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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문학관] 한국문단의 현실과 신춘

문학 자료방

by 백연심 2006. 11. 2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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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관] 한국문단의 현실과 신춘       

                                        요수  이 재일

 

프랑스의 도발적 시인 "아서 랭보"가 상징주의 거장 폴.베를렌에게 "당신은 어떻게 詩를 쓰는지 알지만 나는 왜 쓰는지 안다"고 일갈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요컨대, 본질과 형식을 반사적으로 다룬 이 말에는 시를 쓰는 것은 형식, 즉 기술적인 어떤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곧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시나 글을 씀에 문장의 유려함이나 어법보다 내용과 사상이 튼실하고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풀이가 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작금의 문단 현실은 너무나 쉽게 문인들을 양산하고 있고 질적인 측면에서도 진정한 예술혼이나 문학관도 없이 글을 쓰는 문인들이 많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흔히 시인이나 작가를 일러 언어의 마법사니 연금술사라고 말하지만 문학은 미사려구로 독자들을 현혹하거나 기만하는 마법도 아니요 연금술처럼 언어를 기능적으로 다듬는 것 또한 아니다.글은 글을 쓴 사람의 혼이다.그래서 나는 내가 쓴 글을 거의 수정하지 않는다. 물론,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가다듬고 정리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그러다 보면 처음의 내 생각과 느낌외의 불순한 미화나 수사가 머리를 들기 때문에 본연의 순수한 문학과는 일정한 거리가 생기지 않을까를 우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문장을 다듬는 것보다 생각을 가다듬고 더 길고 깊이 하는 측이다.길을 걸으며 반짝 떠오른 시상을 놓치지 않고 핸펀 문자로 저장하거나 카페에 글을 올릴 때도 바로 글쓰기에 들어가는데 오,탈자 수정이 내 퇴고의 마지막 과정이다.그래서 글을 굉장히 빨리,그리고 거침없이 쓴다는 주변 문인들의 말을 자주 듣는데,이것은 글쓰는 이의 취향이요 습관일 뿐,장,단점은 별도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창작활동을 하면서 산고를 느낀다고 하는데 혼신을 다한다는 의미외에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모르는 소리일 지 모르지만 나는 글쓰기가 즐겁다.글쓰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하다.세사가 그러하듯 무엇이든 물흐르듯 자연스레 흘러야 무리가 없기 마련이다.

안나오는데 쥐어 짠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가.이럴 때는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여행을 떠나거나 창작에 도음이 되는 독서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자연스레 물흐르듯 하지 않는 과정에 자꾸만 손길이 가게되고 나중에는 억지로 끼워 맞춘 어색한 글이 되는 되는 것 아닌가.

또 하나, 혹자는 문학이 우선 읽혀지기 위해서는 흥미를 유발해야하고 그 다음으로 교훈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견, 일리 있는말이다.읽혀지지 않는 글은 문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그러나 나는 우선 문학이란 적어도 어떤 정신문화를 선도하고 바람직한 가치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흥미위주로 흘러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 대체로 찬동한다.

그러나,해독이 불가능한 시가 시일까?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시와 글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논리의 적용 이전에 우리는 우선 독자와 작자간의 간극을 좁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 하여 나는 오래 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신춘에 시선을 맞추어 나의 문학관을 피력하고자 한다.

 

신춘시가 한국시를 망치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좀 심한 소리지만 근거가 아주 없는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최근 4,5년 동안에 신춘에 뽑힌 시들을 보면 대개 비슷비슷해서, 포즈가 공연히 비장하고 내용이 모호하다.또 억지로 만든 자국이 역력하여, 이미지도 상징도 생경할 뿐더러 리듬감도 없어,살아 있는 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산문형태의 시가 많대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하긴 내재율 따위는 말할것도 없고 콤마나 피어리어드를 무시하는 등 어법을 어김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려는 유치한 시도도 신춘시에서 비롯된 대목이 없지 않다.
이런 시들을 선자들이 계속 뽑아 놓으니까 좋은 시의 전범처럼 되면서 , 신춘 응모시들이 이런 시 일색이 된다.나아가서 이것이 한국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지는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2003 세계일보 신춘시 심사평 유종호,신경림>>

