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수필문학입문 5 - 사경

수필창작강의실

by 백연심 2007. 4. 1. 00:11

본문

윤오영




사경이란 주로 자연묘사를 말한다. 예술은 하나의 미를 창조해야 하고 미는 자연의 미가 그 근원이 된다. 무한의 생명감을 자연에서 느끼고 썩은 나무뿌리, 말없는 돌덩이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맛보고, 산천의 묘경妙境과 화조花鳥의 현몰顯沒에서 법열法悅을 느껴 온 동양의 문학은 이 자연묘사에서 정경구도情景俱到의 명문名文과 시선詩禪 일치의 운향韻香을 떨쳤던 것이다. 도연명陶淵明, 왕유王維 같은 전원 시인을 비롯하여 유종원柳宗元의 [유주팔기柳州八記]를 일품逸品이라 일러왔고, 마명晩明 소품가小品家들이 다 수석水石의 묘사에 특기를 보였으며, 근래 서정수필로 알려져 있는 주자청朱自淸의 [하당월색荷塘月色]도 실은 섬세한 자연묘사에서 그 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현대 우리 문장에서 뚜렷한 서경문敍景文을 보기 어려운 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동양적인 심미감審美感을 상실하고 서구적인 잡문이 성행하는 것이 그 하나요, 명민한 관찰력과 문장 표현의 수련에 등한한 것이 그 둘째의 이유일 것이다. 초심자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것이 자연의 묘사에서 붓을 닦으라는 것이다. 아무리 명필가라도 습자習字에서 필력筆力을 기르지 않고 대가가 될 수 없으며, 아무리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도 물건의 형태를 제대로 그려보고 채색을 배합해서 색태色態를 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그림을 믿지 못할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의 능력이나 경景에서 느낀 정서를 표현할 기술이 없다면, 이미 문장력의 바닥은 드러난 것이다. 흔히 보는 바와 같이 말초적인 감각에서 오는 재치나, 풍세적諷世的인 고십에 가까운 촌평류寸評類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 대성大成은 이미 기대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시평촌감류時評寸感類의 문장을 쓰려면 풍부한 학식과 엄정한 붓으로 최소한 5, 60매의 대해장강大海長江과 같은 시사에세이를 쓸 일이다. 나는 초심자에게 어디까지나 단계적으로 문필의 정상적인 수련을 거쳐서 문학의 정 코스를 밟아 나갈 것을 권하고 싶다.


돌의 맛 - 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妙境을 모르고서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 할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이 마당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凜然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石壽圖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同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寫實이 아니엇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석을 담뿍 실어 놓기도 하고, 십 리 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瀟灑한 산봉우리 밑, 물을 따라 감도는 오솔길에다 나무꾼이나 산승山僧이나 은자隱者를 그리되, 개미 한 마리만큼 작게 그려 놓고 미소하는 화경畵境은 사실寫實이라기보다는 꿈을 그린 것이다. 이 정신이 사군자, 석수도石壽圖, 서예書藝로 추상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던가? "살아 있다"는 한 마디는 동양미의 가치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맥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웃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다.


조지훈趙芝薰의 [돌의 미학美學]의 일절이다. 매우 취미 있는 글이요 음미해 봄직함 말이다. 나는 이것이 서경문敍景文을 쓰려는 사람에게도 한 가닥의 시사示唆가 될 것을 믿고 여기에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수필문학 작품으로 볼 때는 귀할 것이 없는 글이다. 사경수필寫京隨筆의 묘는 이런 개념적인 서술에 있지 않고, 자기가 보고 느낀 어느 하나의 돌을 설명 없이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기가 말하려는 돌의 미, 혹은 생명감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문학이요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운 것을 공부하는 것이 문장의 수련이다. 나는 "돌에는 태고의 기운이 감돌고 있고 난초는 군자의 향기를 머금었다石存太古之氣, 蘭君子之香"란 말을 들었고, 정원에 화초와 같이 놓인 괴석이며, 노인들이 문갑 위에 돌을 놓아 두던 아취도 보앗다. 돌을 사랑하던 미남궁米南宮의 일화도 알고, 윤선도尹善道의 [석우가石友歌]도 읽었다. 그래서 좀 이상스러운 돌을 보면, 귀중품이나 발견한 것처럼 주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돌에서 특수한 미나 생명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때 춘곡春谷의 그림에서 돌을 보고 그 충천衝天하는 듯 강경剛勁한 힘을 느꼈다. 불과 다섯 치五寸가 못되는 지폭紙幅에 그렇게 범할 수 없는 기골氣骨을 담을 수 있다는 데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돌이란 저렇게 날카롭게 선 돌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중국 사람의 화첩에서 둥글뭉뚝하고 우묵우묵 패인 돌을 보고 그 고기古奇하고 창경蒼勁하면서도 퍼져 나는 풍운風韻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올망졸망한 돌들에서 풍기는 다정한 듯한 명랑하고 온아한 맛도 느낄 수가 있엇다. 그 후에 내가 본 작가 불명의 소폭의 그림은 먹도 흐리고 돌도 빨랫돌 포개 논 것 같아서 아마 서당 아이들이 장난으로 그린 휴지겠지 하고 말다가, 범석凡石이란 단 두 자의 화제畵題에 눈이 끌렸고, 그 글씨는 예서인데, 분명 범필凡筆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다시 음미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분실되고 말았지만, 추후에 어느 서화가가 보고 추사秋史의 필적이라고 했다. 나는 사실 돌을 볼 줄을 몰랐고 돌의 미 혹은 돌의 생명감을 느낀 예술가들이 그것을 묘사한 데서 비로소 무엇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그 세 폭의 그림을 글로 묘사해 보려고 무려 수십 매의 원고지를 까맣게 해 놓고, 또 직접 돌을 놓고 그
림 그리듯 이리저리 묘사해 봤지마는 내 천재淺才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내 아직도 돌에 대한 안목이 미급하다는 것도 느꼈다. 묘사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물며, 무한한 자연계의 풍경에 있어서랴. 그러나 이것에 능해야 글을 쓸 줄 아는 기술이 터득되는 것이다.


