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現代文明과 自然의 破壞
현대 시인은 花朝月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현대적 자연은 이미 단순하거나 소박함에서 떠나 있다. 오히려 타락하여 추악한 모습까지도 보인다. 자연이 안정과 평화, 사랑과 조화의 감각을 주지 않고 분규와 적대감을 자극하는 것은 현대인의 내면적 갈등과 복잡한 정서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정신적 방황, 열등감과, 회의와 무력감, 군중 속에서의 고독과 문명 속에서의 소외감은 인간과 더불어 자연까지도 인간과 동질동류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있다.
여황산아 여황산아, 네가 대낮에 낮달을 안고 누웠구나 머리칼 다 빠지고 눈도 귀도 먹었구나 忠武市 東湖洞 배꽃이 새로 피는데 여황산아 여황산아, 너는 대낮에 낮달을 안고 누웠구나 바래지고 사그러지고, 낮달은 네 품에서 오래오래 살았구나 - 金春洙 <낮달> 전문 -
늙은 산 여황산, 머리칼 다 빠지고 눈도 귀도 먹어서 아무 힘도 매력도 느낄 수 없게 된 산, '忠武市 東湖洞'의 배꽃은 다시 피어 나는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옛날 했던 그대로 겨우 바래지고 사그라진 낮달이나 안고 누워 있는 한심스러운 산, 불쌍한 산이 된 것이다. 시대가 어디로 곤두박질치더라도 항구여일하고 의젓하게 우뚝 솟은 푸른 산이 아니며, 인걸은 간 데 없어도 의구한 산천의 대변자로서의 산이 아니다. 치닫듯 격변하는 세계 가운데서 유독 낙후된 예날 그대로 지금이 어느 때라고 한심하게 낮달이나 껴 안고 누워 있는 여황산을 시인은 연민으로 바라보며 한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정지된 자연으로 퇴보하는 경우보다 문명의 직접적인 침략에 의해서 파괴되는 경우가 더 많다. 자연의 피조물로서 자연에 의탁해서 살던 인간이 문명을 일으켰고, 과학의 발달로 인해 물질의 가치가 극대화 되면서 인간은 자연을 더 이상 정신적인 자리에 남아 있게 하지 않았다. 자연도 한낱 물질에 불과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자연이 이제는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판단은 자연을 극소화하고 퇴락하게 하였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 소리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金珖燮 <城北洞 비둘기> 전문 -
산업사회에서는 자연까지도 물질적 재료에 불과하다. 자연은 인간의 욕구에 맞게 정복되어 생활의 방편으로 이용될 뿐이다. 자연의 파괴는 단순한 파괴에 머물지 않고 인간성의 파괴에까지 연결된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가 '성북동 산번지'를 잃고 쫓기는 새가 되면서 인간도 함께 거처할 정신적 처소를 잃은 것이다. 비둘기 가슴에 금이 가게 하는 채석장의 돌 깨는 산울림은 사실 인간의 영역을 넓히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쫓기는 새와 함께 쫓기는 인간이 되게 하는 소리인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본 시는 <城北洞 비둘기>만이 아니다. 김광섭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 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평야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들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즘생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즘생들이 놀랄까봐 地球처럼 不動의 자세로 떠 간다. 그럴 때면 새나 즘생들은 기분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나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 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틀고 슬슬 기어서 도루 험한 봉우리로 올라 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을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답답하면 솟아서 높은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가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溪谷이 된다.
산은 한번 神經質을 되게 내야만 高山도 되고 名山도 된다.
