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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자연-1. 시인의 자연관 ----이향아

백연심 2006. 11. 22. 14:53
시와 자연-1. 시인의 자연관
 

이향아               
         


1. 詩와 自然의 關係

 文學과 自然은 古來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기원을 자연의 모방에 두었고, 프래밍거의 詩學辭典에서는 자연이 문학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인 동시에 詩學의 개념을 규정하는 척도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문명 속에서 자연은 인간의 고독과 갈등을 극복해 주며 위무해 주는 필수적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인들의 새로운 造語로서 '원시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연의 재발견으로써 문명생활에서 피폐해진 인간성을 회복하고, 상실했던 삶의 단순성과 진실성, 소박성을 되찾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생겨난 말인 것이다.
 우리 국문학의 경우 자연은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특수성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江湖歌道]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自然詩가 주류를 이루었던 朝鮮時代의 詩歌들은 '자연미의 발견'이라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시가 주류를 이루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되는 黨爭과 士禍의 변란 속에서 明哲保身하면서  閑寂을 꾀하는 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나타난 자연이었다. 당쟁에 패하고 僻地流配所의 산간수변이나 산야에 파묻히어, 혹은 체념하고 혹은 때를 기다리며 생활하는 동안 자연은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는 최선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古典詩歌에서의 자연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자연물의 아름다움으로 발견된 자연이 아니고 大自然이라는 개념으로 흡수한 포괄적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趙潤濟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고할 수 있다.

 國文學史에 나타난 개개의 자연이란 것은 원체 그 폭이 좁기도 하였지마는, 그가 가지는 美的 價値란 것은 본시 충분히 이해되지는 못하였다. 만일 이해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꽃이요 나무라는 그 개개의 특정한 美가 아니라 꽃 일반 나무 일반에 대한 美일 것이다.

 대자연이란 개개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아니요, 전체로서 조화를 이룬 막연한 자연에 대한 관심이다. 따라서 여러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그 생명이 유구하여 끝나지 않고 그 진행이 순조롭다. 한 종류의 꽃이 지고 나면 또 다른 종류의 꽃이 피고 그 꽃이 시든 다음에는 또 다른 꽃이 피는 대자연의 영원한 연계 속에서 선인들은 우주의 질서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꽃과 달, 달과 나무, 나무와 새 등 이들 자연의 조화를 통해서도 생명의 존귀함과 초자연적 섭리를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가진 여러 특성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조화와 영원과 순리를 배우려 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처한 특수한 상황과 그로 인해 얻게 된 민족적 철학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시에 있어서 본격적인 자연시의 시작은 靑鹿派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제 말기 날로 극악을 더해가는 억압과 침탈 속에서 청록파가 기울인 자연에의 애정과 관심은 이조의 江湖詩歌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이조의 自然 詩歌가 明哲保身과 한적을 위해 발생한 장르라고 할 때 일제말기의 극한상황 가운데서 청록파가 의지한 자연의 힘은 초능력의 거대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金東里는 청록파가 재발견한 자연을 일러 '남이 몸으로써 지키는 세기적 심연에 직면하여 絶對絶命의 窮境에서 불러진 神의 이름이었던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청록파가 재발견한 自然은 단순한 詩의 소재로서의 日月星辰이나 순환하는 사계절 속의 산천초목이 아니다. 김동리가 지적한 대로 자연은 위대한 힘이었으며 救援이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현대시에 반영된 작금의 자연의 위상을 분석하고 앞으로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의 자연의 가능성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傳統的 自然觀

 傳統的 自然觀이란, 자연이 그 존재의 근원을 神이나 인간정신에 의존하고 있는 자연관이다. 자연 존재의 근원을 신에 둘 경우는 자연을 신의 피조물로 보게 되며, 인간정신에 둘 경우 자연은 인간과 우정을 나누는 친근한 협력자가 된다.
 전통적 자연관으로 바라볼 때, - 그 존재 근거를 신에 두지 않고 인간정신에 둘지라도 - 자연은 종교적 가치와 神聖으로 충만한 대상이 되며 매력과 신비와 장엄성을 가진다. 전통적 자연관에 의하면 자연은 신의 능력의 구체적 표상이며 可視的 神의 한 면모로 나타나게 된다.
 아무리 비종교적인 사람일지라도 자연의 힘에 전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을지라도 자연으로부터 종교적 체험의 기억을 갖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통적 자연관으로 바라본 자연은 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혹독하지 않으며 신성하지만 무자비하지 않다. 전통적 자연관에 입각한 자연시의 궁극적 제재는 신성이지만 자연은 인간과 친근한 관계에 놓여 있게 된다. 이러한 자연관은 자연이 인간 사회와 개인의 정서 생활에 유익한 존재라는 낙관론을 낳으며,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부상된다. 고대로부터 자연이 인간 소망을 기탁하는 기원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관의 일면을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젼저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데를 드디욜셰라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디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다롱디리