이상은 몇 해 전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을 가감없이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사실,이 지구상에서 신춘문예라는 애매한 제도를 채택하는 몇 안되는 나라에, 글줄이나 꿰는 문인들은 차치하고 ,작품을 선정하는 심사위원조차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먹겠다는 ,이 신춘의 흐름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모르긴 해도 아마 권위주의의 극치나 치열한 경경체제에서, 튀어야 산다는 강박과 보상심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사회적 큰 이슈가 된 사법판결문이나 판례가 그 좋은 보기가 될것이다. <아니한 것을 아니한다 아니할 수 없지 아니하므로 >라는 식의 부정과 부정의 중첩으로,쉽게 전달할수 있는 논지를 의도적으로 난해하게 풀어냄으로써 억지가 되는 권위의 유치함이 그렇고, 정형,규격화된 입시나 각종 시험제도가 또한 그렇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시험이란 특목적성 때문에 떨어 뜨리려고만 하다보니 문제자체가 점점 모호해지고 수험생입장에서도 모호한 해답을 할 수 밖에 없다. 필요이상으로 시험의 수준이 높아지고 그 극점에 달하면 선문답식의 질문과 해답이 오가는 것이다. 굳이 예술의 쟝르에 이르기까지 이런 규격,정형화된 수험의 성격이 필요한것일까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하며 가슴벅찬 감동을 안을수 있는 고고한 흐름이 아쉽다. 아무나 쉽게 따라부르고 울고 웃을 수 있으면 대중가요 ,어렵고 난해한 것만이 정통 클래식 이라는 논리는 수긍하기 어렵다.
푸쉬킨의 詩처럼 ,소월과 만해의 노래처럼,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언제나 가까이에서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주옥같은 문학은 떠나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허공을 떠돈다. 전체적인 흐름이 이러하니 모두들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다가도 도리없이 우르르 큰 흐름쪽으로 몰려 간다 .
에라 모르겠다.나도 등단부터 하고 보자 하는 심리가 신춘심사평에서 지적한 바대로 개성도 예술혼도 없는,붕어빵 찍어내 듯 천편일률의 모양새가 되고 마는것이다.
등단을 하지 못하면 또 어떠랴. 입지나 활동공간은 협소하겠지만 민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향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예술이 심사라는 도구를 통해 규격.정형.획일화 된다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상품가치에 다름 아니다.
작자자신만의 개성과 영혼의 울림과 목소리로 예술혼을 불태우는 풍토와 큰흐름이 못내 아쉽다.

 

 

28단계(62점)아름다운 사람과 세계 >[공개]   주인(카페지기) 요 수

 
    놀러 와여~존말 할 때~^^*

     프로필:요수 이 재일

 

   59년 6월 25일 경북 영주 출생

   78년 산문(수필,소설)으로 문단에 나와

   84년 개인사정으로 절필,

   2004년 아버님 여의고 문학활동 재개(詩)

   2005년 제 26회 근로문화예술제 시부문 최고상

   "월간문학"추천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발명가협회 회원

   74,76년 전국학생백일장 가작,장원

   한국표준협회 기자역임

   지방신문 칼럼리스트

   오마이 뉴스 기자

 

     공동수상집 "매미"

     공저"향기나는 편지","나무들의 푸른 이야기"

     "봉화문학"속이 비어 있는 말 하나 "한국의 명시선 8집"

     개인저술:'발명과 특허""특허란 무엇인가.
                    "저작권과 공업소유권

 


출처 : 요수의 아름다운 사람과 세계
글쓴이 : 요수/이 재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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