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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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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심 2006. 11. 22. 14:48

본문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감상의 길잡이(1)

3연이 각각 내용을 달리 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형성하였다.

제1연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는 생의 종말을 뜻한다. 그 종말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가식을 다 벗어던지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제2연의 '오직 한 사람'은 다른 의견도 있지만, '신(神)'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연에는 이 시의 시상이 집중되어 있다. '굽이치는 바다'는 화자의 인생 행로일 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현장, 험난한 세파를 거쳐 그가 새로이 들어선 곳이 '백합의 골짜기'다. '백합'은 성서에서도 순결한 신앙 또는 신앙인으로 자주 비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靈的) 환희의 세계에 다다른 상태가 '백합의 골짜기'다. 그는 이곳에 그냥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에 다다라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적 화자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 고절한 단독자의 실존 심상으로 화자의 고독한 영혼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는 시기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신(神)과의 만남을 가지는 계기로 다루어져 있다. 시인 자신도 단순한 서정 외에 좀더 깊은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감상의 길잡이(2)

이 시는 모든 것이 생명을 마감하는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시인의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도조 형식의 작품이다. 시인은 가을의 고독감 속에서 좀더 겸허해진 마음으로, 그 동안 살아온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삶의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더욱 경건한 삶을 준비하고자 한다.

가을이 환기하는 서정이 주가 된 1연은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메시지를 핵심으로 하여 '낙엽'과 '모국어'의 일상적 이미지를 '낙엽'이라는 생명 감각과 '모국어'라는 생활 감각으로 전이, 결합시킴으로써 생명에의 외경감과 그에 대한 겸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낙엽이 뜻하는 죽음과 마주한 생의 겸허이며, 운명애(運命愛)에 대한 소중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낙엽의 떨어짐은 시인으로 하여금 생의 숙명성을 자각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다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2연은 참된 사랑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1연에서 나타났던 낙엽의 이미지가 사랑의 이미지로 전이됨으로써 낙엽이라는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던 시인은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일상적 의미를 뛰어넘어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성, 한계성을 극복하고 절대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에는 사랑의 도덕률과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나타나 있는 한편,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는 구절 속에는 사랑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 가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것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즉, 사랑의 원리는 이루어져 있는 열매를 따는 것이 아닌, '시간을 가꿈'으로써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과정이자, 그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3연은 2연에서 밖으로 향하던 '사랑'이 자신의 내면을 향한 '고독'으로 전환되어 본질적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간 온갖 정성을 기울여 여름내내 화려하게 가꾸었던 잎을 스스로 떨구고 '마른 나뭇가지'가 된 나무처럼 인간도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회귀해야 하는 시간이 바로 가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의 '영혼'은, '굽이치는 바다'로 표상된 젊은 날의 열정과 번민을 극복하고, '백합의 골짜기'라는 영적 환희의 세계까지도 초극함으로써,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은 절대 고독의 경지에 이른 경건하고 원숙한 인간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김현승은 후기에 가서도 이 고독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하여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 등의 출중한 시군(詩群)을 낳게 됨으로써 '고독의 시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감상의 길잡이(3)

