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이렇게 쓴다! --- [이성선] 시·우주·삶이 하나로 가는 길
포엠토피아에서 옮깁니다.
[이성선] 시·우주·삶이 하나로 가는 길
시는 내게 있어서 우주 그 원초적 생명에 다가가는 길, 그래서 그와 하나가 되는 일, 즉 나와 우주의 합일을 꿈꾸는 삶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또 내게 있어 시 쓰기란 단순한 그것 자체를 넘어서서 내 삶을 우주 차원 그 높이까지 올려 놓고자 하는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자연과 보이지 않는 별 저 너머의 살아 숨쉬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간 자연이란 인간과는 아주 다른 삶을 영위하는 세계, 만물의 영장 압장에서는 인간의 삶을 위하여 얼마든지 이용하고 파괴하여도 되는 그런 하등의 세계 그러면서 늘 저쪽에 있어서 우리가 괴로울 때 도피처로 삼는 세계쯤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자연, 즉 우주는 그것이 아니다. 나이면서 내가 모르는 나,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찾지 못하고 있는 본래의 나, 나의 존재이거나 나와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로 존재하는 것 근원적 고향 그것이다.
자연은 열려 있다. 그리고 신성하고 고결하다. 자연이 열려 있는, 살아 숨쉬며, 느끼고, 말하고, 말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받으면 가슴 벅차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은 이미 생물학자들을 통하여 부분적으로나마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상태에 대하여 인간과 다름없이 반응을 한다.
자연이라는 이름 속에 살고 있는 동식물의 각각은 모두 하나로 꿰어진 구슬과 같은 존재이며 인간이 결코 그 구슬에서 예외일 수 없다. 가령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하자. 그러면 지상의 존재들은 일시에 가슴을 울렁이며 마음 설레 한다. 사람은 이 보름날이 되면 감정이 고조되어 술을 많이 마시게 되고 폭력 행사의 회수가 많으며 교통 사고율이 다른 때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여성들은 흥분하여 남자들의 구혼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때도 이때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바다 속의 게들은 그의 몸 속에 살이 다 빠져나간다. 아마 탈바꿈을 하거나 자신의 보다 다른 삶을 위하여 그간 저장해 놓은 양분을 다 써먹고 있다는 뜻이리라.
또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외국의 어느 식물학자는 나무가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어떤 변화를 실제로 보이는가를 관찰하기 위하여 나무에 청진기 같은 기기를 설치하고 30년간이나 나무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소리를 살펴 들었는데―이런 그의 생애는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그래서 부러운 시인의 삶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나무와 가슴을 맞대고 그 숨소리와 하나가 된 진인이리라―그의 기록에 의하면 나무는 보름달이 뜨면 일제히 흥분하여 감정의 곡선이 높이 올라가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것이 어디 나무나 사람이나 바다 속 게 뿐이랴. 풀벌레, 짐승의 내적 울림이 그러할 것이고 우리가 살아 있지 않다고 믿는 물 바위 그외 모든 것들이 그 방향과 정도는 일정치 않더라도 비슷하거나 같을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이 서로 같은 리듬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예는 한도 없이 많다. 살아 있는 생명들의 깊은 중심에 숨겨져 있는 핵심은 성적 숨결이다. 이들은 창조적 본능으로 표현되어 대를 이어가는데 이들의 창조적 본능은 어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과 또 사람 주위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동물(이른바 가축)들은 이상하게도 한 리듬에 꿰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리듬은 7일이라는 숫자나 3일 이라는 숫자다. 또 이 7일이라는 숫자는 알고 보니 내가 인식하기 이전에도 서양의 몇몇 사람들이 이미 비슷하게 주장해 온 바 있다. (괴테는 특히 3일에 역점을 두었다 함)
가령 소의 생리 생식의 발정 주기(한번 발정을 했다가 다음 발정하는 기간)는 21일이
다. 그런데 돼지의 생식 주기도 역시 21일이다. 사람은 28일이다. 염소나 양은 역시 21일로 비슷하다. 그런가 하면 토끼는 7일이며, 달걀은 21일만에 오리나 칠면조는 4주만에 거위는 6주만에 새끼가 알에서 부화한다. 아주 간단한 예이지만 어떤 유의성이 있으며 십자매 카나리아 일홍조 등은 14일만에 부화한다. 거개가 일주일, 즉 7일을 최대공약수로 한다. 이 7은 무지개의 일곱 색, 기독교의 일곱 봉인, 힌두교의 일곱 천신들, 페르시아의 일곱 압샤스팬즈, 불교의 일곱에 일곱을 곱한 49일재, 더욱 분명한 1주일의 7로도 나타난다. 더구나 이 7일은 기독교에서 우주 창조의 '창조'와 관계되는 것으로 분명 생명 창조인 '宇宙律'과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인류 역사상 수많은 노사분규가 일어났으되 일주일이 너무 길다든가 짧으니 이를 바꾸어 달라는 요구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서양에서는 7이라는 숫자를 길한 숫자로 정하고 있지 않은가.
