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눈동자 / 나희덕 (1966~ )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신다
아버지, 부르면
그제사 너 왔냐, 웃으신다
갑자기 식어버린,
열려 있지만 더 이상 피가 돌지 않는
저 눈동자 속에
어느 손이 진흙을 메워버렸나
괜찮다, 한 눈은 아직 성하니
세상을 반쯤만 보고 살라는 모양이다
조금씩 흙에 가까워지는 게지,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고요한 진흙 눈동자,
그 속에 앞산의 나무 몇 그루 들어와 있다
[해설]
어느새 한쪽 눈이 어두워 몇 걸음 안되는 거리에서조차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눈
길은 그리 편안치 않다. 그 짧은 순간을 통해 나는 미구
에 닥칠 아버지의 죽음을 읽어낸다.한쪽 눈이 성하지 않
은 아버지도 내가 그 사실을 감지한 것을 눈치 채고 되레
위로의 말을 건넨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슬픔을 함께 하면서 나누는
경지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폭력 앞에 망연자실 서서
나와 아버지가 잠시나마 화해를 청하는 순간이다.- 시인 임동확
*광주일보 17067호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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