시를 이야기할 때 이따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인용된다.원래 이 동화는 프랑스 지방에서 비롯된 것으로,유리구두가 아니라「가죽구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죽(vaire)이란 말이 유리(verre)란 말과 그 음이 비슷해서 영어권으로 건너올 때 유리구두로 잘못 번역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진짜보다도 더 널리 퍼지게 되어 이제는 프랑스의 본고장으로까지 역수입되어 「유리 구두」로 정착되고 말았다. 본래의 가죽구두보다도 유리구두의 이미지가 신데렐라의 이야기에 더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일단 시가 태어나게 되면 그 언어들은 그것을 낳은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자체의 이미지로 홀로서기를 한다.그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 바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이다.김현승의 시「가을의 기도」에 등장하는「백합의 골짜기」도 마찬가지이다.백합이라고 하면 서구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화병이 아니라 골짜기에 핀 백합꽃이라고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왜냐하면 우리 골짜기에는 진달래나 혹은 할미꽃들만이 피어있는 까닭이다.하지만 서양의 경우라 해도「백합의 골짜기」는 현실속에서도,그리고 시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그 이미지의 근원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오역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골짜기의 백합」은「은방울 꽃」(Lisdes Valles)이라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을 일본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데서 생겨나게 된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여지껏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사생아로 태어난「골짜기의 백합」은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고,김현승의 시「가을의 기도」에 와서는 아주 절묘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는 공자가 보며 크게 탄식했다는「골짜기의 난초」(난향유곡)가 되었거나 혹은 백합의 경우라해도 성경에 있는 구절대로「들에 핀 백합」이었을 것이다.더구나「가을의 기도」에서「백합의 골짜기」는 단순한 장식적 은유가 아니라「굽이치는 바다」와「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를 잇는 중요한 매개공간으로,눈으로 볼 수 없는「영혼」을 가시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굽이치는 바다」란 말은 시인 자신의 말대로「겸허한 모국어」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법에 잘 맞지 않는 표현이다.냇물이나 산맥이라면 몰라도 넓고 편편한 바닷물은 굽이친다고는 할수 없다.그리고 연극이나 소설의 경우라면 대단원에 해당되는「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처럼」은 누가 봐도 진부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합의 골짜기]가 끼어들면 거짓말처럼 그 모든 시구들은 갑자기 새롭고 긴장된 이미지로 살아난다.[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다다른」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지막 시행들은 시인의 내면속에서 변화해 가는 영혼의 모습을 세단계의 은유적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그 영혼은「바다→골짜기→마른 나뭇가지」의 순서로 공간을 옮겨가면서,그 단계마다 영혼의 모습은「파도](바다)와「백합](골짜기)과「까마귀](마른나뭇가지)로 변신한다.넓은 바다는 좁은 골짜기로,골짜기는 다시 앙상한 나뭇가지로 면에서 선으로 이동하면서 축소 되어 간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평의 바다가 점차 수직화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골짜기가 되고 이윽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다. 물론 그 공간에 자리한 대상물들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변화해 간다. 바다의 영혼은 파란색 파도로 굽이치고(그렇다.바다가 골짜기의 백합과 연결되었을 때만이 굽이치는 바다의 시적 일탈성은 허락된다). 골짜기의 영혼은 백합처럼 흰빛으로 조용하게 피어난다.그리고 그것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르면 바다의 파도들은 날개를 접은 까만 까마귀가되어 정지된다.그러니까 영혼의 색채는 청­백­흑으로,그 움직임은 동­부동­정으로,그리고 상태는 무생­식물­동물로 변모해 가고 있는 과정을 읽을 수 있다.물론 우리는 그 패러다임 읽기를 통해서 푸른 바다에서는 봄(젊음)의 영혼,골짜기에서는 하얗게 정화해가는 여름(노장)의 영혼,그리고 이윽고 마른 나뭇가지에서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있는 영혼의 사계절을 보게 된다.그리고 움직임도 넓이도 색채도 모두 떨어져 나간 가을의 영혼이지만,그것이 다다른 곳은 바다와 골짜기보다 훨씬 높은 수직의 자리 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영혼의 위치야말로「홀로 있게 하소서」의 마지막 고독에서 얻어질 수 있다.

「가을의 기도」는 그 형식만 3연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기도의 패러다임도 역시 세국면으로 구성되어 있다.첫연의 가을은「기도하게 하소서」로 기도하기와 시쓰기를 위한 모국어(언어)에 대한 욕망을,가운데 연의 가을은「사랑하게 하소서」로 시간에 대한 욕망을,그리고 마지막 연의 가을은「홀로 있게 하소서」로 고독한 영혼에 대한 욕망을 나타낸다.가을의 욕망을 나타내는 이 세가지 패러다임은 단순한 공간적 비교 축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비교축으로도 전개되어 있다.처음 연은「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로 초추를,가운데 연 은「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로 중추를,그리고「마른 나뭇 가지」의 마지막 연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만추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가을의 기도는 마지막 연에서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