 백제 어느 행상인의 아내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井邑詞>의 전문이다. 이 노래에서의 자연물인 달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로서 기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행상 길에 나가서 밤이 깊도록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염려하여 무사히 돌아오기를 비는 지은 이의 심리 저변에 자연인 달은 종교적 신성을 띤다. 비단 고대시가가 아니라도 자연에 의탁하여 소원을 비는 이러한 유의 詩는 현대시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 朴斗鎭 <해> 전문 -

 이 詩의 표현은 어조가 웅장하고 숭엄한 가락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방법만 다를 뿐 이 詩 역시 祈願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정읍사]와 비교할 때 어미가 소망형이 아닌 명령형으로 나타나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詩의 감상자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간절한 소원의 표현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있으니, 강렬한 소원의 표현은 오히려 소망형 어미가 붙을 자리에 명령형 어미를 붙이므로써 그 강렬성을 강조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통적 자연 가운데에서도 존재 근거를 신에게 두지 않고 인간정신에 둘 경우, 자연은 인간적 가치로 충만하며 인간의 생활과 연속성을 가진 자연으로서 나타난다. 신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이 위력과 엄숙성을 가졌다면, 인간정신에 근거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친근감과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이 때 자연은 인격화 되어 나타나는데 인격화의 방법은 다시 두 가지 원리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동화(Assimilation)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투사(Project)의 원리이다. 동화가 모든 자연을 시인 자신 안으로 끌어 들여 인격화하는 것이라면 투사는 동화와 반대로 끊임없이 시인 자신 혹은 인간을 자연 속에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임은 앞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시인의 자연관은 자연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보다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상태와 태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결정된다.

 조국은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金東鳴 <파초> 전문 -

 자연물인 파초에 인격을 부여하여 '수녀'에 비유하고 있다. '정열의 여인' '네 발등'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 등의 의인적 수사는 남국의 열정을 타고 태어났으면서도(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이국에서 외로운 넋을 달래고 있는 가련한 여인의 인격을 느끼게 한다. 시인의 파초를 향한 사랑은 고국을 떠난 가련한 여인에 대한 사랑과 동질의 것으로 시인은 그 사랑을, 차거운 밤 파초를 '내 머리맡에 있게하'고 즐겨 그를 위한 종이 되는 것으로써 표현하고자 한다. 고전시가나 현대시를 막론하고 자연인 꽃을 여인으로 동화시킨 예는 많다.

 눈을 뜨고 바라보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이밤에
 모두 별로 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리운 시인들은
 더욱 높이 별로 떠서
 나를 비춘다.
 역사를 말하고
 조용조용 사랑을 읊조리고
 혹은 기도 속에 영혼의 노래를 부르며
 잎새나
 나뭇가지나 하늘 복판에
 꽃보다 더 맑은 눈동자로 떠 있다.
 가난한 누님
 외로운 동생
 지금은 멀어져간 이웃이나 동무들도
 가까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별로 떠서
 이밤을 빛낸다.
                            - 李聖善 <별로 떠 있는 사람들> 전문 -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이밤에 모두 별로 떠 있다'는 이 시인의 자연관은 '투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가 사랑하는 그리운 시인들', '가난한 누님', '외로운 동생', '지금은 멀어져간 이웃이나 동무들' 등 수 많은 인격들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별로' 뜨는 상상적 현상은 이 시인이 자연과 얼마나 깊은 친화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게 해 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름다운 별에 투사하면서 그 별들을 바라보는 시인은 역시 그 별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들 별들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가진 아름다운 존재로 투사 되는 것이다.

3. 現代的 自然觀

 전통적 자연관에 의하면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믿었고 자연은 인류의 윤리생활에 모범이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만연하였다. '자연은 아무런 인간적인 의의가 없는 단순한 물질, 혹은 에너지의 현상이며 도덕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완전히 중성적인 입장에 있다' 는 과학사상이 지배적이 된 것이다.
 전통적 자연이 종교적이며 인간적 가치를 가진 것인데 반해, 현대적 자연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 따라서 현대적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한 편이 소망을 빌고 또 한 편이 소망을 성취시켜 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1:1의 객관적 타자로서 수평 위에 존재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유정한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의식은 인간의 의식으로 자연의 현상이나 풍경은 자연의 현상과 풍경으로 따로 따로 있게 된다. 자연이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생활을 유익하게 한다는 낙관론이 여기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자연이 인간의 생활에 유해한 것이며 인간과 적대관계에 있다는 비관론도 역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관은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동식물학, 생물학, 미생물학, 지질학 등 새롭게 발달한 자연과학의 개념은 과거의 전통적 자연과학의 개념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했으며, 이는 다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현대시의 발전과정에 커다란 변화의 요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흰달빛
 紫霞門

