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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상의 생활, 일상의 언어 ----이향아

백연심 2007. 4. 2. 12:04
일상의 생활, 일상의 언어
 

이향아               
         

  얼마 전 시집을 내기 위하여 교정을 보다가. 같은 어휘가 여러 편의 시에 중복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심 놀랐었다. 놀랐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낭패감을 느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하기야 이러한 경험은 비단 이번뿐이 아니다. 첫번째 시집을 묶을 때는 첫번째여서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두번째 시집을 정리할 때는 '문풍지 우는 소리'라는 말이 의외로 많은 데에 당황했었다.
  '문풍지 우는 소리'란 비교적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 말이기 때문에 두어 작품에서만 보인다 해도 크게 두드러질 텐데, 서너 작품 이상에서 그 말이 나오니까 여간 맥빠지고 염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더니 세번째 시집에서는 '무지한'이라는 형용사가 남발되고 네번째에서는 '독'이라는 말이 애용된 것이다. 
  아예 제목이 <독>이라는 시도 있는데 그 시의 내용에 '독 속에 갇힌다'느니, '미각을 잠재울 독을 섞는다'느니, '독이 있는 쪽으로 허리를 굽힌다', '사랑이여 네가 그중 독하고도 또 독하다' 등의 말이 나온다. 너그럽게 생각해서 제목이 <독>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되겠지. 그러나 그밖의 시에서도 '독한 마음 먹고', '그중 독하다', '혼백의 독기', '독바늘', '독한 술' 등 아무튼 독이라는 말에 애착을 가진 흔적이 역력하였다.
  나의 경우 시집은 대개 3년 내지 5년의 간격을 두고 내게 되는데, 그 3-5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히 시집 한 권을 묶을 만한 시가 쌓이는 기간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일종의 궤도로서, 내 정신의 싸이클에 담긴 의식의 빛깔까지 설명해 주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나를 지배하는 어휘가 무리를 형성하여 대기 속에 떠돌다가 지나가고 또 다른 무리가 떠돌다가 지나가는 필연적 시간의 순환.
  그리고 내 경우 이 순환은 '문풍지 우는 소리'에서 '무지한'으로 '무지한'에서 다시 '독'으로 점점 강렬해지고 절박해졌으며 자극적인 것이 되었다. 독의 한 복판에 서 있다가 이제는 죽음이 언급되거나 참회가 불려 나오거나 아무튼 결판을 내는 말이 나와야 될 것 같고, 아니면 아예 급강하하여 시냇물 소리 같은 냉정과 침착을 되찾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빨랫줄에 나부끼는 하얀 빨래, 설겆이통의 비누방울, 아침밥을 먹고 대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 아름다운 색깔들, 문득 잡은 친구의 따뜻한 손, 이러한 사소하고도 시시한 것들이 나를 감격시킨다.
  나는 시를 감격으로부터 출발시키기 때문에 내 시는 그 소재들이 모두 사소한 가상다반(家常茶飯)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 속에 잠복해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주변에서 그러한 일상사를 제외한다면 내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가끔 시의 내용, 시의 사상, 시의 철학성을 강조하는 시를 읽는다. 또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시가 차라리 경직되고 생경한 사상의 덩어리가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도 있다. 그래야 위대한 것이며 세기를 흔드는 선각의 종소리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이미 시의 영역을 떠난 것이다. 시는 의미가 아닌 느낌으로 와야 한다.
  시가 윤리나 도덕을 강조하고 국가나 사회를 선도할 사상을 부르짖는 일에 경도하는 것은 시 본연의 일이 아니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서 어떠한 어휘를 남발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다가 후에야 발견하곤 하는 것처럼, 예술에 임하는 태도 역시 인위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노력에 의한 접근은 아니다. 시인이 선택한 어휘는, 시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어떻게 수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시인의 인생관, 시인의 철학이 바로 그 시인의 시를 낳는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좋은 삶에 기초를 둔다. 시인이 영위하는 삶이 시를 발아시키는 토양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내 시가 성실한 삶의 노래이기를 원하며 가능한 한 향일성의 찬가이기를 희망한다. 작고 사소한 데서 기쁨을 찾고 어두움이란 새벽을 기다리는 대기실의 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목숨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도 아니며 한 생애로 끝나는 것도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역시 공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량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싶다. 때때로 어이없는 일에 격분하기도 하고 작은 일로 사람을 원망하며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이것대로 내게 있는 얼마간의 참을성, 얼마간의 미덕과 더불어 나를 솔직하게 유지시키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다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생활 속의 작은 감격, 이것이 내 시의 내용이다. 대수롭지 않은 한 순간의 삶이라도 정성을 다해 수용하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시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다.
  적어도 시인은 그의 인생이나 문학 앞에서 구도자처럼 경건하며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이 '무엇을 표현했느냐',하는 내용의 문제보다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형식의 문제는 소흘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명제이다.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예술의 내용이 아니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의 형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예술의 내용이란 결국 삶과 죽음, 고독과 사랑, 절망과 이상 등 몇 가지 인생의 과제에 직결되는 것이거나 거기서 파생된 것일 수밖에 없고 또 그런 것들은 비단 예술이나 문학의 전유물로서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예술의 형식이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라는 장르를 결정하고, 같은 문학에서도 어떻게 표현했느냐의 표현방식이 시와 소설과 희곡을 구분하게 한다. 단지 구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형식은 그 내용과 어울려 독특한 아름다움을 완성시키고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정화하고 감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격은 바로 예술을 사랑하는 우리의 쾌락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나의 경우 시의 형식에 대하여 그의 무관심할 때가 있다. 한 때는 하나의 어휘를 선택하기 위해 몇 달을 앓기도 하였으나 근래의 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말, 빈병처럼 딩굴어 다니는 평범한 말을 별 조탁도 거치지 않고 그냥 도입하며, 비유도 부분적 표현을 위한 것에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 
  이것은 과연 나의 문학 생명을 위해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으나 다만 지나친 기법의 적용 - '세포적 언어기교', '부분적 뉘앙스에의 집착', '지나치게 여과시킨 정서의 투명함에서 오는 상식성과 진부성' - 이 차라리 더 신선감을 감소시키고 인위적인 교태로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시에서 언어의 선택이나 조탁보다도 리듬에 주의를 두는 편이다. 대체로 시작과정에서 소재와 내용에 따라 리듬이 결정되지만 어떤 때는 리듬이 내용을 선도할 때도 있다. 리듬은 비교적 급한 편인 내 성격이나 맥박처럼 다급한 진폭을 가지고 상승 혹은 하강한다.
  그것은 시마다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회귀 반복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지루한 반복을 탈피하려는 데에 그 존재가치를 두는 것이다. <리듬은 끝없이 창조되어야 한다> 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시의 주변을 맴도는 나의 짐작과 가늠은, 짐작과 가늠대로 두고 나는 가끔 시를 의심하고 나를 의심한다. 내가 시를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나는 드디어 나를 포기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시, 이것은 이 지상의 삶에서 내가 붙잡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구원의 지팡이, 나는 자신의 모습을 준열히 바라보듯 내 시를 읽어야겠다. 그 기쁨보다는 언제나 아픔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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