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소년 / 이찬
할머니는 이젠 상큼한 소년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 비녀도 풀어
버리고 여자도 싹독 잘랐습니다 여든의 몸이 까까머리 소년처럼
환해졌습니다 여자도 남자도 다 버리고 해맑게 굽은 허리를 접
는 할머닌 이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파마머리도 아니고
단발머리 소녀도 아닌 상고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젊은 날처럼 할머니가 늙어갑니다 할머니는 이젠 할아버지입니
다 할머니를 할아버지 무덤 안에 묻어야겠습니다
-시집 '발 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문학과 지성사)중에서
[해설]
참 새순 같은 늙음입니다. 저렇게 상큼하고 환하고 당당한 늙음
이라면, 늙는 것도 서럽지 않겠습니다. 서럽다니요. 내 안의 남
자와 여자와 떼글떼글한 욕망이 부끄러워서 서둘러 늙고 싶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산전과 수전을 치러야 도달할 수 있는 새순
인가요. 잘 곰삭으려면 열심히 늙어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무덤
은 자궁이로군요. 한껏 어려지고 젊어져야 무덤에도 도달하겠군
요. - 시인 반칠환
-동아일보-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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