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입문 7 - 문정
윤오영(1907~1976)
수필문학입문 - 문정
"둘이 마주 앉아, 한 잔 한 잔 또 한잔, 산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고 취하니 조름 오네, 자네도 가려는가. 내일 아침, 심심하거든 거문고 안고 오게나." 이것이 글의 정취다. 단둘이 고요히 잔을 나누니 술잔에 정이 깊고, 술잔에 정이 깊으니 산에 피어 있는 꽃도 하모니를 얻었다. 가는 것도 고요한 정이요, 내일 아침에 오는 것도 고요한 정이니, 거문고 또한 백아伯牙의 정을 실어올 것이다. 얼사덜사 춤추며 마시는 술에서는 주흥은 있어도 주정은 맛보기가 어렵다. 문장도 침착하고 담담한 속에서 정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니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들떠서는 못쓴다. 기상조작寄想粗作, 즉 생각은 기이한데 글은 조잡하다는 말은 아무리 좋은 생각도 조작粗作이 되면 문정을 낳지 못한다는 말이요, 무문농필舞文弄筆이란 말은 글재주만 흥청거려도 글이 못된다는 뜻이다. 초학자들에게는 그런 글이 명문장으로 오인되기가 쉽다. 문정이란 반드시 애절한 감상이나 고운 서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담담한 문장에서 오는 품위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담담하게 가라앉아야 그윽한 정이 고이고, 그윽한 정이 있어야 문장이 방향芳香을 머금을 수 있다. 다시 몇 편의 예문을 놓고 음미해 보자.
가람문선 서
고향에 돌아온 지 어언 여러 해가 된다. 흔히 항간에서는 낙향이라고들 말하지만, 낙향이 아니라 귀향이요, 귀거래 전의 심정에서 옛 보금자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새 소리에 날이 밝아오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송뢰에 해가 저무는 속에 나는 오늘도 담담히 잔을 기울이다가 그만 하루 해를 보내고 있다. 매화도 늙고 보면, 성근 가지에 한두 송이 꽃을 꾸며 족하듯이, 이제나는 허울을 다 떨어버린 한 그루 고매古梅로 그저 무념무상이면 넉넉하다.
회고하면 모두 아득한 옛날, 내 주변을 지켜 주고, 보살펴 주던 친구들의 소식은 이젠 산 너머 오고가는 한 점 구름처럼 내 마음의 한 구석을 지나가는 그림자요, 산골을 흘러 내리는 물 위에 떠가는 꽃이파리들이다.
문득 헤아려 보면 내 나이 이른여섯 해 동안, 기구한 속에서 나날을 보냈고, 쌓아 놓은 학문 또한 제구실을 하지 못한 채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면과스럽기 그지없는 데도 이처럼 지기와 후배들의 알뜰한 정성이 결정하여 그 동안에 기록한 것들 중에서 골라 [문선文選]을 상재上梓하게 되니 한 편 내 옛 얼굴을 다시 대하는 듯도 하다. 다만 이 조촐한 용기에 담을 만한 것들이 못 됨을 한할 따름이요, 그에 따르는 향기가 또한 짙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따름이다. (이병기)
읽어서 담아하고 온유한 문정文情을 느낄 수 있다. 글이 사치스럽지 아니하면서 한 자 한 자 놓을 자리를 그르치지 아니했다. 재래의 전통적인 우리 문장을 계승해서 얻고 다듬어진 고아한 글이다.
가구家具
도연명의 '실허유여한室虛有餘閑' 이라는 시구는 선미禪味는 있을지 모르나 아늑한 감이 적다. 물 떠먹는 표주박 하나만 가지고 사는 디오게네스는 아무리 고답한 철학을 탐구한다 해도 명상하는 미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가구와 더불어 산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골동품이 아니라도 예전 것들이다. 퇴계와 율곡 같은 분이 쓰던 유래 있는 문갑이 아니라도 어느 조촐한 선비의 손때가 묻는 대나무로 짜서 옷칠한 문갑이다. 먹글씨를 안 쓰더라도 예전 벼루와 연적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
세전지기물世傳之器物, 우리네 살림에는 이런 것들이 드물다. 증조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 이런 것이 없는 까닭은 가난한 탓도 있고, 전란을 겪은 탓도 있고, 한 군데 뿌리를 박고 살지 못하는 탓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잘못에도 있다. 유서 깊은 화류장롱이나 귀목반닫이를 고물상에 팔아버리고 베니다로 만든 단스나 금고 같은 캐비넷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오래된 가구나 그릇을 끔찍이 사랑하며 곧잘 남에게 자랑한다. 많은 설명이 따르기도 한다. 파이프 담배불에 탄 마호가니 책상, 할아버지가 글래스턴과 같이 유명했던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더 길어진다. 자동차 같은 것을 해마다 바꾸는 미국 가정에서도 팔라에는 할머니가 편물을 짜며 끄덕거리고 앉아 있던 로커가 놓여 있다. 흑단黑檀, 백단白檀, 자단紫檀의 오래된 가구들,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 안정감을 주며, 유구한 생활을 상징한다. 사람은 죽어도 가구는 오래 남아 있다.
