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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가니니를 들으며 / 박몽구

해설이 있는 시

by 백연심 2008. 1. 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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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를 들으며 / 박몽구(1955~ )



어제까지 멀쩡하던 산이 무너지고, 여자의 혀처럼 부드
럽기만 하던 남대천 물이 이글거리는 불처럼 사람의 마
을을 삼켜버린 오후, 친구 김시일을 생각하며 파가니니
를 듣는다. 한밤중에 몰려든 빗물이 책을 빵처럼 부풀리
고 마지막 남은 라면 봉지를 흙으로 채워버린 방에서 듣
던 베니스의 사육제를 떠올린다. 제아무리 잘 간수하고
열쇠를 채워도 우리들의 곳간을 물의 혀가 남김없이 털
어가듯, 푸석거리고 만지면 금방이라도 재가 되고 말 것
같은 몸 다 버릴 때 무엇이 남는 걸까. 다 버리고 빈 몸
으로 앉아있는 시일에게 넘실거리던 속의 바다를 떠올리
며 파김치가 된 몬을 현 위에 싣는다.


[해설]
인생은 때로 음악을 통해 예술화되고, 또한 도덕화된다고
했던가. 19세기 최고 바이올리니스트 손꼽히는 파가니니의
열정적인 연주를 듣는 순간 멀쩡하던 산이 무너지고 홍수
가 몰려드는 듯한 몰아지경 속에서 가난한 예술가 친구의
삶은 더 이상 남루하지 않다. 한 밤에 몰려든 빗물에 책이
빵처럼 부풀어 오른 방안에서 듣던 베니스의 사육제는, 한
낱 음악 감상을 넘어 비루한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을 경
계를 허무는 무한이 힘이 된다.
어느새 연주자와 감상자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심미적 체험
은, 고립된 자아의 해체 또는 재가 되고 말 것은 혼미의 경
험을 통해 모든 타자와 감통(感通)하고 화해하는 도덕적 경
지로 승화된다.-시인 임동확


-광주일보 제17120호-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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