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11월 초순.
책상 위에 고만고만한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무늬가 다양하고 색깔도 가지가지인 고급스런 포장지로 싼 걸 보니 필경 예사롭지 않은 물건일 것 같았다.
포장마다에는 서투른 글씨로 제 이름들을 썼는데. 그 수가 꽤나 많다.
뜯어보니 모 재벌 그룹 산하 제과 회사에서 만든 과자들이다.
가느스름하고 유난히 길쭉하면서 동그란 그 과자의 아랫도리는 대부분이 노랗고 머리 쪽만 약간 갈색인 상태로 보건데 아마도 비용을 덜 들이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 같은. 얄팍한 상술이 눈에 훤히 뵌다.
이걸 보는 순간 작년 요맘때의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생각났다.
어느 날인가 가게에서 이 과자만 골라 순식간에 동이 났는데, 평소 행동이 굼뜨거나 소식이 늦은 아이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머지 이걸 사 내라고 조르는 바람에 부모들이 한바탕 곤욕을 치른 것이다.
별것도 아닌 과자를 갖고 왜 이런 소동을 벌여야 했을까.
아이들 말로는 또 다른 과자 이름을 붙인 기념일도 있다고 한다.
그 역시 어느 재벌에 속하는 회사에서 만든 과자란다.
상술이 빚은 우스운 소동이다.
이 두 과자 회사는 묘하게도 각각 프로 야구단을 거느리고 있다.
근거도 없고 내력도 분명하지 않은 기념일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외제 14일 시리즈를 어디 한번 들춰보자.
2월 14일. 발렌타이 데이. 여자가 남자에게 특정 과자를 주면서 사랑을 고백한다.
3월 14일. 화이트 데이. 발렌타이 데이에 대한 응답의 뜻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달콤한 사탕을 선물로 준다.
5월 14일, 로즈 데이. 장미를 주고받으면 사랑의 싹을 키운다.
6월 14일, 키스 데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입맞춤을 주고받는다.
7월 14일, 실버 데이. 은반지를 교환하면서 장래를 약속한다.
8월 14일, 뮤직 데이. 연인끼리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춘다.
9월 14일, 포토 데이. 추억에 남을 만한 사진을 찍는다.
10월 14일, 와인 데이. 포도가 무르익는 가을에 포도주를 마시면서 은밀한 사랑을 속삭인다.
11월 14일, 무비 데이. 연인이 함께 야한 영화를 본다.
12월 14일, 머니 데이.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넉넉하게 쓰며 어깨를 잰다.
지루하지만 일일이 쳐든 까닭은 줄거리가 어떻게 벋어 갔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달콤하고 콧구멍을 야릇하게 자극하는 과자를 주며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해서 1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드디어는 뜻한 바를 이루고야 만다는 이야기다.
반면 사랑을 구하지 못한 외짝들의 기를 죽이는 기념일도 있다.
4월 14일, 블랙 데이. 사랑을 받지 못한 남녀들끼리 모여 자장면을 먹는다.
5월 14일, 옐로우 데이. 1년이 넘도록 짝을 구하지 못한 외짝들이, 인도를 고향으로 가진, 묘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먹는다.
이 음식의 색깔이 노랗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 음식을 팔기 위해 이런 기념일을 만들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닭과 달걀은 어느 것이 먼저 태어났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짓처럼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행동과 같을 것으로 여겨진다.
6월 14일, 레드 데이. 옐로우 데이에도 커리스 라이스를 먹지 못한 외짝들이 모여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홍당무 섞인 음식을 먹는 날이다.
7월 14일, 이 기념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린 데이가 있는데, 외짝들이 펼치는 마지막의 눈물 파티로, 특정 소주를 죽도록 퍼마시는 날이고, 다른 하나는 블루 데이로 청산가리를 술에 섞어 마시고 함께 세상을 하직하기로 작정하는 날이다.
전자의 아름다운 기념일과는 달리 후자는 너무 살벌하고 섬뜩한 느낌까지 주는 기념일이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기념일도 있다.
1월 14일부터 시작해서 12월 14일이 되어야 끝나는 기념일이다.
1월 14일이 되면 양초에 불을 붙여 나의 빛이 되어 달라고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해서 12월 14일이 되면 선물 담는 데 쓰는 양말을 주고받는데, 1년 내내 사랑을 고백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에는 과자를 필두로 해서 자장면과 장미꽃에 안개꽃과 자기 목소리를 담은 녹음 테이프,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100번이나 쓴 편지와 가슴 복판에다 복숭아 표식을 단 인형까지 동원하고, 이 과정에서 입맞춤은 필수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이런 기념일은 언제부터 왜 시작되었으며 그 근원은 무엇일까.
보릿고개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있었고, 내전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기아와 질병이 떠나지 않는 후진국에도 있으며 허기를 달래기 위해 꽃제비라는 기상 천외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선이 되고 있는 강을 넘나드는 땅에도 있을까.
우리에게 있어 보릿고개 추방이 지상 명제였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념일들이다.
생일도 제대로 찾아 먹을 형편이 못되었으니 사랑을 속삭이겠다고 기념일을 따로 만들어 선물을 교환한다는 호사는 턱에도 닿지 않는 사치였고, 기껏 기념일이라고 해 봤자 선친들의 제사가 아니면 집안 웃어른 생신이 고작이었으며, 국가적으로 국경일이 모두였다.
내전과 흉년으로 기아가 산천을 풍미하고 질병과 폐쇄된 정치 체제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한 상황이니 1년 내내 기념일을 챙길 경황은 없으리라.
그러고 보니 결국은 경제적인 여유가 기념일을 늘린 셈이고, 상술이 덩달아 부추긴 결과로 낙착이 된다.
이 상술에는 일본의 얄팍한 상혼이 바탕에 깔린 흔적이 다분하나. 특정 종교에 의해 형성된 문화가 유입되자 이걸 무분별하게 수용한, 단편적인 사고 방식이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금요일과 13일을 철저한 증오와 금기의 대상으로 여기는 외래 문화가 우리에게서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상업적인 냄새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14일 시리즈에만 매달려 천방지축으로 헤맬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정서에 맞는 15일 시리즈를 만들어 줏대잡이로 삼으면 어떨까.
14일 다음이 15일이니 이 날을 음력으로 바꿔 달 밝은 훤한 밤으로 날을 잡은 다음, 은근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우리 음식을 곁에 두고 구름이 살짝 얼굴을 가리는 틈에 사랑을 주고받을 일이다.
(2004年 7月 31日 發行. 拙著 第2 隨筆集 “벽오동 심은 뜻은”에서 全文 옮김-著者)
*출처 : 목포문인협회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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