첫째연과 둘째연은「가을에는 …하소서]로 시작하여 역시「…하소 서」의 종지형으로 끝낸 완벽한 병렬형식으로 되어 있으나,마지막 연만은 같은 병렬구조를 지니면서도 도치법을 써서「하소서]가 아니라「까마귀처럼」으로 끝맺음으로써 그 틀을 깨고 있다.형식만이 차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첫연의 기도하기­시쓰기는 모국어라는 대상이 있고,가운데 연의 사랑하기는「오직 한 사람만」이라는 뚜렷한 대상이 있다.하지만 마지막 연에는 그런 목적 대상이 없다.마른 가지위의 까마귀처럼 절대 고독의 내면 세계만이 존재한다.끝연은 첫연과 가운데 연과 대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1,2,3연의 전구조를 그 내부속에 복사해 놓은 프락탈 구조로 되어있다.즉 1연의「기도하기­시쓰기」는 굽이치는 바다에,그리고 가운데 연의「사랑하기」는 골짜기의 백합에,그리고「홀로 있기」는「마른가지 위의 까마귀」에 대응한다.

「가을의 기도」는 시와 종교(유일자에 대한 사랑)를 거쳐 최종적인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과정을 성숙과 조락의 가을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가을의 기도」에는 봄의 바다와 여름의 백합,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인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로 삶의 사계절이 내포되어 있다.첫연의 낙엽과 마지막 연의 고목 사이에는 백합 꽃이 피어 있는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백합과 까마귀의 절묘한 결합으로「가을의 기도」는 비로소 높은 음자리표를 지닌 화음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다.그래서 김현승의「가을의 기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음성을 너무 닮았다고 나무라서는 안된다.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골짜기의 백합」처럼 오히려 오역의 경우가 보다 아름다운 시의 이미지를 낳듯이 릴케의 기도를 닮았다해도 이미 김현승의「가을의 기도」는 홀로 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혼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이어령 교수>
 

