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글
가을에 생각나는 것들
성 기 조 (시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명예이사장)
매미울음소리가 한결 기가 꺾였다. 귀찮고 시끄럽게만 들리던 매미울음소리가 어느덧 힘을 잃고 멀리 달아나는 것 같다. 옛 사람들은 매미가 집을 갖지 않고 나뭇가지에서 사니 청렴하고 또한 한여름에만 울어주니 信義신의가 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런지 모르나 매미는 사람들과 친하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곤충이었다.
그런데 요즘의 매미는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간다. 귀찮은 존재가 되고 그 울음소리도 신비스럽지 않다. 매미의 다른 모습이다. 도시에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매미들이 가로수나 또는 공원의 나무, 심지어 집 뜰에 서있는 나무에까지 와서 울어대는 것은 시끄럽고 지겹기까지 하다.
가을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는 소리는 쓰름매미의 울음이다. 삼복더위가 가시고 햇볕이 강렬한 힘을 잃는가 싶으면 쓰름매미는 틀림없이 울고, 그 울음소리에 가을이 실려 온다. 그때쯤이면 8월이 끝나고 9월이 시작된다. 8월의 무더위와 장마가 꼬리를 감추고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신호가 된다.
하늘이 높아지고 파아란 빛깔이 선명한 사이로 흰 구름이 수없이 떠다니는 가을, 서늘한 감촉을 선사하는 삽상한 가을바람이 끈적끈적한 땀을 삽시간에 날린다. 시원하고 상쾌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가을이 되면 공기까지도 습도가 떨어진다. 폐 속으로 들여 마시는 공기가 뽀송뽀송한 감촉을 느끼게 된다. 찐득하고 습한 공기는 물러가고 물기가 빠진 쾌적한 공기가 氣道기도를 들락거린다. 목구멍이 한결 상쾌하다.
가을의 초입에서 느끼는 상쾌한 기분이다. 9월이 되면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사뭇 다르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서늘하게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분만 좋은 게 아니라 묵지근한 무게를 느끼던 머리까지 상큼하게 바뀌고 가슴에서는 둥둥 떠가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일년 중 가장 소중한 계절이다.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고생스럽게 가꾸던 농작물을 수확하게 된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계절이 가을이지만 가을처럼 넉넉하고 여유 있는 계절이 또 있던가, 봄은 꽃이 피고 열매 맺어 아름다운 계절이요, 여름은 열매가 자라고 익어 수확을 안겨 주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계절이다. 가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걷어 들이는 계절이다.
때문에 가을은 배부른 계절이요 넉넉함이 배인 절기이며 누구나 손잡고 등 두드리며 고루 나눠 먹는 풍요의 계절이다. 가을을 맞으면 넉넉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인심이 후하다. 저항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자상한 이해와 설득만 있게 된다. 메마르고 팍팍한 삶을 잠시 멈추고 축하와 덕담이 오가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때쯤이면 초가을 하늘에 해바라기가 활짝 핀다. 처서가 지나고 삽상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에 목을 길게 내민 해바라기가 건드리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은 파아란 하늘을 이고 탐스럽게 피어 있다.
그 노오란 색깔에 취해 본 사람들은 가을 햇볕의 신비를 알 것이다. 같은 햇볕이되 여름 햇볕에 비하여 따갑지 않다. 강렬한 따가움이 가시고 은근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팔뚝에 내려앉는 때이다. 초가을 햇살의 따사로움을 느끼게 된다.
햇볕조차 강렬한 기운을 잃고 누우런 빛깔로 사위어가는 계절, 가을은 모든 것을 成熟성숙 시키는 계절이다. 좀 있으면 햇과일이 선을 보이고 그 새콤달콤한 맛을 혀에 올려놓고 씹으며 우리들은 풍요한 성숙의 계절, 가을을 노래할 것이다.
또한 가을은 밤이 있어 더 아름답다. 촉촉이 내린 이슬방울이 영롱한 달빛에 젖어 풀잎 위를 사르르 굴러 갈 때, 들릴 것 같은 작은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려 보라.
넓고 넓은 풀밭에 쏟아진 달빛이 땅위에 흐드러지게 주저앉아 흙빛깔을 희부옇게 만든다. 검은 흙을 희부옇게 만드는 달빛의 조화를 느끼며 심호흡을 할 때, 한없이 커지는 마음과 우주를 삼킬 듯한 광활한 뜻을 가슴에 품고 가슴앓이를 한다. 먹고 사는 문제, 그 중에서도 곤두박질하는 人生事인생사가 스크린을 지나가는 필름과 같다고 생각 할 때의 허전한 마음은 참으로 주체하기 어렵다.
그것은 길고 긴 가을밤의 스산스런 고통이 된다. 이런 고통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풀벌레들은 풀섶에서 우는지 모른다. 풀벌레의 울음소리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한밤중에도 매미는 거세게 울고 있다. 가을밤의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의 나날이 스쳐간 뒤, 다가오는 겨울은 이 땅을 온통 깨끗하게 씻어내려 하는 듯 하이얀 눈을 내려 줄 것이다.
가을이 다가오는 8월의 마지막 절기를 넘기면서 여물지 못한 인생의 결실을 꿈꾸어 본다.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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