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 문인수 (1945~ )
어느 아파트에 갔다가 그 노인을 보았습니다. 팔순도 넘었
다는 할아버지였는데, 두어 해 전부터 치매를 앓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가동과 나동 사이 아스팔트 마당을 골똘하
게 걷고 있었습니다.고개 숙이고 무릎 굽히고 뒷짐 지고 하염
없이 왕복 계속하였습니다.발끝에 힘을 주는 듯 잘근잘근 밟
아 나갔습니다 밟아나갔습니다 밟아나갔습니다. 아, 보리밟기
였습니다. 마침내 저 힘 센 보리가 무수히, 겨울 지난 보릿골
이 꿈틀꿈틀 일어나더니 꿈틀꿈틀 길게 이어졌습니다. 유월
참 좋은 바람,그런 풀비린내의 초록의 길을 고집불통의 한 사
내가 오래 가고 있었습니다.
[해설]
각 개인이 몸소 체득한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팔순이
넘은 농부 출신의 치매 걸린 노인이 아파트 숲 아스팔트 마당에서
보리밟기를 반복하여 시연하고 있는 것처럼 일단 학습된 경험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개인의 말과 동작을 결정한다.
곧 이는 일생 동안 '풀비린내 초록의 길'을 걸었던 자에게 도시적
삶의 방식이 도저히 제 몸에 맞지 않음을 뜻한다. 비록 고단하고
힘들었으나마 오랫동안 자신의 몸과 의기투합했던 인간화된 공간
속에 놓여 있을 때 그 누구든 행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 임동확
-광주일보.제17083호-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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