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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현실의 관계 - 1. 現實排除, 혹은 逃避 ----이향아

시 창작 자료실

by 백연심 2007. 4. 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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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현실의 관계
詩와 現實의 관계 - 1. 現實排除, 혹은 逃避

 

이향아               
         

 * 詩와 現實의 관계

 '詩' 그리고 '現實', 이 두 개의 어휘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대칭되고 상반되는 것이면서도 이 둘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즉, 시는 '현실'이라고 하는 사회(공간적 현실)와 역사(시간적 현실)속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현실이라고 하는 사회와 역사를 뛰어 넘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은 시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가지 조건과 재료를 제공해 주지만, 현실 그것이 곧 詩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무와 흙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나무는 그 뿌리를 흙 속에 묻고 있지만 그 열매는 흙의 성분이 아닌 것과 같다. 나무의 열매는 뿌리가 묻혀 있는 토양과, 잎이 받아들인 태양광선, 그리고 수분과 양분의 결합체인 그 무엇인 동시에 그 나무의 본질적 표현인 것이다. 詩는 현실의 토양 위에서 발아하고 성장하며 결실하는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식물의 잎사귀는 광합성의 엽록소로 펄럭이는 것이며, 자라난 토양과 영양분을 생체험 그대로 내보이지는 않는다.
 詩가 현실의 산물이라고 할 때 詩는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詩는 현실의 산물이면서도 현실을 떠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곧 詩의 초월성이며 여기에 理想을 지향하는 詩의, 詩로서의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 우리가 詩와 현실의 관계를 논의해야 하는 所以然이 있다.
 詩에서 표현되는 현실의 양상은 크게 현실배제 혹은 현실도피적 경향, 현실고발 혹은 현실부정적 경향, 그리고 현실극복 혹은 인생 예찬의 경향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 現實排除의 詩, 혹은 現實逃避의 詩

 영국의 고전학자로서 종교, 문학, 신화, 민족학 등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 업적을 남긴 랭그(Lang Andrew 1844-1912)는 '詩는 歷史的 記錄의 貯臧庫가 아니다. 現實의 假像이요 幻像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또, '詩가 현실을 표현하는 일에 주력한다면, 존재하는 것만이 진실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며, 존재하는 것만이 진실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성은 詩에서 응당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체의 상상적인 것을 결과적으로 무화시키는 근거를 만들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사실을 표현하는 일에 주력하는 리얼리즘의 수법은 散文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적절한 것이다. 그것을 운문에서 적용하기에는 우선 운문의 형식과 방법에서부터 적합하지 못하다. 산문문학인 소설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로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즉 루카치는 이를 '신에 의해서 버림 받은 세계의 서사시'라고 하였고, 헤겔은 '부르조아지 사회의 서사시'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에 의해서 버림 받은 세계'나 '부르조아지의 사회'는 곧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간의 사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즘 문학인 산문문학은 인간 중심의 세계를 반영한 문학인 것이다.
 리얼리즘은 인생과 생활을 표현하는 데는 강력한 힘을 갖지만 예술적 표현에는 무력하며, 사물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는 있으나 언어의 아름다움은 높이 드러내지 못한다. 헤겔은 이를 구분하여 散文은 '皮相과 有限의 범위 안에서 현상을 悟性으로 파악하는 방법'이며 운문은 '진실한 것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근원적인 표출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쉬운 말로 바꾸어 말하면 '삶'이요 '인생'이다. 그리고 '삶'과 '인생'은 '인간성'의 문제에까지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詩에서의 현실은 시의 토양으로서의 현실이 될 수도 있으며, 詩의 배후에 존재하는 체험적 공간으로서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철저한 의미의 현실 배제의 시는 존재하기 힘들다. 다만 詩에서의 현실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가 중시 되어야 할 것이다.
 詩는 지금 눈 앞에 있는 현실을 표현한 것이 아니요, 있어야 할 현실 곧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 배제가 정당화될 수도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과도한 상상력이 詩를 정직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詩에서 인간과 인생과 현실을 배제하였을 때 그것은 서민의 서정이 아니라 귀족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高逸한 理想을 품고 山水 自然에 몰입하여 신선과 같은 경지를 노래할 수 있으려면 세속적 현실을 초탈하지 않고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우리의 선인들이 內憂 外亂의 정치적 갈등과 혼란이 닥칠 경우, 철학적이며 고답적인 초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의 소용돌이로부터 몸을 건져 올린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이란 비속한 생활의 戰線이며 추상적인 이상과는 동떨어진 苛烈한 삶의 실천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詩를 소설과는 달리 고급문화로 치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文>이라고 하면 詩文을 의미해 왔으며 그것을 누려온 계층도 일반 대중이 아닌 사대부나 귀족계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도피 혹은 현실배제의 詩는 그 '도피' 혹은 '배제' 때문에 '인간부재'의 詩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일부에서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朴木月 <나그네> 전문 -

