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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4강-대상에 대한 표현.4

시 창작 교실

by 백연심 2007. 4. 1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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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09일 강의내용


여기 목포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모두 그런가요?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우리들의 생활리듬이
잘 조정되어야지요. 말하자면 빨리 이 변하는 계절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되니까요.

오늘은 어제 시간에 이어서 대상에 대한 표현 네번 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4) 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께 강의하면서 "낯설게 하기"란
문학적 용어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 등이 주장한 문학비평용어인
데요. 쉽게 말하면 문학의 표현은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을 피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접해서 익숙해져버린 표현은 아무의 관
심도 끌 지 못해서 좋은 글이 안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래서, 새롭고 참신한
맛을 느끼게 하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을 찾아
내야 합니다.

쉬클로프스키 이론을 보면 낯설게 하기를 세가지로
나누는데 그 첫째 이론을 보면 "낯설게 하기는 어떤
다른 양식에러부터라도 문학, 즉 순전히 문학적인
체계로 가려내는 방식으로 쓰인다고 했는데 이 말은
문학이 아닌, 철학이나, 신문의 사설이나, 광고물이나
과학의 설명이나 이런 것들과 문학이 다른 점은
그 사용하는 글이 문학적이어야 한다. 즉 누가 읽어도
참신하고 독창적이며 상투적이거나 관습적이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해도 다른 사람이 쓴 표현을 그
대로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볼 때 초생달이 꼭 눈섭같이 생겼
어도, 그 표현은 옛부터 많이 써서 참신하지 못한 것
입니다.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손, 마늘쪽 같은 코,
뭐 이런 표현은 이미 많이 써서 진부한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면 좋은 시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말, 아직 발견하지 못한
표현을 자기만의 눈으로 찾아내야하는 것입니다.

옛날 강의하고 조금 중복되는 감이 있습니다만.
복습하는 차원에서 다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만을 기계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므로
사물은 더 이상 새롭거나 경이롭지 않지요.
나는 이미 별 것으로 보지 않는 물건도 집에 찾아온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있
습니다. 사실 내가 구할 때도 그렇게 좋아서 구했지만
늘 보면서 그 사물에 대해 자동화되고 관습화된 시선
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말씀 드렸듯이 목포에 처음 오신 분들은
유달산에 올라가면 무엇이 신기해서 자꾸만 저 것이
무엇이냐, 저기가 어디냐, 하며 감탄을 하지만
목포사람들은 이미 그 풍경이 자동화 관습화 되어 있어
아무도 신기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말을 맞아 바람쏘이로 가는 곳도, 새로운 곳
에 가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시로 쓰이는 단어들이
새로운 것이어야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지요.
그런 간단한 이치입니다.

여기서 천양희님의 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 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 진 어머니,.

조태일님의 해설을 여기 덧붙이니 한번 들어보십시오

"예로부터 하늘에 걸려 있는 둥근 보름달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이 되곤 했다. 세상 만물을 두루 감싸
안듯 둥글고 넉넉한 모습과, 삼라만상을 어린 새끼로
여기며 가슴에 품어 젖을 물린 것처럼 부드럽게 흐르
는 달빛은 영락없는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위의 시 역시 달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믐 달에서 가슴이 닳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은 시인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
즉 "가슴닳아/만월의 채 반도 못 산/달무리 진 어머니"
라는 구절은 새로운 그믐달에 대한 표현으로 아주 개성
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또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와 대비해서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하는 표현을 씀으로서 마치 팽나무에
달이 창백하게 걸린 것처럼, 내가 어머니의 가슴에
대롱대롱 내 걸린 달처럼 항상 어머니의 가슴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은 이 시인 외에는 아직도 전무 후무합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하지요.


자, (목을 가다듬고) 다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박라연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어 꽃눈을 튼다.
터서는 1백일 지지 못해
향기로운 혀 내밀고 서 있다.
밤이면
하얀 뿌리털 잘게 흔드는 한숨 소리
떠날 날을 미리 알고
한 점 벼랑에서도 대를 잇는 뿌리들아
이 땅의 잡초보다 처절하구나
숨진 네 그리움의 뿌리를
풀이끼로 포근히 감싸준 그날
삐죽이 고개 내민 새끼 촉 하나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사랑하므로
헤어져 사는 너희들은

여러분 중에 풍란을 길러보신 분들은 아주 실감이
생생할 것입니다만 모른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을
드리지요.
풍란은 남쪽 섬의 해안가에 많은데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소엽풍란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대엽풍란
이라하는 것은 학명으론 나도풍란이라 합니다.
그들은 기근(氣根) 즉 공기중에 뿌리를 내서 거기
에서 질소를 흡수하는 특이한 식물로 바위나 나무
등에 착근하여 산답니다.


