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 우미정
쓰다듬어도 보고 두들겨도 본다. 빈속의 울림이 깊다. 급하게 떨어진 꼭지 부분만 누르스름하다. 나머지는 설 늙은 호박인양 푸른빛이 짙다. 원래가 그런 종자란다. 단호박이다.
둥글넓적한 모양새는 아무데나 퍼대고 앉은 것 마냥 펑퍼짐하지가 않고, 참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나그네는 그 맵시에 마음이 흔들려 보쌈 하듯 호박을 따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포도밭 가장자리를 따라 형님은 단호박을 심었다. 해마다 그렇듯이 올해도 어김없이 포도가 익을 즈음해서 비가 잦았다. 갈수록 포도 농사는 영 재미가 없다. 하기야 어디 포도뿐이랴. 농사를 짓는 것은 시름을 짓는 것이라며 언젠가 텔레비전 속에 들앉아 있던 농부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포도밭이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탓에 포도는 자주 사람 손을 탔다. 동병상련이랄까. 농부의 마음은 농부가 더 잘 보살피는 법인데, 그 마을엔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탓이기도 하다.
손을 타는 것은 호박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덩치가 넉넉하게 익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 딸 날을 받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것이 벌써 여남은 덩이나 된다. 우리 집으로 온 호박도 누군가 따서 안고 능청스런 걸음으로 마을로 들어서는 것을 마침 포도밭을 지나던 형님이 휘적휘적 따라가 찾아 온 것이다.
첫 날에는 미처 손이 갈 여유가 없어 호박이 앉을 자리를 대충 잡아 주었다. 사흘이 지나서야 곁에 앉아 곰곰 살펴본다. 배배 꼬여 비틀어 진 채 말라 가는 꼭지가 탯줄을 곱게 자르지 못한 것처럼 애처로운 모습이다. 저도 놀란 가슴이었는지 흙 묻은 꼴이 두서가 없다. 흙 속에서 구르다 온 아이를 사흘동안이나 그냥 재운 것 같은 마음이다. 마른 행주로 구석구석 훔쳐 준다. 그러자 방금 목욕하고 나온 아이처럼 푸른빛에 윤기가 돌면서 제법 때깔이 좋다. 어울릴만한 자리를 찾아 올려놓고 보니 그런 대로 집 안에 가을 운치마저 돈다. 그건 뜻밖의 풍성함이다.
호박은 어쩌자고 넝쿨째 굴러 오지 못하고 포도 상자 틈에 끼어 우리 집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꽃이 핀 자리에서 영글기 시작할 때부터 호박은 꿈도 키웠을 것이다. 허공을 향해 넝쿨 손 한번씩 휘저을 때마다 꿈도 여물어 갔겠지. 그러다 이 세상이 넓은 것 같아도 실은 좁다는 것을 눈치챘나 보다. 그래 씨앗일 때부터 정해진 모습대로 정직하게 자라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둥글어지지 못하고 옆으로 넓적하게 퍼져야 했겠지. 만남에는 항상 어떤 형태로든 흔적이 남는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돌과 만난 흔적으로 제 몸에 생채기도 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호박은 스스로 깨달은 것들을 저만의 효능으로 승화시키며 늙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잎에서부터 줄기, 씨까지 하나 버릴 것 없다는 호박의 효능이 탁월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호박은 세상과 만난 흔적을 군데군데 굳은살로 새겨두고 있었다.
이룬 것 없이 세월만 보낼 줄 알았지, 늙어 간다는 것에 아직은 낯설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아이는 자주 아빠 엄마가 늙어 가는 것이 슬프다는 말을 한다. 두 손에 가시와 막대는 아니 쥐더라도 흰머리는 보이는 대로 뽑아내고 긴 머리를 짧게 깎는 등, 늙어 간다는 것에 나름으로 기를 쓰고 거스르려해도 아이 눈에는 그저 벌거숭이 임금님으로만 보였던가 보다.
그런 내 귀에 늙는다는 것은 허투루 세월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낸 세월만큼 제 속을 긁어내는 것이라고 호박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속을 긁어 낸 자리에는 주름 가득 공허함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굽어 볼 줄 아는 혜안이 골마다 들어차는 일이다. 잘 늙은 호박일수록 속은 텅 비어 있다. 늙어 간다는 것의 의미를 호박은 이미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 찾아가는 친구네 집에는 호박 삶는 냄새가 진동했다. 마당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연탄 화덕에는 뚜껑의 손잡이 부분을 수건으로 칭칭 동여맨 가마솥이 김을 펄펄 올리고 있었다. 몸이 잘 붓는 아버지의 약으로 쓰기 위해 누런 호박을 뭉근한 불로 다스리는 중이라고 했다. 며칠사이 친구의 아버지는 부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호박 외에는 아무것도 드시지 못해 살이 빠져서인지, 호박의 효능으로 부기가 빠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늙은 호박이 약이라고 친구는 자랑처럼 말했었다. 늙음은 때로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도 하나 보다.
할머니가 계실 적에는 친정 집에도 늙은 호박이 많이 있었다. 할머니는 방 한 쪽 구석에 자리를 만들어 호박을 쌓아 두었다. 산후 조리를 위해 또는 부종을 다스리기 위해서 호박을 찾던 사람들은 할머니를 찾아오곤 했다. 할머니가 안 계신 지금은 집에서 늙은 호박 보기도 어려워졌다.
약으로 쓸 참으로라도 늙은 호박을 일부러 구해 본 적이 나는 아직 없다. 자잘한 병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 가정요법보다 약국에 더 익숙해진 탓도 있겠다. 그런 탓에 우리 집으로 온 녀석을 어찌 해 볼 궁리는 못하고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딸아이 엉덩이 토닥거리듯 한번씩 쓰다듬어 볼뿐이다.
호박을 가만 보고 있으려니 망령의 갈 길을 밝혀 준다는 호박등(燈)이 떠오르기도 한다. 주로 다른 나라의 어떤 축제 때 많이 볼 수 있는 등이다. 그 나라에서는 호박등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의 가정요법에서는 병을 쫓기도 하니 호박은 그 쓰임새가 국제적으로 다양하다고나 할까.
우리 집에 있는 녀석은 제 쓰임새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건 호박이 품었던 꿈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 호박은 얼마나 상심이 클까. 모른 척 했더라면 보쌈 되어 간 집에서는 제 몫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또 다른 쓰임새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나는 마음으로도 호박을 더듬어 본다. 호박은 짐짓 눈감고 가부좌를 튼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호박이 우리 집으로 온 이유를 어렴풋이 찾아 읽는다.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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