간을 당한다

술취한 아버지를 아들이 칼로 찌르고 방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가 발가벗고 아들에게 체위를 가르친다

아침마다 지하철은 개미들을 가득 싣고 한강으로 빠지고

개들이 고무신을 신고 낙엽을 밟으며 청와대 앞길을 걷는다

아버지도 딸의 옷을 벗기고 달 밝은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

머리에 물을 들인 소녀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아이를 낳고 바람이 되어 사라진다

어디에도 인수봉은 보이지 않는다


-기적 부분 -


화자는 한강의 기적이 낳은 물질 만능주의 시대 디지털적 과학시술의 발전으로 건설한 세상에서 또 다른 고민을 끌어안고 울어야 할 것 같다. 70년대 빵 때문에 울어야했던 시대보다 더 큰 통곡과 애통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딸을 범하고 아들이 부모를 죽이고 매일 같이 수녀들이 끌려가 강간을 당하는 강력 범죄가 끝없이 일어나는 시대적인 변화, 현대인들의 광란적인 모습 때문에 그는 또 울어야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수녀가 강간을 당한다는 말은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가? 미성년자들의 성폭행 상황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평생을 예수의 심정으로 애통을 했고 통곡을 하면서 시를 썼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교류와 독재정권에 대항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면 예수 시인 정호승 에게는 민중의 아픔을 끌어안고 애통의 시학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 공로로 2006년 제 9회 가톨릭 문학상이 주어졌다.

한국문단에 각종 문학상이 남발, 시인의 순결한 정조를 빼앗고 대신 던져주는 더러운 화대처럼 사고파는 현실에서 그는 상 받기를 즐겨 하지 않은 것 같다.

요즈음 갓 등단한 시인들의 프로필에도 정체불명의 문학상 수상이 몇 개씩 포함되어 있다. 거의가 이름만 그럴듯한 것들을 돈으로 흥정하고 거래한 것들인데 비해서 그는 예수가 멸망의 성,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 울었듯이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는 공로로 하늘이 주는 상을 받았다.

고로 그가 받은 문학상도 귀하다고 할 것이며 애통하며 쓴 작품들 역시 대중적인 친화력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어 공감의 폭을 넓혀 놓은 성과와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평자는 이젠, 그만 애통하기를 부탁하고 싶다. 대신 진노의 목소리로 분노의 얼굴로 이 세상을 향해서 마지막 남은 생을 걸고 이 시대가 절실히 원하고 있는 시적인 언어를 토해주었으면 한다. 시인, 정호승의 시, 배고픈 시대에는 따끈따끈하게 구운 호떡처럼 민중들의 배고픔을 잊게 해 주었고 오늘 타락의 극치를 달리는 이 시대에는 기능을 상실한 병든 양심을 파고드는 채찍의 역할을 하고 있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시인이며 인간 예수로써 그의 문학적인 행보는 지속적인 사랑을 받을 것이다.


  





 출처: 카페 이름 : 시인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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