 예를 들어 박목월의 <나그네>는 인간과 생활이 중심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평적인 조명을 다각적으로 받고 있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일제의 단말마적 상황 속에서 진실한 감정의 발로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불가능했으며, 특히 리리시즘의 표현이란 自我滅却이라는 궁벽하고도 비상한 형식을 빌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던 시대의 詩였다는 이해를 받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존재조차도 의식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滅却의 태도로써 사회와 자신을 조화시키려 했던 그 당시의 자세가 옳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박목월의 <나그네>에 대한 고찰을 더 상세하게 하기 위하여 그밖의 논평을 정리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시대적 진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무자비한 수탈의 상태에서 식량뿐 아니라 밥그릇까지도 전쟁에 필요한 물자라 하여 강제 징발 당하여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젊은이들은 징병 또는 징용으로 끌려 가 온 나라가 암흑 천지였다...그러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풍물을 그렸다 하여 타기할 것인가... 시인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옛풍물을 현실에 대치하여 현실을 현실로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 정희성. 신경림 <한국 현대시의 이해>)

 한국 낭만시의 최고의 것이다
                                           (김종길 [새벽] 1960. 4월호)

 관념적인 한국미에서 추출한 풍물도이다. (일제말의 비참한 농촌현실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
                                                    (김현승)

 향토적인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 있는 상징적 실체로서의 한국적 자연
                                                       (정한모)

 환상적인 자연이며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자족적 자연
                                                          (김 현)

 이상의 지적은 '한국 낭만시의 최고의 것'이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자아멸각의 리리시즘'이니, '현실거부'니, '관념적 풍물도'니, '상징적 한국자연'이니, '환상적 자족적 자연'이니 하는 어구들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 대부분은 <나그네>의 비현실성을 지적한 것이며, 비현실성이란 다름아닌 현실배제적 성격인 것이다.
 사실 <나그네>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성급한 감이 있다. 그것은 먼저 詩라고 하는 문학장르에서 리얼리즘이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가, 詩에서의 리얼리즘의 한계와 가능성은 어느 정도의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깊이 논의된 다음에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문학에서 아니, 詩에서의 현실참여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방법과 개념을 설정하는 일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극복해야 할 현실적 난관이나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 있을 때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은 백인백상으로, 일정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갑작스러운 변란이 발발했을 때, 혹은 경악하고 혼절하기도 하며, 혹은 신앙의 자세로 기구하며 기다리기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거기 총칼과 몸으로 직접 대적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침묵과 무저항으로 버티기도 할 것이다. 싸우다 죽은 사람도 있지만, 불구자가 되어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정신적 상처 혹은 파탄으로 폐인이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점과 현실의 피해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현실을 대면했으며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삶의 진실이 폐쇄되고 억압되었을 때, 더구나 그것을 문학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였을 때, 문학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이 상상력으로, 억압 혹은 부자유라는 장벽을 뚫고 현실을 재현하였다면 그가 작품으로 재현한 진실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과를 어떻게 통일시켜 이해할 수 있는가?
 억압과 부자유 속에서 재현된 진실과,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詩는 散文과 판이하다. 우리는 박목월 자신이 토로한, '조국도 글도 성도 상실해버린 젊은 청년의 가슴에 깃든 체념과 비탄이'었다고 한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얼핏 현실배제의 詩가 불행한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詩의 형태로 착각하기 쉽다. 마치 현실배제의 詩는 어떤 시대의 불행을 은폐하거나 도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詩는 어떤 시대에도 시대적 상황과 관계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만 몰입하여도 얼마든지 정서적 충일을 나타낼 수 있다. 혹은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현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용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詩의 배후에서 잠재적 에너지로만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바다로 가는 길로 걸어 간다. 노오란 호박꽃이 많이 핀 돌담을 끼고 黃昏이 있다.
 돌담을 돌아가면 ____ 바다가 소리쳐 부른다. 바다 소리에 내가 젖는다. 내가 젖는다.
 물바람이 生活처럼 차다. 몸에 스며든다. 요새는 모든 것이 짙은 커피처럼 너무도 쓰다.
 나는 故鄕에 가고 싶다. 故鄕의 숲이, 언덕이, 시내가 그립다. 어릴 적 記憶이 波濤처럼 달려 든다.
 바다가 어머니라면 _____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바다의 품에 안기고 싶다. 안기어 날개같이 부드러운 물결을 쓰고 맘 편히 쉬고 싶다.
 水平線 아득히 아물거리는 銀色의 鄕愁. 나는 찢어진 追億의 天幕을 깁고 있다. 여기 모랫벌에 주저 앉아서.
                                       - 장만영 <鄕愁> 전문 -

