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창작강의실

3.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 최승범

백연심 2006. 11. 30. 13:14
 

 

 

웹진 포엠월드 에서 옮깁니다.(www.poemworld.co.kr)

 

3.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최승범


5. 수필의 글감

―감
이란 말이 있다. 재료나 바탕을 일컫는 말이다. 다른 낱말의 아래에 곁들여 쓰이기도 한다. 옷감·물감·사윗감 등의 낱말에서도 볼 수 있다.
―글감
이란 말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제재(題材)나 소재(素材)보다도 한결 더 우리말다운 정감이 돋기 때문이다.
옷감·물감·사윗감과 같은 감에는 한정성이 따르게 된다. 그래, 감을 놓고 골라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쩌면 글감도 시·소설·희곡을 쓰고자 할 때엔 그것이 시·소설·희곡의 글감이 되는가에 먼저 고심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필을 쓰고자 할 때엔 적어도 글감의 선택을 놓고 고심할 필요는 없다.
몇몇 영문학자(Robert W.Babcock, 戶川秋骨, 한흑구)는 수필의 카테고리를 말하며 다음의 5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1. 자신의 경험 또는 고백 따위로 결국 자기반성이 될 수 있는 것.
2. 인생 및 인성에 관한 고려(考慮) 또는 사견(私見)이라고 할 수 있는 것.
3. 일상의 사소한 일에 대한 관찰.
4. 자연, 곧 천지·산천·초목·화훼, 또는 금수·충어(蟲魚) 등에 걸친 것.
5. 세간사(世間事)에 대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등이 곧 그것이다. 수필의 품이 얼마나 넓고 큰 것인가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이만한 품이라면 그 어떠한 글감이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든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 밖에 없다. (金晋燮)

인간성에 관한 것이나 관습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교육·과학·정치·경제·종교·스포츠 등의 모든 방면의 것을 제재로 할 수 있다. (白鐵)

평론(文學評論)의 대상은 문학이요, 수필의 대상은 사유(思惟)의 전영야(全領野―비록 단편적일지라도)인 것이다. (金東里)

등도 수필의 글감에는 한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이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글감이 된다는 주장이다.
요는 어떠한 수필을 만드냐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물론 좋은 수필을 만드는 일이다. 좋은 수필이란 어떠한 수필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참말 좋은 수필이란 일상의 지지한 사소사(些少事)를 사상의 높이에까지 고양하고, 마치 거목의 하나하나의 잎사귀가 강하고 신선한 생명의 표적이 듯이 일상사가 모두 작가가 가진 높은 사상, 순량한 모랄리티의 충만한 표현으로서의 가치를 품어야 한다.

고 한 임화(林和)의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걸인(乞人)을 글감으로 한 수필 한 편을 덧붙인다.

① 며칠 전에 어느 걸인 하나를 보고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② 독일의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르는 ‘시선(施善)이란 걸인으로 하여금 그 빈궁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빈궁상태를 연장하여 주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쩘 확실히 일리가 있는 총명한 말이다. 걸인을 근본적으로 그 걸식상태에서 구하지 않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 분전척리(分錢隻厘)를 급여하는 것은 걸인생활을 연장하여 줌만이 아니라, 비록 걸인에겔망정 용서할 수 없는 인간적 모욕일 것이다.
④ 이론 일방으로는 어디까지 그러하나 그 걸인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만한 방편이 없는 이 불완전한 사회제도가 완전화할 때까지는―완전화한다는 것은 일개의 망상일지는 모르나―고식적이고 불철저하나마 노방에서 기한으로 우는 걸인에게 ‘걸인상태를 연장하는 것이니라’ 하는 엄숙한 주의 표방하에 본 체도 않고 지나가는 것보다는 분동(分銅)이나마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⑤ 인생을 주의와 이론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변영로(卞榮魯)의 「시선에 대하여」 전문이다. 번호는 편의상 붙여본 것이다. ① ②에서 글감을, 쩘 ④에서는 그 글감에 대한 작자의 생각을, ⑤에서는 쩘 ④의 결과로 드러낸 작자의 사상과 모랄리티를 볼 수 있다.
이 짧은 한 편의 수필을 읽은 독자는 잠시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좇을 것인가, 변영로의 말을 좇을 것인가.
여기에 ‘좋은 수필’이 지닌 한 여운이 있다.

6. 긴 수필과 짧은 수필

수필의 길이를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수필 한 편의 원고지 매수는 몇 장이 적당한가의 문제다. 그동안,
―몇 장이어야 한다
고 잘라서 말한 수필론자는 없다. 영국의 수필가요 비평가인 로버트 린스(Robert Lynd)는,
―짧아야 한다 (Short)
고 했다. 소설이나 평론의 길이를 의식하고서의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몇 장의 짧은 글이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이젠 글을 쓰는 시인·작가들도 흔히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원고지 쓰는 일이 줄어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원고지는 일반적으로 20×10의 200자 용지가 통용되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보통 수필 한 편의 길이는 10매 안팎이라고 할까. 신문에서는 7~8매, 잡지에서는 12~13매의 취급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짧게는 이보다 짧은 3~5매, 이보다 긴 15~20매, 더 긴 것은 20~30매의 것도 볼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시선에 대하여」는 3매가 채 못 되는 길이이다. 이 보다 더 짧은 수필 한 편,

밤뒤를 보며 쪼그리고 앉았으랴면, 앞집 감나무 위에 까치둥우리가 무섭고, 제 그림자가 움직여도 무서웠다. 퍽 추운 밤이었다. 할머니만 자꾸 부르고, 할머니가 자꾸 대답하시어야 하였고, 할머니가 딴 데를 보시지나 아니하시나 하고 걱정이었다.
아이들 밤뒤 보는 데는 닭 보고 묵은 세배를 하면 낫는다고, 닭 보고 절을 하라고 하시었다. 그렇게 괴로운 일도 아니었고 부끄러워 참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둥우리 안에 닭도 절을 받고, 꼬르르꼬르르 소리를 하였다.
별똥을 먹으면 오래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줏어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었다. 아저씨가 한 번 모초라기를 산 채 훌쳐 잡아 온, 뒷산 솔푸데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별똥 떨어진 곳/마음에 두었다/다음날 가보려/벼르다 벼르다/인제 다 자랐소.

