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현실의 관계 - 3. 현실승화와 극복의 詩
* 현실승화와 극복의 詩
현실극복의 시는 충분한 여과와 증류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현실의 모습이 생경한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현실보다 나은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할 때, 현실극복 내지 승화의 시는 지상의 현실을 용해하고 흡수하여서, 이상 세계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추구하는 詩라고 할 수 있다. 聖人이 되기보다는 인간이 되려고 하고, 偉人이 되기보다는 평범한 시민이 되려고 하는 현대적 추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념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보다 높고 고결한 이념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이고 구태의연하며 이기와 타산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생각에서 우선 벗어나야 할 것이다. 시적 사실주의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우선 그 사실의 선택이 편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선택하는 것은 하나의 구체적 단면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이고 총괄적인 것의 선택은 시적 표현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Realism 詩가 선택하는 소재는 주로 변두리 인간들과 그들의 삶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전체 대중을 우리는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키엘케골의 말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나 농민만을 민중이라 하는가? 아니다. 민중이란 민주주의 구성 인원 모두가 민중 개개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Realism이 선택하는 詩의 소재는 지나치게 변두리 삶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것만이 이 시대 삶의 단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궁벽한 의견이며 동시에 위험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이론적으로 볼 때 현실극복의 시는 인간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해야 할 현실을 예언적으로 반영하면서 시인의 Vision을 제시해야 한다. 사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노출하는 현실고발의 시도 그것이 다름 아닌 '詩'가 되려면 인간의 추악상을 들추어내는 데에 역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간 존재와 생활 속에서 가치 있는 부분을 선택하여 그 속에 담겨진 현실의 단면을 표현하고, 그것으로 영원한 인간성을 반영하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 지금 눈앞의 현실에 횡행하고 있는 인간이 아닌 이상적인 인간, 아무렇게나 있는 그대로의 조잡한 현상이 아닌, 인류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현상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노력이 과도할 때는 현실극복의 시가 아닌 이상추구의 시, 혹은 낭만적 시가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리얼리즘의 요소를 표출하되 詩의 형식미에 유의한 詩를 찾아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충대충 큰돈으로 셈을 치르다 보면 잔돈만 주머니에 찰랑거린다. 어디어디에 돈들을 썼는지 몇 번이나 씀씀이를 되짚어도 쓴 돈과 남은 돈은 영영 맞아들지 않는다.
번번이 어긋나는 이 계산은 어디서 번번이 삐는 것일까. 내 청춘은 번번이 삐어 이 세상 장보기 다 마치면 무엇이 모자란 채로 저승 갈꺼나. 저승 가는 길목에는 주먹구구로 삐어 있는 청춘들이 짚어 질꺼나.
잔돈처럼 남아서 찰랑거리며 고향 가는 막차를 기다린다. - 鄭 洋 <장보기> 전문 -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생활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철없이 즐거운 사람도 있고, 잘 알기 때문에 초월적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또 삶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불행을 느끼기도 하지만, 잘 모르면서도 처음부터 부정적이 될 수도 있다. 鄭 洋의 <장보기>는 현실의 와중에 있으되 거기 완전히 빠지지 않고, 생활의 고통과 부조리를 알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쓴 돈과 남은 돈의 타산이 들어맞지 않은 장보기와 같은 생활은, 대강대강 주먹구구로 사는 구수하고 수더분한 생활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언제나 어긋나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저승에 갈 때까지 이러한 방식대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주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못견디게 고통스러움만 있는 것도 아닌 삶, 충분히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을 제시하고 있어, 현실극복의 시로서 좋은 예가 된다 하겠다. 詩에 시인의 철학이나 사상, 사회적인 이데올로기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인생과 인간을 도외시한 문학은 있을 수 없으며 인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생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詩는 다시 방법의 미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詩가 현실 혹은 인생을 어떠한 태도로서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詩를 성공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으며 실패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詩는 어떠한 경우에도 표현의 목적을 내세운 도구로 이용될 수 없다. 詩는 詩의 독자적인 근거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발레리의 말처럼 思考(社會나 現實)는 詩句 속에서 과일 속에 묻힌 영양소처럼 숨겨져 있어야 한다.
잠자는 법 눈뜨는 법 걸음 걷는 법 하루에 열두 번도 하늘 보는 법 이를 빼고 솜 한 뭉치 틀어막는 법 한 근씩 살 내리며 앓는 법 배워요 눈물의 소금으로 혓바닥 절이며 열 손가락 손톱마다 동침 꽂고 손 흔드는 이별법도 배워요 입술 꼭꼭 깨물며 눈으론 웃고 목구멍 치미는 약 삼키는 법 배워요 가슴 터져 나도 천리 긴 강물 붕대로 감고 하루에 열 두 번씩 죽는 법 배워요 - 洪允淑 <사는 法 1> 전문 -
현실은 거시적으로 보느냐 미시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이 아주 다르다. 즉 역사라는 시간과 사회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상황들, 민족이나 국가의 독립을 위한 변란이나 士禍, 세계적인 기류에서 일어나는 인권을 위한 전쟁이라든가 평화를 위한 투쟁 등, 거대하고 특별한 관심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날그날 먹고 자고 생각하고 다시 후회하며 살아가는 시시한 우리들의 일상, 천태만상의 각기 다른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세부들도 모두 현실인 것이다. 현실은 꿈과 이상의 대립 개념이면서도 이상을 존재하게 하는 주추와도 같고 바탕과도 같다. 그러나 때로는 추악하고 辛酸하며 때로는 고달픈 노역으로 이어지는 구차한 삶 또한 현실이다. 홍윤숙의 詩가 보이는 것은 거창하거나 엄숙한 현실 의식이 아니다. 그의 현실 극복의 시는 구차한 삶을 이어주는 작은 일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 내는 것, 이것이 곧 현실의 극복이다. '잠자는 법 눈 뜨는 법 걸음 걷는 법, '눈물의 소금으로 혓바닥 절이며 열 손가락 손톱마다 동침 꽂고 손 흔드는' 법, 이별의 아픔을 속으로 참고 견디며 발설하지 않는 법을, 하루하루 배우면서 살아간다. 입술 깨물면서 눈으로는 웃고, 목구멍 치밀어 오르는 역한 약도 삼키는 법을 배운다. 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가는 법인 것이다. 사는 법을 배우는 연습은 바로 죽는 법을 배우는 연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시인은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다. 현실을 극복하여 '사는 법'을 알고 있는 이 시인은 죽는 법 또한 통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이미 극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