 위의 詩는 어떤 의미나 사상도 함축하려고 하지 않고, 목적이 있는 주의 주장을 시사하지도 않았다. 어떤 특수한 삶의 모습도 그려 내려고 하지 않은, 다시 말하면 현실도 인생도 표현되지 않은 詩이다. '물바람이 생활처럼 차다', '요새는 모든 것이 짙은 커피처럼 너무도 쓰다' 등에서 차고 쓴 현실의 고달픔을 내보이기는 했으나 그냥 내보였을 뿐 어떻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나 주장은 없다.
 시인은 바다와 호박꽃과 은빛의 수평선과 모랫벌이 있는 순수 자연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을 뿐이다. 고향의 추억 속에 사는 이 시인은 그 상상세계의 깊고 진실함으로 이미 고향의 자연산천으로 다가가 바다 소리에 젖어 있는 듯한 현실감을 느낀다.
 이것은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나그네가 밀밭길에 '구름에 달가듯이' 파묻혀서 '타는 저녁 놀'의 '외줄기 남도 삼백리' 길을 자연과 동화되어 걸어가고 있는 모습과 동일한 계열의 작품인 것이다.

 落葉이 지고 눈이 내린다.
 잠들기 전에 너는
 겨울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듣고
 꿈에 너는
 冬麥의 푸른 잎을 보리라
 冬麥의 푸른 잎을 보고 잠을 깨면
 너는 네 손발의 따스함을 느끼리라.

                                       - 金春洙 <落葉이 지고> 전문 -

 위의 詩는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린다'-- '겨울바다'-- '冬麥'--'손발의 따스함'으로 시행이 이어지면서 낙엽이 지는 지난 가을의 이미지로부터 손발이 따스해지는 봄까지의 대표적 자연물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이 詩에서의 落葉, 눈, 겨울바다, 冬麥 등의 자연물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마음을 투사하는 자연적 도구로서의 현실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이들 현실은 의지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객관적 상황이나 도전하여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장애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詩를 현실도피의 詩라든지, 혹은 현실배제의 詩라고 하지는 않으며, 또 그렇게 한다고 하여도 詩의 우수성이 절감되거나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독자는 이 詩를 읽으면서 현실도피나 현실배제의 특성을 발견하기 전, 이 시인이 얼마나 순일하게 자신의 내면적 정서에 몰두해 있는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도 현실의 일부이다. 詩가 배태된 곳 즉 시인이 처해 있는 시간과 공간은 모두 현실이다. 따라서 절대적 의미의 현실배제의 詩나 현실도피의 詩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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