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 정병근
그는 눈치 채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기로 했다
의자에 앉을 때는 의자 무늬로 몸을 바꾸었고
벽에 기댈 때는 벽이 되었다
흥건한 얼룩이 되어 바닥에 누웠다
아무도 그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잊혀졌다 누에처럼
그의 몸은 점점 투명해졌다
얼마나 모르고 살았던가
잊혀지고 싶었던가
아, 그는 얼마나 사람이 아니고 싶었던가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다시 낙엽이 지는 동안
그는 골백번 의자가 되었다가
벽이 되었다가 바닥이 되었다
맑은 날은 빨래를 널어놓고
놀이터 담벼락의 벽화 속에 들어가 햇볕을 쬐는 그는
조금씩 흔들리면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몸 거두는 연습을 했다
바람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먼지 인간의 주목을 외우고 또 외웠다
노숙(路宿), 또는 노숙자를 다룬 시편은 근래 흔한 소재가 되어 버렸다. 시가 소재주의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만, 많이 보아온 소재는 아무래도 그 참신성이 떨어진다. 이미 많은 이야기들을 앞의 시인들이 해 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썼던 시인들의 시와 비슷한 내용이나 구절을 읽으면 상당히 따분해진다. 같은 소재를 취했을 때는 '발상이나 표현, 그리고 깨달음의 측면에서 앞의 시들보다 월등하거나 색달라야 할 것'이다.
앞서 시인들이 이미 많이 서왔던 소재로 시를 쓰는 시인들은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쓰려는 시와 같은 소재의 시를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 독서의 편협함을 들 수 있겠다. 둘째는 그 시들을 거의 다 읽어 보았지만 나는 다르거나 색다른 느낌을 받았고 그것을 시로 표현해 보려 한다는 것. 첫 번째의 경우는 좋은 시로 승화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고, (좋은 시를 많이 읽어보지 못하고 잘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의 시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색다른 발상과 표현으로 '노숙'을 다루고 있다. ‘아무도 그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노숙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무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의자가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하고 벽화 속으로 들어가 햇볕을 쬐기도 하는 그는 사회의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살아가다 죽는 노숙자이다. 자연스러운 이미지의 전개와 변환이 돋보이는 시다.
마지막 구절의 ‘ 그는 잊혀졌다 누에처럼/ 그의 몸은 점점 투명해졌다 ’는 표현은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신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 박 성 민 씀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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