   핵심정리

▶ 시작(詩作) 배경
가을의 쓸쓸함과 겸허함 속에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자세를 통하여 내적 충실을 이루고자 하는 경건한 시정신.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지은이의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삼라만상이 종말을 고하는 가을, 그 종말로 많은 깨달음을 얻는 계절이기도 한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시다. 그의 후기시의 주된 특징인 내면 지향적 경향, 특히 고독의 추구가 이 시의 바탕에 깔리어 초기의 주된 경향인 자연 친애 사상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지은이의 종교적 기질이 어느 정도 나타나 있는 이 시에서 고독을 형상화한 시행을 찾아 보자. 제3연에서 구사한 도치법은 어떤 효과를 얻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바다'와 '골짜기'는 어떤 의미에서 선택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 성격 : 종교적, 명상적, 상징적, 기구적
▶ 어조 : 가을의 계절감을 사랑과 명상, 기도로써 체험하는 겸허한 목소리.(기도조의 어조)
▶ 특징 : ① 기도 형식의 어법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냄.
② 형태상 제1연보다 재2연이, 제2연보다는 제3연이 1행씩 길어지는 점층적 구조
▶ 구성 : ① 기(제1연) : 기도에 대한 염원      
② 서(제2연) : 사랑에 대한 염원
③ 결(제3연) : 고독에 대한 염원 ― *주제연
▶ 제재 : 가을의 기도
▶ 주제 : 가을의 고독과 기도를 통한 정신적 충만감.(경건한 삶에의 가치 추구)
▶ 시어의 상징 의미
* 가을 -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간
* 겸허한 모국어 - 영혼의 소리(기도)
* 오직 한 사람 - 신, 절대자
* 가장 아름다운 열매 - 가치있는 이상, 신의 축복, 사랑의 결실 등.
* 비옥한 시간 - 보람되고 알찬 가을의 시간
* 굽이치는 바다 - 고뇌와 수난의 인생길
* 백합의 골짜기 - 깨끗하고 찬란한 인생길
* 마른 나뭇가지 - 지극히 외로운 경지
* 까마귀 - 세상과 절연된 절대 고독의 경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문학 예술』(1956.11) /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핵심 정리>
▶ 시작(詩作) 배경
가을의 쓸쓸함과 겸허함 속에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자세를 통하여 내적 충실을 이루고자 하는 경건한 시정신.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지은이의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삼라만상이 종말을 고하는 가을, 그 종말로 많은 깨달음을 얻는 계절이기도 한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시다. 그의 후기시의 주된 특징인 내면 지향적 경향, 특히 고독의 추구가 이 시의 바탕에 깔리어 초기의 주된 경향인 자연 친애 사상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지은이의 종교적 기질이 어느 정도 나타나 있는 이 시에서 고독을 형상화한 시행을 찾아 보자. 제3연에서 구사한 도치법은 어떤 효과를 얻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바다’와 ‘골짜기’는 어떤 의미에서 선택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 성격 : 종교적, 명상적, 상징적, 기구적
▶ 어조 : 가을의 계절감을 사랑과 명상, 기도로써 체험하는 겸허한 목소리.(기도조의 어조)
▶ 특징 :
① 기도 형식의 어법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냄.
② 형태상 제1연보다 재2연이, 제2연보다는 제3연이 1행씩 길어지는 점층적 구조
▶ 구성 :
① 기(제1연) : 기도에 대한 염원
② 서(제2연) : 사랑에 대한 염원
③ 결(제3연) : 고독에 대한 염원 ― *주제연
▶ 제재 : 가을의 기도
▶ 주제 : 가을의 고독과 기도를 통한 정신적 충만감.(경건한 삶에의 가치 추구)
▶ 시어의 상징 의미
* 가을 -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간
* 겸허한 모국어 - 영혼의 소리(기도)
* 오직 한 사람 - 신, 절대자
* 가장 아름다운 열매 - 가치있는 이상, 신의 축복, 사랑의 결실 등.
* 비옥한 시간 - 보람되고 알찬 가을의 시간
* 굽이치는 바다 - 고뇌와 수난의 인생길
* 백합의 골짜기 - 깨끗하고 찬란한 인생길
* 마른 나뭇가지 - 지극히 외로운 경지
* 까마귀 - 세상과 절연된 절대 고독의 경지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절대 고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까마귀’

2. 다음은 이 시에 대한 작가 자신의 언급이다. ( ) 안에 적당한 말을 찾아 쓰라.
나의 고독은 절망적인 고독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 있는 고아와 같은 고독이라면 궤변일지 모르겠다. 또한, 나의 고독 중에는 구원을 바라며 신(神)에게 두 팔을 벌리는―( )와(과) 같은 고독도 있다. 아직까지는 나의 시에 있어선 단지 고독을 위한 고독, 절망을 위한 절망이고자 한다.

<모범답> 마른 나뭇가지

3. 이 시에 나타난 ‘가을’은 어떤 계절인지 각 연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가을은 영적(靈的) 충실을 기할 수 있는 계절(제1연)이며, 사랑을 예비하는 계절(제2연)이며, 고독의 계절(제3연)이기도 하다.