산 전체가 요원한 화원이요, 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오른 한 떨기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신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채 붉게 타면서 잇는 것일까. 진주강眞朱江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免같이, 우러러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김형金兄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떠릭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행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만 같다. (정비석 [산정무한山情無限0 중에서)


금강산을 유람하여 도중에서 단풍의 숲을 걸으며 묘사한 대문이다. 전체가 다 단풍의 붉은 것을 극구 표현하려는 글이다. 그러나 금강산이 아니라도 단푸잉 짙은 산중 수림은 다 이럴 것이요, 단풍이 붉다는 것은 풍림楓林을 걸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천언만어가 겨우 단풍의 붉은 점밖에 그린 것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작자의 새로운 시적 발현을 찾을 수 없다. 사경寫景의 어려운 점이 여기 있다.


산이 둥글고 윤곽이 곡선이면 바위가 있어 그 곡선을 깨뜨리고, 나무와 함께 산정에 음영과 액센트를 준다. 산도 위로 솟고, 나무도 하늘을 향해 위로 뻗는다. 그러나 절벽에 난 어떤 나무는 아래로 기울어지며 전체의 구도에 조그만 안정을 가져오려고 애쓴다. 아니 더 완전한 조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있는 것은 그 산밑을 고요히 흐르는 강의 수면이다. 산의 종주선縱走線과 강의 수평선이 원만하게 산기슭에서 결합하고 거기에 조그만 편주片舟가 떠서 깊이를 모르는 정지감靜止感을 더 한층 효과 있게 한다.


김원룡金元龍의 [행복의 미학]의 일절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설명이요, 자연의 묘사는 아니다. 그러나 한 폭의 풍경화를 설명하듯 매우 구체적이다.


몇 해 전 언젠가는 명동 어느 상점 유리창 속에 신라의 토기가 하나 - 양쪽에 조그만 귀가 달리고 꼭 화분으로 하면 좋을 것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 그걸 가져다 집에 놓고 백매白梅 한 그루를 사다 심었더니 그 멋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집에만 돌아오면 "참 좋다"고 환성을 연발하곤 했는데, 얼마 지난 뒤, 잎이 똘똘 말리더니, 우수수 떨어져, 드디어는 죽어 버리고 만다. 아직까지 그 백매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 며칠 사이의 즐거움이란 실로 천하일품이었다.


같은 글 중의 일절이다. 신라의 토기, 양쪽의 조그만 귀가 달린, 화분으로 하면 좋은, 간단한 몇 마디에서 그 그릇을 넉넉히 알 수 있다. 현학적인 설명이나 구구한 묘사가 필요없다. 토분에 심은 백매, 설명 없어도 좋다. 잎이 똘똘 말리고, 우수수 떨어지고, 드디어 죽어 버리고, 그랬을 것이다. 아깝느니, 서운하다느니 그런 소리보다, 그 며칠 사이의 즐거움이 떠오른다. 대개 문장이란 간결하고 군말이 없어야 한다. 묘사란 과장이나 예찬이나 세세한 조서를 꾸미라는 말이 아니다. 대개의 모습은 두세 마디면 족할 때가 많다.

