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 자료실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이다 ----이향아

백연심 2006. 11. 27. 15:02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이다
 

이향아               
         

우리는 모두 三流 詩人이다.

  詩的인 표현을 하겠다는 뚜렷한 생각이 없어도, 우리는 무의식중 시에 못지 않는 훌륭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많이 끼었다'라고 할 것을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다'라고 되도록이면 상세히 모양까지 그려 보이고, '오늘 아침에는 안개에 발이 빠질 것 같다'고 보다 감각적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소식이 없다는 말을 '소식이 깜깜하다'라고 하고, 귀먹은 사람을 '귀가 절벽이다'라고 한다.
  염치가 좋은 사람을 '낯가죽이 두껍다'라고 하고, 지나치게 영리하여 어리숙한 면이 없는 사람을 '빠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별명으로 부른다든지, 선거철 구호를 만들어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일, 특별 강조 기간이나 각종 홍보 행사에 인상적인 표어로 대중들의 감정에 어필하려고 하는 일들도 시적인 표현을 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긴 말을 짧게 줄이어 표어나 구호를 만드는 일이나, 말의 고저와 강약에 쏟는 우리들의 애착은 리듬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골 저녁 무렵이면 밖에 나가 노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들린다.
  '철수야아 __! 밥 먹어라아아____'
  이 말에는 단순히 날이 저물었으니 그만 놀고 밥을 먹으라는 의미 이상의 느낌이 있다. 주어와 서술어로만 이루어진 이 짧은 말에는 쉼과 계속이 있고 음절마다 쏟아내는 각기 다른 소리의 양이 있으며, 거기 담겨 있는 정돈된 감정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음악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상가에서 들리는 곡(哭)소리는 물론이고 시장에서 외치는 상인들의 웨침소리, 노동을 하면서 발성되는 힘겨운 감탄사에서도 우리는 시적인 가락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시적 본능의 자연스러운 발현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본능과도 같이 시에의 친화력이 있으며 이 친화력이 우리생활의 도처에 시적 점화구(點火口)를 마련하게 한다.
  시적인 표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과,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미완성의 것을 완성하려 하고 추악한 것을 미려한 것으로 수정하려 하며 지상의 것을 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노력, 이것이 곧 시를 갈망하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三流詩人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겨우 엉터리 삼류시인밖에 될 수 없다는 자조(自嘲)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라는 것, 비록 삼류시인이긴 하지만 이미 시인이 되어 있다는 기반 위에서 출발하자는 격려의 말이다. 즉 우리는 삼류시인의 위치에서 능히 일류시인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희망적이고 긍적적인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근원적인 시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말이다.
  시창작법을 공부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시와 우리 사이가 멀지 않다는 인식이다.
  '나는 詩를 몰라요, 詩에는 문외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너무나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좋은 시구절을 접했을 때 콧끝이 찡해오는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님은 물론, 결코 문외한이랄 수가 없다.
  시를 창작하는 데에 특별히 비법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현실적으로는 '시창작법'이라는 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시창작법'이라는 말을 앞에 내걸고 그것을 논의하기가 부자연스럽다.
  '시창작법'이란 시를 지어 내는 특수한 비법이나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 되어진 기존의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고 거기서 최소 공약수를 추출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시창작법은 누구에게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공식이 아니다.
  스스로 여러 편의 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 나타난 공통적 질서와 원리를 체득해야 한다. 그 체득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서서히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일정한 원리나 이론에 맞추어서 시를 창작해 내거나, 이론적 지식을 시의 제작에 적용하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시의 이론은 시를 창작하는 데에 별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이론의 적용은 오히려 언어 예술로서의 시의 미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시는 두뇌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쓰는 것이며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로 받아 들이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를 사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정서를 본능으로 가지고 있다.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도 음식의 맛을 감별할 줄은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음식평론가거나 삼류요리사임에 틀림없다.
  작곡은 못해도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청중을 모아놓고 발표하진 못해도 노래를 부르기를 즐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음악 비평가 내지 삼류성악가라고 부르면 어떨까.
  말을 사랑하고 그 느낌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시인이다.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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