4. (1)㉠은 어떤 상황을 은유로 표현한 것인지 30자 내외로 쓰고, (2)‘바다’와 ‘골짜기’라는 시어가 어떤 의미의 비유로 선택되었을까를 설명해 보라.
<모범답> (1) 번뇌와 고난으로 얼룩진 삶과 순결하고 영적(靈的)인 삶의 세계
(2) 고뇌는 바다처럼 거칠고 넓으며,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는 골짜기처럼 깊고 좁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감상의 길잡이>(1)
3연이 각각 내용을 달리 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형성하였다.
제1연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는 생의 종말을 뜻한다. 그 종말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가식을 다 벗어던지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제2연의 ‘오직 한 사람’은 다른 의견도 있지만, ‘신(神)’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연에는 이 시의 시상이 집중되어 있다. ‘굽이치는 바다’는 화자의 인생 행로일 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현장, 험난한 세파를 거쳐 그가 새로이 들어선 곳이 ‘백합의 골짜기’다. ‘백합’은 성서에서도 순결한 신앙 또는 신앙인으로 자주 비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靈的) 환희의 세계에 다다른 상태가 ‘백합의 골짜기’다. 그는 이곳에 그냥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에 다다라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적 화자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 고절한 단독자의 실존 심상으로 화자의 고독한 영혼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는 시기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신(神)과의 만남을 가지는 계기로 다루어져 있다. 시인 자신도 단순한 서정 외에 좀더 깊은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감상의 길잡이>(2)
이 시는 모든 것이 생명을 마감하는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시인의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도조 형식의 작품이다. 시인은 가을의 고독감 속에서 좀더 겸허해진 마음으로, 그 동안 살아온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삶의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더욱 경건한 삶을 준비하고자 한다.
가을이 환기하는 서정이 주가 된 1연은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메시지를 핵심으로 하여 ‘낙엽’과 ‘모국어’의 일상적 이미지를 ‘낙엽’이라는 생명 감각과 ‘모국어’라는 생활 감각으로 전이, 결합시킴으로써 생명에의 외경감과 그에 대한 겸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낙엽이 뜻하는 죽음과 마주한 생의 겸허이며, 운명애(運命愛)에 대한 소중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낙엽의 떨어짐은 시인으로 하여금 생의 숙명성을 자각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다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2연은 참된 사랑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1연에서 나타났던 낙엽의 이미지가 사랑의 이미지로 전이됨으로써 낙엽이라는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던 시인은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일상적 의미를 뛰어넘어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성, 한계성을 극복하고 절대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에는 사랑의 도덕률과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나타나 있는 한편,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는 구절 속에는 사랑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 가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것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즉, 사랑의 원리는 이루어져 있는 열매를 따는 것이 아닌, ‘시간을 가꿈’으로써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과정이자, 그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3연은 2연에서 밖으로 향하던 ‘사랑’이 자신의 내면을 향한 ‘고독’으로 전환되어 본질적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간 온갖 정성을 기울여 여름내내 화려하게 가꾸었던 잎을 스스로 떨구고 ‘마른 나뭇가지’가 된 나무처럼 인간도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회귀해야 하는 시간이 바로 가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의 ‘영혼’은, ‘굽이치는 바다’로 표상된 젊은 날의 열정과 번민을 극복하고, ‘백합의 골짜기’라는 영적 환희의 세계까지도 초극함으로써,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은 절대 고독의 경지에 이른 경건하고 원숙한 인간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김현승은 후기에 가서도 이 고독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하여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 등의 출중한 시군(詩群)을 낳게 됨으로써 ‘고독의 시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감상의 길잡이>(3)
시를 이야기할 때 이따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인용된다.원래 이 동화는 프랑스 지방에서 비롯된 것으로,유리구두가 아니라「가죽구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죽(vaire)이란 말이 유리(verre)란 말과 그 음이 비슷해서 영어권으로 건너올 때 유리구두로 잘못 번역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진짜보다도 더 널리 퍼지게 되어 이제는 프랑스의 본고장으로까지 역수입되어 「유리 구두」로 정착되고 말았다.본래의 가죽구두보다도 유리구두의 이미지가 신데렐라의 이야기에 더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일단 시가 태어나게 되면 그 언어들은 그것을 낳은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자체의 이미지로 홀로서기를 한다.그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 바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이다.김현승의 시「가을의 기도」에 등장하는「백합의 골짜기」도 마찬가지이다.백합이라고 하면 서구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화병이 아니라 골짜기에 핀 백합꽃이라고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왜냐하면 우리 골짜기에는 진달래나 혹은 할미꽃들만이 피어있는 까닭이다.