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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 / 백석

시 창작 자료방

by 백연심 2006. 11. 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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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백석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두레방석-짚이나 부들 따위로 둥글게 엮은 방석.
* 물쿤-물큰. 냄새 따위가 한꺼번에 확 풍기는 모양.


[해설]
이 시는 단 두 줄의 간명한 소품이지만, 백석의 이미지 표현이 지닌 특징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 백석은 사물에 대한 인상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경우에도 다른 시인들과는 차별되는 독창적인 표현방법을 모색했음을 단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비'에 대한 감각적 묘사에 치중하고 있는 이 작품의 첫 행은 시각적인 묘사이다. 비가 내려 아카시아 꽃잎이 땅 위에 떨어져 있는 풍경을 '흰 두레방석'에 비유한다.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땅 위에 겹겹이 쌓이고 일정한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풍경에서 시인은 짚으로 촘촘히 엮어진 흰 두레방석을 연상한다.

두레방석은 우리의 전통생활에서 흔히 보는 일상의 사물이다. 넓은 두레방석 위에 곡식 같은 것을 말리기도 하고, 또 나무 그늘에 깔아놓고 그 위에 편안하게 쉬기도 한다.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 무수히 내려앉아 있는 아카시아 꽃잎의 군집을 나무 아래에 깔아놓은 흰 두레방석으로 그려놓은 이 선명한 이미지에는 우리의 전통생활의 정서가 물씬 묻어 있다.

그의 시각적 이미지는 이처럼 우리의 토속 사물에 빗대어서 묘사된 것들이 많다. "뚜물같이 흐린 날"(시 '쓸쓸한 길'), "구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시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살빛이 매감탕 같은"(시 '여우난골족') 등의 이미지 표현들이 모두 그러하다.

곡식을 씻어낸 물인 '뚜물(뜨물)'은 흐린 날씨의 탁한 시야와 우중충한 표정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구더기를 지칭하는 '구덕살이'는 누런 얼굴에 때가 잔뜩 낀 시골의 조무래기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느낌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고, 엿 같은 것을 고아낸 물을 지칭하는 '매감탕'은 누렇고 윤기 없는 시골사람들의 피부색을 적절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물에 대한 인상을 선명하게 그려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흰 두레방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토속적인 정취까지도 자아낸다. 그것은 뜨물이나 구더기나 매감탕 등 사물들이 모두 전통적인 생활 속에 뿌리 박혀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통생활 속에서도 먹고 배설하는 등의 기본적인 욕망 충족에 관계된 것들이어서, 생활 속의 정취가 절실하게 풍겨난다. 이미지 표현이 감각의 싱싱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체취와 기운까지도 자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백석 시가 지닌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두 번째 행에서 묘사된 이미지 표현도 이러한 맥락 위에 놓여 있다. 두 번째 행은 후각적인 묘사이다. 비 내리는 날의 느낌을 '개비린내'라는 후각 이미지로 묘사한다. 비 맞은 개에선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개들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시골의 황톳길에서 비 오는 날이면 비릿한 개비린내들이 풍겨난다. 그 냄새는 비 오는 날의 황토 냄새와 섞여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 비 오는 날씨의 고여 있는 대기 탓에 유난히 우리의 코를 자극하게 된다.

'어데서 물쿤'이라는 부사들은 비 오는 날 콧속으로 엄습하는 시골마을의 개비린내 나는 체취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비에 대해 묘사를 하면서도 선명한 감각의 재생에 치중하기보다는 비 내리는 마을의 대기의 정취를 드러낸다는 것이 바로 백석 시의 남다른 점이다.

그의 시의 이미지 표현은 회화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시각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들이 동시에 구사된다. 이 시에서도 시각적 이미지와 후각적 이미지가 함께 구사되고 있다.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 정도에 갇혀 있던 종래의 이미지 표현의 테두리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 백석 시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이다. 그 가운데서도 후각적인 이미지와 미각적인 이미지의 구사는 시사적으로 선구적인 것이다. 미당의 '화사'의 첫 구절에 나온 강려한 후각 이미지인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라는 시행 앞에는 시사적으로 백석 시의 후각적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백석은 이미지 표현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한편 이 시는 이시영의 시 '풍경' 속에 드리워져 있다. 백석의 '비'는 이시영의 '풍경'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된다. 백석 시에서 토속적 정취를 자아내는 역할을 했던 '흰 두레방석'과 '개비린내'는 이시영의 시에서 '샛노란 꽃방석'과 '아가씨 품에 안긴 개'로 변형되면서 도회지의 봄 풍경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꽃방석을 깔았다.
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의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

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

-이시영의 '풍경' 전문


고형준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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