풍란(소엽풍란)

나도 풍란(대엽풍란)

위시에서 우리에게 탁 뛰는 표현이 몇 군데 보입니다.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

이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해 꽃대가 하얗게 올라오는데
그 것을 긴 물관부로 보고, 아주 간절히 목이 마를 때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는 표현을 썼는데
저의 약국에도 풍란이 있습니다만 이런 좋은 표현은
생각지도 못해보았지요.
또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새끼를 치는구나 사랑
하므로/헤어져 사는 너희들은"이라는 구절을 보면
참 기가 막힌 표현이지요.

좋은 시 또 한 편 감상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한 부분은 지금 기성 시인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늘 목표로는 삼되 당장에 그런 표현을 찾지 못함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것은 수 년 내지 수
십년을 노력하고 공부해야 겨우 이룩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선님의 를 한 번 읽어보시지요.

암자 안에 바다를 다 잠글 수 있다면
내 주머니 속에 바다를
감추고 떠돌 수 있다면
저 無音의 山노래가 더 잘 들리리.
오늘 아침에 가까이 설악이 또
구름의 옷고름 풀어
내게 속가슴 보이는구나.
여기 오래 앉아 있으려 하였으나
다시 떠나야겠다.
사람 없는 곳에 사람을 찾아
소리 없는 곳에 소리 하나 찾아
산아, 너의 무반주 노래
너의 무반주 육체 속에
하룻밤 파계로 일박.
그래도 못찾으면
더 멀리 떠돌다가
어느 산노을에 감추어진
작은 꽃잎 속에 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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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여러가지 문예비평이론 중
에서 "낯설게하기"이론을 윤석산 교수님의 글을 옮깁니다.
문예비평이론은 너무 어려워서 외울 필욘 없구요.
그냥 한 번 읽어보시기만 하시고
필요하신 분을 잘 기록해두시기 바랍니다.

[낯설게 만들기와 이미지 및 은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초기에 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차츰 시선을 산문 쪽으로 옮기면서 문학의
일반적 특성에 관심을 둔다. 슈클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에서 시의 모든 요소와 기법은
시인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독자의 습관적 수용에 충격을 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서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
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보 전달을 위주로 하는 산문에서
은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 반면에 시에서는
미적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낯설게 만드는 것이 목적
이라면서 와 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시의 운율도
실상 무미건조한 생활 언어의 억양을 일그러뜨려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는 수단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t)'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는 견해를
편다.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은 우리가 모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해준다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또는
낯선 정신 세계를 단번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의 경제적 전략임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낯익음', '친숙성'은 '자동화(automatization)'으로 이어져
탈언어화(脫言語化) 다시 말해 기호화(記號化)된다는 생각
에서 비롯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며,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
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슈클로프스키는 이 기법이 실험적인 작가들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원칙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과 평화}
에서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무대장치를
'페인트칠한 마분지 조각들'로 묘사하고, {부활}의 미사
장면에서 성병(聖餠)을 '조그만 빵 조각'이라고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 지적한다. 그리고, ≪홀스토머≫(Xolstomer,
말이 화자인 일인칭 화법으로 씌어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에서 말의 주인과 그 친구들의 변덕과 위선을 말(馬)의
시각에서 보고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위선성을 새롭게
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톨스토이는 낯설게 된 사물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서, '사물을 낯설게 만든 것은 사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사물을 끊어 정말로 필요한 것-어떤 도덕적 가치-을
훨씬 더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돌을 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낯설게
된 사물을 배경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비판을 한 것은
슈클로프스키는 사물의 새로운 지각만 강조하고 그를 통해
표현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제거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야콥슨도 회화를 예로 들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편다.
그는 그림 같은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나, 삼차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인위적 방법을 채택하며,
그 그림의 박진성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관습적 방식이 계속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문과 같은 '표의문자'로 바뀌어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이그려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강하게 지각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poetic quality)에 대한 정의는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 만들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시가
를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가 있다면, 슈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와 간의 관계로 설명하여,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
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며 부정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형식주
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어느 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설은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희곡에서
'소외(疏外)의 기법'을 사용한다. '소외의 기법'은 종래
연극의 경우 관객을 작품 속으로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작품이 진행되는 도중에 이것이 연극임을 강조하여
몰입과 동화를 막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따져보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법을 말한다.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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