하지만 서양의 경우라 해도「백합의 골짜기」는 현실속에서도,그리고 시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그 이미지의 근원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오역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골짜기의 백합」은「은방울 꽃」(Lisdes Valles)이라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을 일본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데서 생겨나게 된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여지껏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사생아로 태어난「골짜기의 백합」은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고,김현승의 시「가을의 기도」에 와서는 아주 절묘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는 공자가 보며 크게 탄식했다는「골짜기의 난초」(난향유곡)가 되었거나 혹은 백합의 경우라해도 성경에 있는 구절대로「들에 핀 백합」이었을 것이다.더구나「가을의 기도」에서「백합의 골짜기」는 단순한 장식적 은유가 아니라「굽이치는 바다」와「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를 잇는 중요한 매개공간으로,눈으로 볼 수 없는「영혼」을 가시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굽이치는 바다」란 말은 시인 자신의 말대로「겸허한 모국어」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법에 잘 맞지 않는 표현이다.냇물이나 산맥이라면 몰라도 넓고 편편한 바닷물은 굽이친다고는 할수 없다.그리고 연극이나 소설의 경우라면 대단원에 해당되는「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처럼」은 누가 봐도 진부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합의 골짜기」가 끼어들면 거짓말처럼 그 모든 시구들은 갑자기 새롭고 긴장된 이미지로 살아난다.「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다다른」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지막 시행들은 시인의 내면속에서 변화해 가는 영혼의 모습을 세단계의 은유적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그 영혼은「바다→골짜기→마른 나뭇가지」의 순서로 공간을 옮겨가면서,그 단계마다 영혼의 모습은「파도?(바다)와「백합?(골짜기)과「까마귀?(마른나뭇가지)로 변신한다.넓은 바다는 좁은 골짜기로,골짜기는 다시 앙상한 나뭇가지로 면에서 선으로 이동하면서 축소 되어 간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평의 바다가 점차 수직화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골짜기가 되고 이윽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다. 물론 그 공간에 자리한 대상물들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변화해 간다. 바다의 영혼은 파란색 파도로 굽이치고(그렇다.바다가 골짜기의 백합과 연결되었을 때만이 굽이치는 바다의 시적 일탈성은 허락된다). 골짜기의 영혼은 백합처럼 흰빛으로 조용하게 피어난다.그리고 그것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르면 바다의 파도들은 날개를 접은 까만 까마귀가되어 정지된다.그러니까 영혼의 색채는 청­백­흑으로,그 움직임은 동­부동­정으로,그리고 상태는 무생­식물­동물로 변모해 가고 있는 과정을 읽을 수 있다.물론 우리는 그 패러다임 읽기를 통해서 푸른 바다에서는 봄(젊음)의 영혼,골짜기에서는 하얗게 정화해가는 여름(노장)의 영혼,그리고 이윽고 마른 나뭇가지에서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있는 영혼의 사계절을 보게 된다.그리고 움직임도 넓이도 색채도 모두 떨어져 나간 가을의 영혼이지만,그것이 다다른 곳은 바다와 골짜기보다 훨씬 높은 수직의 자리 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영혼의 위치야말로「홀로 있게 하소서」의 마지막 고독에서 얻어질 수 있다.
「가을의 기도」는 그 형식만 3연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기도의 패러다임도 역시 세국면으로 구성되어 있다.첫연의 가을은「기도하게 하소서」로 기도하기와 시쓰기를 위한 모국어(언어)에 대한 욕망을,가운데 연의 가을은「사랑하게 하소서」로 시간에 대한 욕망을,그리고 마지막 연의 가을은「홀로 있게 하소서」로 고독한 영혼에 대한 욕망을 나타낸다.가을의 욕망을 나타내는 이 세가지 패러다임은 단순한 공간적 비교 축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비교축으로도 전개되어 있다.처음 연은「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로 초추를,가운데 연 은「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로 중추를,그리고「마른 나뭇 가지」의 마지막 연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만추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가을의 기도는 마지막 연에서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
첫째연과 둘째연은「가을에는 …하소서?로 시작하여 역시「…하소 서」의 종지형으로 끝낸 완벽한 병렬형식으로 되어 있으나,마지막 연만은 같은 병렬구조를 지니면서도 도치법을 써서「하소서?가 아니라「까마귀처럼」으로 끝맺음으로써 그 틀을 깨고 있다.형식만이 차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첫연의 기도하기­시쓰기는 모국어라는 대상이 있고,가운데 연의 사랑하기는「오직 한 사람만」이라는 뚜렷한 대상이 있다.하지만 마지막 연에는 그런 목적 대상이 없다.마른 가지위의 까마귀처럼 절대 고독의 내면 세계만이 존재한다.끝연은 첫연과 가운데 연과 대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1,2,3연의 전구조를 그 내부속에 복사해 놓은 프락탈 구조로 되어있다.즉 1연의「기도하기­시쓰기」는 굽이치는 바다에,그리고 가운데 연의「사랑하기」는 골짜기의 백합에,그리고「홀로 있기」는「마른가지 위의 까마귀」에 대응한다.
「가을의 기도」는 시와 종교(유일자에 대한 사랑)를 거쳐 최종적인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과정을 성숙과 조락의 가을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가을의 기도」에는 봄의 바다와 여름의 백합,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인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로 삶의 사계절이 내포되어 있다.첫연의 낙엽과 마지막 연의 고목 사이에는 백합 꽃이 피어 있는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백합과 까마귀의 절묘한 결합으로「가을의 기도」는 비로소 높은 음자리표를 지닌 화음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다.그래서 김현승의「가을의 기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음성을 너무 닮았다고 나무라서는 안된다.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골짜기의 백합」처럼 오히려 오역의 경우가 보다 아름다운 시의 이미지를 낳듯이 릴케의 기도를 닮았다해도 이미 김현승의「가을의 기도」는 홀로 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혼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

