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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이렇게 쓴다! ---[정진규]

백연심 2007. 4. 1. 20:08

나의 시 이렇게 쓴다! --- [정진규] 원융적 극복을 위하여

 

원융적 극복을 위하여

정진규

한 시대와 그 시대 속의 한 계층인 세대에 따라 저마다의 체험과 정서와 사유가 있고 삶의 방식이 있겠으나, 요즈음 우리 시를 읽다보면 한없는 곤혹스러움에 시달릴 때가 없지 않다.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대체로 두 가지의 형상으로 나를 협박(?)하고 있다. 그 하나는 시가 다시 인생론적 관점으로 회귀하거나 자연이나 전통적 텍스트에 의존하는 원형적 회귀의식을 지닐 때 역시 시다워진다는 포즈이며, 다른 하나는 몽상적 우회와 굴절로 극히 개인적인 비의의 공간을 제시하는 것만이 오늘의 앞선 시의식인 듯 알 수 없는 긴장을 보이고 있는 흐름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포즈에는 각각 문학적 연령이 크게 작용되고 있었다. 문학적 연령이 높을수록 인생론적 관점의 회귀의식이 두드러졌고 젊은층의 것일수록 몽상적 흐름에 훨씬 편중되어 있는 점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에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나이 먹음이 가져오는 체험의 축적과 젊음이 지니는 감수성의 예리함이라고 하는 요인이 작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범박한 논리가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겠으나, 두 개의 흐름이 서로 길항하는 또 다른 기미가 짙게 노출되고 있다고도 보인다. 나이 먹은 층들은 젊은 이들의 그 몽상적 미학을 까닭없음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 산문적 우회의 세계를 의식의 자페적 유희로, 혹은 부정적 애매성의 그것으로 우려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가 있다. 젊은 층들은 또 저러한 그들의 회귀의식을 시의 본질을 옹립하는 생명의 서정시학으로 긍정적인 수용을 하기보다는 평면적 사실성에 덜어지는 복고적인 이완의 세계로 외면하고 있는 눈치들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두 가지 흐름에 다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시의 본질을 위한 나이먹은 층들의 이른바 회귀의식 그 희망의 구조가 외면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절망의 시대일수록 그 극복을 위한 포즈는 어떠한 형태로든 건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대부분 노출하고 있는 대목은 절망을 절망하는 적극적인 갈등과 고뇌가 기피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긴장이 없는 이완의 안이한 도덕적 훈계성을, 그리고 상식성을 넘지 못하게 된다. 젊은 층들의 몽상의 시학이라는 것도 문제다. 그 심층적인 의식의 행간에서 만나는 존재의 여러 빛깔들에서 전율의 신선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몽상은 절망 그 자체로만 들끓는다. 심한 경우는 그로테스크한 죽음의 풍경들만 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일반적인 지시성을 멋대로 무책임하게 해체해버린 비문들로 일관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시의 비의적 초월성의 세계가 아니라 혼돈이다. 싱싱한 원시적 혼돈의 생명적 공간이라면 몰라도 질서가 없는 마구잡이 자해의 파편들뿐인 제어적 기능의 상실구조가 시일 수 없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쪽의 상실이 저쪽에 있고 저쪽의 상실이 이쪽에 있다. 두 세계의 원융적 극복을 위한 길항으로 우리 시가 거듭나는 길이 무엇일까를 고뇌할 필요를 느끼면서 궁극은 나의 시를 생각하고 있다. 삶의 형식과 예술의 형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요즈음의 나의 생각이다. 다만 표출로서의 사실적 진행과 내면적 구조로서의 세계가 이른바 차연(差延)의 관계 위에 놓여 있을 따름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