산은 기슭에 언제나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가까이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있다. - 金珖燮 <山> 전문 -
인간들이 무모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있음에 대하여 자연인 '山'은 오히려 인간보다 현명하고 사려깊게 대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에서는 새벽녘에 산이 학처럼 날아와서 종일 먹지도 않고 말도 않고 우울하게 엎디어 있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평야만 남겨놓고 먼 산 속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인간의 비정함에 저항하는 산인 것이다. 여기서의 산은 능동적인 기동성을 보인다. 요지부동의 거인이나 신처럼 좌정해 있다가 인간이 봉헌하는 예우를 받아들이던 옛날의 산이 아니다. 현대의 산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상의 茶飯事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서민처럼 범속하고 비천해졌다. 그러나 산은 관대한 포용력과 온후한 심성을 옛날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 큰 몸둥이를 인간의 마을로 옮길 때에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게 하려고 함은 물론이며 '새나 벌레나 즘생들이 놀랄까봐' 지구가 움직이듯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양지 바른 쪽에는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는 신을 모시는 '愛人과 敬天'을 아는 산. 그러나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로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다시 떠나가는 산이다. 산은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기어서 도루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비속해진 그에게서 우리는 다시 위대한 성자와 같던 모습을 발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달팽이 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밖에 갈 수 없는 산의 모습, 젊잖게 노호하지 못하고 소인처럼 '신경질을 되게 내'는 산의 모습에서 우리는 훼손된 현대 자연을 보는 비애를 느끼게 된다. 삶과 사람과 자연을 일체화하려는 이 시인의 노력은 모든 자연을 의인화하여 인간의 싯점으로 바라보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의인화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으로 처리되고 있다. 김광섭의 산은 과거의 전통적 산이 아니다. 인간의 예찬을 받고 거대하게 군림하는 산이 아니라 인간과 병렬관계에 있는 산, 조심스럽게 인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산,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음을 걱정하면서 숨어서 교훈을 주는, 인간보다 나은 산인 것이다.
5. 人工的 自然
<자연>이란 말은 첫째 삼라만상의 대자연(Nature)을 의미한다. 산이며 바다 꽃과 나무와 새,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산물인 밤낮과 사계절, 그 밖에도 홍수와 지진과 화산 등. 이들 자연과, 거기서 파생되는 불가사의하고도 오묘한 현상들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위대한 힘이다. 자연은 지금까지 가장 오랜동안 가장 중요한 詩의 제재가 되어 왔다. <자연>이란 말은 또 삼라만상의 대자연 외에도 '順理'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바로 대자연의 속성인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하는 이치'에서 유추된 것일 게다. '자연에 맡깁시다' 혹은 '자연의 법도에 따라'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법도에 따라'라는 이면의 의미와 함께 '신의 섭리에 따라'라는 의미를 함께 읽게 된다. 순리와 섭리에 따르는 것은 계획과 조직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기보다는 본능적이며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계를 초월하기보다 세계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연관을 맺으려고 하는 소박 단순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연>이란 말에 <인간성>의 의미를 결부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것이다. <자연>이란 말은 또 <자연스러운>의 의미를 나타낸다. <자연스러운>이란 인공성의 배제를 뜻한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은 다시 가식이 없는 <순수함>과도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詩는 自然의 模倣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 자연이란 '自然을' 모방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모방하였다는 모방의 형식과 방법의 제시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이 작품에서 자연을 제재로 하였다고 할 때 그것은 보통 대자연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대자연으로서의 자연을 詩의 제재로 채택할 때도, 자연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현대시의 자연은 해체되어 재구성된 자연, 그리고 꾸밈없이 순수한 자연이 아닌 인공적 수식으로 가득찬 방법, 순리가 아닌 역리와 역설로 나타난다. 현대의 자연은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게 파괴되었다.
개고랑 물이 풀린다. 여기저기 강아지풀들의 목뼈가 부러져 있다. 조금 밝아지는 그늘인 듯 조금 밝아지는 그늘의 雪吐花꽃 비탈인 듯 눈발은 삐딱하게 쓸리면서 가지 마, 가지 마,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고, 다리 오그린 채 들쥐들이 푸른 눈을 뜨고 있다. - 金春洙 <늦은 눈> 전문 -
개고랑물, 강아지풀들, 설토화꽃 비탈, 눈발, 들쥐 등 전 10행밖에 되지 않는 짧은 詩에 많은 종류의 자연물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자연물들이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에게 우호적 눈길을 보낸다거나, 아니면 인간의 추파를 받는 자연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풀리는 개고랑물의 둔덕에 여기저기 부러져 있는 '강아지풀들의 목뼈'는 독자들을 섬뜩한 공포 속에 몰아 넣는다. 이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체의 온기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온기를 느끼게 하기는커녕 이질감과 경계심까지 느끼게 한다. 여기에 등장한 자연은 자연 그 자체의 자발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삐딱하게 쓸리면서' 내리는 눈발이라든지 '다리 오그린 채' '푸른 눈을 뜨고 있'는 들쥐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들이 갖는 감정은 인간과는 별개의 것이다.