화려하여서가 맛이 아니다. 오래 가고 정이 들면 된다. 쓸수록 길이 들고 길이 들어 윤이 나는 그런 그릇들이 그립다. 운봉칠기雲峰漆器, 나주소반, 청도 운문산 옹달솔,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 두면 뚜껑에 밥물이 맺히는 안성맞춤 놋주발, 이런 것들조차 없는 집이 많다. 가구나 기물들뿐이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공들여 사귄 친구, 오래가도 부서지지 않는 우정,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소모품같이 살아 버리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피천득)
문장이 침착하게 흐르고 있다. 한 마디 한 마디 추가해 가면서 글이 풀려 가며 문정이 점점 깊어 간다. 맨끝에 와서 가구에서 느끼던 정이 활짝 퍼져 우정으로 맺고 있다. 고요하고 그윽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이 이 작가의 수필을 읽고 난 뒤에 말하기를 양주맛 같다고 했다. 양이 적고 마실 때는 맑은 냉수 같으면서 마시고 나면 취하는 향취를 말한 것인 듯하다.
상투설
일전 거리를 나갔다가 아직도 상투를 '보유'한 일위一位 아관광수峨冠廣袖의 시골 노인이 유유히 거리를 활보함을 보고 한편 감탄조차 발하였다. 그래서 상투에 관한 다음의 두 가지 생각.
구한국 말년 단발령이 내렸을 때에, 구습에 젖은 인사와 민중들은 모두 '상투'를 자르기가 싫어 필사의 저항을 거듭했었다. 내가 바로 목도한 실례.
우리 마을에 한 노인이 기어이 '상투'를 고집하므로, 당시 개화파에 속하였던 나의 아버지가 어떤 날 스그머니 가위를 가지고 그 노인이 앉아 있는 뒤로 가서 그의 상투를 싹독 잘라서 땅 위에 떨어뜨렸다. 그 노인이 엉금엉금 기어가서 그 짤려 떨어진 상투를 두 손으로 붙들고, 온종일, 아니 며칠을 연하여 방성대곡하고 있엇다.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거니와, 나는 그것을 회상할 때마다 미상불 고소를 금치 못한다. 아마 상투의 실감이 없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러한 이야기가 일종 고담이나 전설로 들릴 것이다. 이만큼 상투는 오늘에 와서 이미 회한한 역사적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건대 현금의 우리들도 비록 머리 위의 상투는 잘랐을망정 마음 속의 혹은 생활 안의 '상투'를 허다히 가지고 있음이 아닐까? 전근대적, 반봉건적인 무수한 관념, 습속, 사고, 생활방식들, 또한 우리 자신은 아직 옳고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남들 - 특히 선진국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아주 우수꽝스러운 모든 후진성, 보수성 내지 관념성, 비실용성, 모방성, 유행성, 전도, 착오성 등등. 그나 그뿐이랴. 한 걸음 더 내켜 생각하면, 현대의 사람들이 지금 '당연' '무론' '절대'라 생각하는 '것' '방식' 내지 관념 신조들이 뒷날 가서 돌아보면 대개 또 일종의 상투가 되지 않을까? 예컨대 넥타이는 꼭 목 앞에 졸라야 할까. 두에 매거나 혹은 통 안 매게 되지는 않을까? 농사는 꼭 땅에서만 지어야 할까? 수종水種 내지 공중종空中種은? 학교와 가정의 미래의 양상은? 연애는? 전쟁은? 문학과 철학상의 일체의 견해와 주의 주장과 유행은? - 아마 반세기 혹은 커밍 제너레이션에서조차 여러 면에서 수많은 상투가 퇴적될 듯싶다. 그러이게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모두 제 자신의 시대의 상투를 가진다. 그것을 던져 자각하는 자가 이른바 천재요, 선구자요, 위인이다.
우리 선인들이 상투를 완강히 붙들고 놓지 않던 일은 오늘에 와선 물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착오와 완미였다. 시대의 대세와 역사의 앞날에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 당년의 쇄국주의, 또 오늘의 철늦은 국수사상과 함께.
그러나 한편 우리는 그 완미梡迷 중에서도 오히려 지금 한 가지 배울 점이 있음을 반성하고 슬퍼한다. - 그들의 진지성, 선조 오백 년의 일관된 유교사상과 그 교육은 그래도 한말에 와서 약간의 진짜 상투 순교자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과연 그만큼 진지하게 파악하는가? 낡은 전통이 무너진 대신, 새 시대의 윤리와 정신적 '등뼈'는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바람 부는 대로 유행에 따라서 신념과 주체성이 없어, 오늘은 이리로 내일은 저리로 동분서주 광가난무狂歌亂舞하는 현하 우리들의 생활과 사고,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차라리 우리 선인들의 상투를 붙들고 통곡하던 그 완미하나 진지했던 태도에 일종의 경의조차 표하고 싶은 심경이라 할까? (양주동)
묘한 착상이요, 또한 능란한 붓이다. 그러면서도 문장이 결핍된 흠이 없지 않다. 상想을 재워서 가라앉히고, 한 자 한 자 다음어나간 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느낌에 곡진하지 않고 개괄적 표현에 그쳐 때로는 풍자 아닌 만담조에 흐르지 아니했나 생각된다.
조화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나비는 앉지 않고 벌은 오지 않는다. "문文은 정야情也"란 말이 있거니와, 정이 없으면 진정한 독자는 오지 않는다. 비록 대단하지 아니한 소화笑話 일속一束이라도 글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문장에 피를 새기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문장의 코미디언이 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수필문학입문 中>...
출처 : - ☆ 시인의 향기 ☆- http://club.iloveschool.co.kr/po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