 

 

김현승(金顯承)
남풍(南風), 다형(茶兄)
1913년 광주 출생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중 교지에 투고한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
1937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1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1960년 숭전대학교 문리대 교수
1973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5년 사망
시집 : 「김현승 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 고독」(1970), 「김현승 시전집」(1974), 「마지막 지상에서」(1977), 「김현승의 명시」(1987),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9)


다음시

 

민족의 명시 76 - 김현승의 [ 절대 고독 ]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내가 만지는 손끝에서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무한의 눈물겨운 끝을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 절대 고독 > 김현승우리 현대시사(現代詩史)에서 시인의 시예술활동이 동시에 윤리적 차원의 의식이 시작활동 이전 이후를 불문코 이만큼한 결정(結晶)을 김현승 시인 말고 본적이 없다.

"고독(孤獨)은 인간에게만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이 시에서의 고독은 절망적인 고독이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 있는 고아와 같은 고독' 이며 고독을 표현하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예술의 활동이며, 윤리적 차원에서 참되고 굳세고자 함이다."<플라타너스> 에서 <가을의 기도> 로, 그리고 1965년 <견고한 고독> 이 마침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그 끝 1970년 <절대 고독> 에서 입을 다물고 만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도달한 神과의 대면, 그 합일의 문에 화자가 섰는 시간이다. -"盡人事待天命""Learn to labour and wait."애초부터 고독이 존재하는 것의 태생(胎生)이었다면 지금의 이 `절대 고독` 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것. 차라리 고독의 관념, 무유(無有) 유무(有無)의 개념 그것까지도 부정하는 형이상(形而上)의 초월적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여태까지의 화자의 그 모든 것은 마침내 퇴색하고 시들해 의미가 없다. "이제 나는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그리고 -.

나는 내게서 끝나는무한의 눈물겨운 끝을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그동안 살아온 시인의 역정. 화자의 자조(自照)가 마치 1930, 40년대의 SP판, 그 쇠바늘 끝에서 신음하는 유성기처럼 가락이 연민이다. 그런 자기연민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끝자락이고 보면 이제는 궁극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최종 - 지고(至高) 지순(至純)이다.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시인의 시를 보아라! 그 어느 한 곳에도 구절 구절 현란하기가 아름답기만 한 미사여구가, 연금술사적인 연마 조탁이 있는가! - 때묻지 않고 소박하기만 한 어머니의 언어. 금방이라도 뉘우치고 기도하는 평상시 소탈한 표백(漂白)의 언어들의 마지막. 침묵으로 닫는 묵상의 향연! - 그것은 열번이고 백번이고도"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가." 아니지 않은가.


김영환 기자

- 2002년 12월 13일(금) 오후 6:02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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