또 다른 예 하나를 들어 보자. 뉴욕의 한 고위 경찰관으로 거짓말 탐지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거짓말 탐지기 실험을 다른 동식물에 적용해 보려고 자기 사무실에 잇는 화분의 화초에 그것을 설치하여 실험해 보았더니 그 화초는 사람과 거의 같은 반응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가 그 기기를 설치한 후에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기기의 침이 별로 움직이지 않다가 그가 이 식물의 잎사귀를 태우는 고문을 시행하여 보려고 마음 먹은 그 순간 거짓말 탐지기의 지침이 갑자기 떨리며 높은 감정의 곡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그가 다시 그 식물 옆에 끓는 물을 놓고 살아 있는 새우를 가져가 그 끓는 물에 한 마리씩 떨어져 죽는 순간마다 탐지기의 지침이 강한 동정심의 반응을 보이면서 떨렸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면 모든 생명의 리듬은 하나로 꿰어져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다른 사물과 우리 사이에는 열려서 서로를 듣고 느끼고 대화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이를 모를 뿐이고 이것이 바로 닫혀진 인간의 무지요 슬픔인 것이다. 따라서 우주 전체 생명은 모두 하나로 열린 한 생명이므로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일 뿐이다. 내가 작은 몸, 작은 영혼, 작은 리듬이라면 너라고 하는 자연 우주 전체는 큰 몸, 큰 영혼, 큰 리듬이다. 내가 나만을 알 때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전체를 알 때만이 진정 나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나 자신만(인간 자신)을 노래한다면 나를 노래한다고 볼 수 없다.
진정한 나의 노래란 바로 전체 삼라만상의 마음을, 영혼을 노래할 때 나의 마음, 나의 영혼을 노래하게 된다.
그러면 나 아닌 전체를 노래하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주와의 합일이다. 나의 영혼이 저 위대한 우주 영혼과 하나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나의 리듬이 그 우주 생명과 일치하도록 명상적, 선적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생각이나 상상만으로는 여기서 불가능해진다. 몸으로 해야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삶 전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표현 방법은 어디까지나 서정적 언어라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계속 강조해 왔듯이 우주는 리듬이고 이 리듬을 문자로 옮길 때에는 서정적 언어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큰 세계, 즉 초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선악·미추·호오·생사의 경계를 뛰어넘어서 하나이면서 둘이 세계, 이 화엄의 세계를 호흡할 때만이 열린 시, 위대한 시가 떠오르리라 믿는다.
너무 거창하게 그리고 관념적으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느끼며 또 체현해 나가려는 시의 길이다. 이런 뜻을 담으려고 애쓴 졸시 한편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산길은 산이 가는 길이다
나의 몸은 내가 가는 길
모자 쓰고 저기 구름 앞세우고
산이 나설 때 그 모습 뒤에서
길은 우레를 감추고 낙엽을 떨군다.
산의 가슴 속으로 絃처럼 놓여서
바람이 걸어가도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도 자취를 숨긴다.
그것은 또 소 뿔에도 걸리지 않는
달이 가는 길
바람에 씻지 않은 발은 들여놓지 않는다.
귀와 눈이 허공에 뜨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눈 오는 저녁을 간직한다.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산길」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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