바다가 왼종일 새양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과 늑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 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 金春洙 <處容斷腸> 1의1 -
위 詩에서 자연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조용하지도 않다. 따라서 그것을 賞讚하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줄 수도 없다. 이 詩의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고 움직이면서 무엇인가 사악한 일을 모의하든지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자연과는 판이한 낯설고 무서운 자연이다. 자연이 낯선 것은 자연이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이 변화한 것일 뿐이다. 시인은 우리가 지금까지 친숙해 있던 자연의 모습이 아닌 낯설고 흉물스러운 자연으로 변화시켰다. 시인은 인간보다 자연을 가깝게 느끼고 인간의 감정보다 자연의 감정을 더 중시한다. 그런데 자연이 두려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시인이 사물인 자연을 강조하는 대신 인간을 열외자로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을 배제하고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사물의 감각만을 고조시킨 詩, 즉 비인간화의 詩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바다가 왼종일 새양쥐 같은 눈을 뜨고 있'고, '내 늑골과 늑골 사이 홈을 파고' 우는 거머리, '천의 사과알은'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는, 한쪽만 조금 열린 어둠 속에서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는, 이 일련의 사물들만의 음산한 분위기는 인간 정서에 접근하기 어렵다. 김춘수는 일련의 이러한 詩를 <무의미시>라는 이름으로 묶고 <무의미시>란 '대상을 잃어버림으로써 대상을 무화시킨 결과 얻게 된 詩'라고 정의하였다. 무의미시를 선호하는 그의 태도는 서구 부르조아 사회의 공작적 인간이나 산업사회의 주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물신숭배의 속물근성을 가진 대중에 대한 혐오감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밤에 깨어보니 일만개의 영산홍이 깨어 있다. 그들 중 일만개는 피 흘리며 한밤에 떠 있다. 밤은 갈라지고, 혹은 찢어지고 또 다른 일만개의 영산홍 위에 쓰러진다. 밤은 부러지고 탈장하고 별들은 죽어 있다. 별들은 무덤이지만 영산홍은 일만개의 밤이다. 눈 뜨고 밤에 깨어 있다. 깨어 있는 것은 쓰러지고 피 흘리고 한밤에 떠 있다. 마침내 비단붕어는 눈 뜨리라. 지렁이가 눈에 불을 켜고 별이 또 떨어지리라. (하략) - 金春洙 <大地震> 중에서-
한밤에 깨어 있는 일만 개의 영산홍, 피흘리며 한밤에 떠 있는 영산홍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통의 꽃 영산홍이 아니다. 더구나 밤은 그 일만 개의 영산홍 꽃 위에 갈라지고 찢어지고 쓰러지며 부러지고 탈장한다. 일만 개의 영산홍은 일만 개의 밤이며, 별들은 무덤이 되어 죽어 있고 한밤에 지렁이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야성적이고 괴기한 분위기는 일반 대중에게는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특수한 情緖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세계의 평범한 감정이 아니며, 사물세계를 해체하여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인간적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인간에게 격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인간의 삶의 흔적을 표현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일 게다.