이는 정지용의 좥별똥이 떨어진 곳좦의 전문이다. 두 장 남짓되는 길이이다. 지난날 산간 마을에서 어린시절을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 이 글에 추억의 정감이 돋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더 많은 추억거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수필의 묘미는 이런 점에도 있다.
여행에서의 견문이나 체험·감상 따위를 적은 기행수필은 책 한 권 분량의 긴 것도 있다. 또한 글감에 따라서는 단편소설과 같은 길이를 필요로 하는 수필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긴 수필이라고 하여 한 편이 40매가 넘는 것은 흔하지 않다. 그 이상 길어지면 짧은 시간―길어서 10여 분간―에 읽고, 긴 여운에 젖어야 할 수필의 묘미를 덜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수필의 길이로 수필의 질적 고하나 경중을 따질 것은 아니다. 긴 수필이나 짧은 수필이나 수필인 이상, 수필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갖추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는 이들은 흔히,
―짧은 수필 쓰기가 어렵다.
고들 한다. 작은 그릇에 큰 것을 담자면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짧은 수필엔 먼저 담고자 한 내용을 몸똥그릴 수 있는 솜씨가 있어야 한다. 솜씨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프랭크린(B.Franklin)은 매일과 같이 신문사설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면서 줄여쓰기로 문장수업을 하였다고 한다.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7. 먼 것과 가까운 것

먼저,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전하는 한 편을 옮겨 본다.

학사 김황원(金黃元)이 부벽루(浮碧褸)에 올라가 고금에 걸쳐 읊어 놓은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시에 나타난 내용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 시를 적어놓은 판목을 불태워 없애고 종일 난간에 기대어 자신의 시를 얻고자 골돌하였다. 그러나 다만, ‘긴 성 한쪽에는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큰 들 동쪽머리엔 산이 점점이 놓였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의 구절만을 얻고 뒤를 잇지 못했다. 그는 끝내 시감이 일어나지 않자 통곡을 하고 내려갔다.
옛날 가랑선(賈浪仙)이란 자가 3년을 두고 읊조려, ‘홀로 못 속의 그림자 따라가며/두어 번 나무에 기대어 몸을 쉬네.(獨行潭底影 數息樹邊身)’의 싯구를 얻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내가 가랑선의 이 시를 보니, 풍부한 감정의 표현도 아니요, 온화한 느낌도 없다. 오히려 난삽하고 고루한 내용이다. 그는 어찌해 눈물까지 흘렸던 것인가.
황원의 싯구에 대해서 늙은 선비들이 늘 말하듯이 그는 어찌하여 이처럼 스스로의 괴로움에 통곡조차 하였던 것인가.

후반부 서거정의 이야기는 제쳐놓고, 전반부 김황원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그는 왜 선인들이 제영(題詠)한 편액들을 불살라 버린 후, 자신의 시작(詩作)도 두 구만을 얻었을 뿐, 그 뒤를 잇지 못하고 말았던 것인가. 그는 너무도 서두르고 과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둘레의 승경(勝景)에 비하여 편액의 시편들이 시시하다는 생각만으로 그것들을 불살라버린 성급함이었고, 첫눈에 든 시야의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고자 한 과욕이었던 것이다. 멀고도 폭넓은 것이 시야에 들었대도 가까이에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가졌어야 했다. 그러므로써, 시행을 잇지 못한 아타까움을 덜 수 있었지 않을까.

문을 달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개를 찾아가는 것, 이 세 가지야말로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신흠(申欽)의 『야언』(野言)에 있는 짧은 한 편의 수필이다. 글 쓰는 사람은 먼저 이러한 즐거움부터를 누려야하지 않을까. 『야언』에서는 다음과 같은 한 편도 볼 수 있다.

초여름 원림(園林) 속에 들었다. 마음 내킨 대로 아무 바위나 골라잡아 이끼를 털어내고 그 위에 앉았다. 대나무 그늘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뭉실뭉실한 구름 모양을 이룬다. 이윽고 산속에서 구름이 건듯 일어 가는비를 흩뿌리지 않는가. 청량감이 다시 없다. 탑상(榻床)에 기대어 오수(午睡)에 빠졌는데, 꿈속의 흥취 또한 이와 같았다.

작자의 서둘지 않는 마음과 더불어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으로 차근차근 옮아간 마음도 읽을 수 있다.
―이건 수필감인데.
하는 생각이 일었다 하여 곧바로 펜을 들 일이 아니다. 펜을 들기 전, 그 수필감이 되는 것에 대한 이모저모를 따져볼 일이다. 그러면서 그것들에 대한 애정을 불지피 듯 지펴야 한다. 애정을 모두어 지피는 일은 먼 것보다도 가까운 것에서부터 지펴나가는 것이 순서다.
누구였던가, 한 작가는 그의 『소설작법』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소설을 쓰고자 한 초심자는 자기자신에 관한 이야기부터 써 보라. 그리고 어버이와 형제, 친구와 이웃으로 넓혀 나가라.

수필을 쓰고자 한 초심자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다. 멀리에 있는 큰 것을 노리기에 앞서 가까이에 있는 작은 것부터 챙기는 애정, 이것이야말로 수필 쓰는 일에 더욱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가, 시인, 전북대 교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