근래 석石이나 난蘭이나 조선 백자 같은 것들을 책상 위에 놓고 아취雅趣를 즐기는 분들이 늘어가는지 가끔 그런 것을 제재題材로 쓴 글이 눈에 띈다. 그런나 거의 천편일률로 귀에 익은 예찬이 아니면 통속적인 미술론으로 아취를 자랑하는 수가 많다. 심한 경우에는 만일 물명物名만 적지 아니했더면 접시를 놓고 그러는지 대접을 놓고 그러는지, 병이 그렇게 생긴 것인지, 항아리가 그렇게 생긴 것인지, 과연 어떤 물건을 가지고 그러는지 보지 못한 사람으로는 알 수가 ㅇ벗다. 이것은 곧 묘사하는 표현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취를 피력하려다 천속淺俗이 드러난다.


(...전략...) 황갈색으로 검누른 유약釉藥을 내려씨운 두꺼비 연적硯滴인데, 연적으로서는 희한한 놈이다. 4, 50년래로 만든 사기로서 흔히 부엌에서 고추장, 간장, 기름 항아리로 쓰는 그릇 중에 이따위 검누른 약을 바른 사기를 보았을 뿐, 연적으로서는 이 종류의 사기는 초대면이다. 두꺼비로 치고 만든 모양이나 완전한 두꺼비도 아니요, 또 개구리는 물론 아니다. 툭 튀어나온 눈깔과, 떡 버티고 앉은 사지며, 아무런 굴곡이 없는 몸둥아리 - 그리고 입은 바보처럼 '헤' 하는 표정으로 벌린데다가 입 속에는 파리도 아니요, 벌레도 아닌 무엔지 알지 못할 구멍 뚫린 물건을 물렸다. 콧구멍은 금방이라도 벌름벌름할 것처럼 못나게 뚫어졌고, 등러리는 꽁무니에 이르기까지 석 줄로 두드러기가 속은 듯 쪽 내려 얽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약은 갖은 재주를 다 부려 가면서 얼룩얼룩하게 내려 부었는데, 그것도 가슴 편에는 다소 희멀끌함 효과를 내게 해서, 구석구석이 교巧하다기보다 못난 놈의 재주를 부릴 대로 부린 것이 오히려 더 사랑스럽다. (...중략...)

너는 어찌 그리도 못 생겼느냐. 눈알은 왜 저렇게 튀어나오고 콧구명은 왜 그리 넓으며, 입은 무얼하자고 그리도 켰느냐. 웃을 듯 울 듯한 네 표정! 곧 무슨 말이나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 가장 호사스럽게 차례를 한다고, 네 몸은 얼숭덜숭하다마는 조금도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흡사히 시골 색시가 능라주단을 멋없이 감은 것처럼 어색해만 보인다.

앞으로 앉히고 보아도 어리석고 못나고 바보 같고..... 모로 앉히고 보아도 그대로 못나고 어리석고 멍텅하기만 하구나. 내 방에 전등이 휘황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못나게만 보이니, 누가 너를 일부러 심사를 부려서까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네 입에 둔 것은 그게 또 무어냐. 필시 장난군 아니녀석들이 던져준 것을 파리인 줄 속아서 받아 물었으리라. 그러나 배앝아 버릴 줄도 모르고, 준 대로 물린 대로 엉거주춤 앉아서, 울 것처럼 웃을 것처럼, 도무지 네 심정은 알 수가 없구나. 너를 만들어서 무슨 인연으로 나에게 보내 주었는지 너의 주인이 보고 싶다. 나는 너를 만든 네 주인이 한국 사람이란 것을 안다. 네 눈과, 네 입과 네 코와, 네 발과, 네 몸과, 이러한 모든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너를 만든 솜씨를 보아, 너의 주인은 필시 너와 같이 어리석고 못나고, 속기 잘하는 호인일 것이다. 그리고 네 주인도 너처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성격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는 줄 아느냐. 그 못생긴 눈, 그 못생긴 코, 그리고 그 못생긴 입이며, 다리며, 몸둥아리들을 보고, 무슨 이유로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커다란 이유가 있다. 나는 고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독함은 너 같은 성격이 아니고서는 위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략...)


위 예문은 김용준이 고물상에서 우습게 생긴 두꺼비 연적을 하나 사 가지고 와서, 이모저모 뜯어보며 느낌과, 모습을 아울러 알 수 있게 그린 글이다. 여기에서 이 민속품에 가까운 한 연적은 새로운 성격을 지니고 나타나 혈액이 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을 자조적으로 서글피 부각시키고 있다. 묘사의 한 수법이 될 것이다.




<수필문학입문> 中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