6. 自然의 回復
최근에 이르러 상처받고 파괴된 자연을 다시 일으키자고 하는 생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고차원한 시운동으로 전개되기 이전, 이미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사회환경 개선의 한 방편으로서의 자각도 일어나고 있다. 인간에게 육체적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정신적 순화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다름 아닌 原始自然이라는 것을 차츰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산업 폐기물이 생활환경을 오염시키듯 문명과 과학 위주의 사고 방식이 인간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다. 인간은 오랜동안 고향을 잃어버리듯 순수자연을 잃어버리고 물질과 문명, 산업과 과학의 위협 속에서 생명의 근거를 잃은 채, 위축되고 방기되어서 이방인처럼 떠돌아 다니고 었었다. 자연의 회복은 삶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빼앗겼던 삶의 현장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봄날에 나물들 돋아나니 눈물난다 쇳드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 조선총독부 식물도감을 펼치니 구황식의 풀들만도 백 오십여 가지다 (중략) 햄이나 치이즈나 버터나 인스턴트 식품이면 뭐나 줄줄이 외어대는 어린놈에게 어서 방학이 왔으면 싶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센인바리(千人針)를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듯이 나 또한 이 나라 산천을 떠돌며 어린 것의 식물표본을 도와주고 싶다. 쇠똥가리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 송수권 <우리나라 풀 이름 외기> 중에서 -
우리나라 풀 이름을 외운다는 것은 우리나라 땅에 돋아난 하찮은 생명까지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하필 풀 이름인가? 산 이름, 강 이름, 새의 이름, 아니면 사람의 이름, 동물의 이름. 풀 이름 외에도 외울 만한 이름은 많다. 풀은 가장 작은 것, 짓밟혀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는 것들을 대표하는 명사다. 그런 의미로 이 詩를 읽을 때 '봄날에 나물들 돋아나니 눈물난다'의 첫행은 무거운 의미가 함축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시인의 눈물은 복합적인 것이다. 첫째는 한같 연약한 우리나라 풀인 '봄나물'이 겨울의 추위를 극복하고 소생하는 것을 보면서 대견한 그 생명력에 대하여 감격하는 눈물일 것이다. 그것은 비단 봄나물에 국한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생명 일반에 대한 시인의 온정이나 사랑일 수도 있고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내는 약자에 대한 찬사와 연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그 풀이 환기하는, 아픈 역사에 대한 눈물이다. 이 경우 풀의 내포적 의미는 일제 암흑기를 이겨낸 '조선' 사람이며 시인 자신도 한 사람의 '조선'사람의 후손임을 자각하는 눈물일 것이다. 세째는 우리를 그냥 굶어 죽게 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게 해 준 '구황식'으로서의 풀에 대한 고마움이 눈물을 흘리게 했을 것이며, 네째는 그 풀을 너무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눈물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인은 '어서 방학이 왔으면 싶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새 옛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햄이나 치즈 버터 등 인스턴트 식품의 이름이나 줄줄이 외워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위해 센인바리를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었다. 그랬듯이 '나 또한 이 나라 산천을 떠돌며' 참회하듯 우리나라 풀이름을 외우고 싶은 것이 이 시인의 심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 詩는 잊혀질 듯한 자연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단순한 욕망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시인의 뜻은 자연의 복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근원의 '조선의 복원'에까지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외딴섬 하나 그려 놓고 오른쪽 구석에 표지판을 세운다 간절한 내 여름의 기항지 그리운 사람들의 영혼이 모여드는 곳 파돗소리가 귓부리를 잡아당기는 대로 괭이갈매기랑 마라도로 가고 싶다 쓸쓸하게 사는 데 익숙한 내 방랑기 낯선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한 화풀이로 바윗돌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고 싶다 강풍을 만나 강풍에 끌려다니다가 큰 파도가 해체되는 자리에서 짠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싶다 내 여름의 광기를 한 배 싣고 가다가 아무 데서나 파선되고 싶다. - 이생진 <마라도. 아름다운 지도> 전문 -
위 詩의 화자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와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으로부터 패배하고 돌아가 쉴 곳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시인은 인간사회라고 하는 '낯선 사람들 틈'에 끼이기를 싫어하면서 그 '화풀이로 바윗돌에 부딪쳐 산산조각' 깨어져 죽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는 외딴 섬 마라도를 그려 놓고 표지판을 세운다. 그리고 거기를 '그리운 사람들의 영혼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명명한다. 삶에 지친 인간이 최후로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인간들이 만든 질서 있는 사회도 아니며 체제나 조직도 아니다. 무지하고 원시적이라고 버렸던 자연, 묵묵부답 반응이 더디며 타산이 맞지 않는 대상이라고 우리가 일찌지 버리고 떠났던 자연이다. '강풍을 만나 강풍에 끌려 다니다가 큰 파도가 해체되는 자리에서 짠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싶다고 한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절감한 인간세계의 왜소함과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다. '파도소리가 귓부리를 잡아당기는 대로 괭이갈매기랑 마라도로 가고 싶어하는 시인 '여름의 광기를 한 배 싣고 가다가 아무 데서나 파선되고 싶'어 하는 시인의 소망을 집약한다면, 자연으로 귀환하여 자연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