 달안개
 물소리

 大雄殿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泛影樓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紫霞門

 바람소리
 물소리
                                       - 朴木月 <佛國寺> 전문

 그것이 어떻다는 판단이나 해설은 보류한 채 사물이 있는 현장만을 제시한 詩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모습도 없고 시인의 견해도 배제되었으며 경치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일정한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원용된 것이 아니다. 다른 무엇을 표현하려는 수단으로서 등장한 자연이 아닌, 자연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인 자연이다. 박목월은 일제말의 상황과 비인간화의 자연을 다음과 같이 관련지어 말하고 있다.

 사실은 이런 소란한 시대의 한 여백--사진 없는 필름만이 돌아가는 것 같다 할까. 그 희멀건 여백 가운데 멍하니 나 자신이 처한 것 같기도 하다. 이건 비단 나 혼자 생활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 문학적으로도 현대시의 자연은 여백의 한 페이지일 것이다. 여백은 흰 침묵이며 역시 그것은 슬픈 얼굴이다.

 생활의 현장이 없고 그림만 남아 있는 이러한 詩는 과거의 한국 자연시의 일부가 밟아온 전철이기도 하다. 이조의, 당쟁과 사화로 얼룩진 사회상을 이면에 감추고 그로 인해 입었을 시인의 정신적 상처나 고통은 숨겨 둔 채 자연의 완전함과 유구함만을 초탈한 자세로 대면할 수 있었던 詩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한 예로는 {孤山遺稿}에서 볼 수 있는 尹善道의 詩歌라든가, {聾岩集} 혹은 <漁父歌>에서 볼 수 있는 李賢輔의 詩歌를 쉽게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詩들에서는 아직도 자연에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지언정, 자연의 냉혹성이라든지 非情性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목월의 자연시는 본격적 의미의 현대적 자연을 구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박목월의 자연에는 인간을 자연에 동화시키는 동양의 전통적 자연시와 일맥 상통하는 자연의 殘影을 볼 수 있다.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 朴木月 <달> 전문 -

 어떠한 관념도 드러나지 않고 이미지만을 묘사해 놓은 순수한 서경시이다. 달이 그저 그렇게 떠 있다는 말이며 시인이 이에 대하여 달리 언급한 사항이 없다. 그러나 이 詩는 자연과 인간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따로 놓여 있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화합하는 몰아의 경지에 젖게 한다. 즉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가는 달을 따라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으로 물흐르듯 함께 흘러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전통적 자연과 본격적으로 대치되는 현대적 자연은 일체의 인간적 관점이 배제되어 있고 인간이나 신에 의존하지 않은 독립된 자연이다. 독립적 자연은 인간과 무관한 객관자로서의 비정성을 가진다. 세계 속에서 이질적이고 냉혹하기조차 한 존재를 느끼게 하는 이 비정적 타자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대적 자연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리챠즈는 이를 가리켜 '自然의 中立化'라고 하였다.
 인간의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볼 때는 정서적 감동이 커지는 대신에 감상적 오류(The Affective Fallacy)가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비정적 타자로 독립하는 현대적 자연개념은 감상적 오류를 거부하게 되고, 그 결과로 비인간화를 불러오는 것이 필연적이다. 다시 다음의 시를 보자.

 十二月의 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萬物을 苛刻하는 黑龍江 말라 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 네 거리에
 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에 模糊히 저물은 朔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중략)
 힘으로써 힘을 除함은 또한
 먼 原始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로다
 내 이 刻薄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險烈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無賴한 넋이여 暝目하라!
 아아, 이 不毛한 思辨의 風景 위에
 하늘이여 恩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 柳致環 <首> 중에서 -

 靑馬가 일제말의 詩를 묶어 해방 후 펴낸 시집 {生命의 書}에 수록한 詩이다. 우리가 이 詩에서 만나는 것은 정서적 감동이 아니라 광막하고 비정적인 자연 앞에서의 절망과 두려움이다. 눈도 오지 않는 혹독한 십이월의 북만주의 자연은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객관자로 서 있는 무심한 자연인 것이다.
 北滿洲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日帝라고 하는 절망적 시기를 젊은 시인이 살아내면서 그가 대면한 자연은 참담하고 냉혹한 것이었다. 인간적 감정은 한치도 용납되지 않는 극한상황 속에서, 시인은 '각박한 거리를 가며' 생명의 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달을 뿐이며, 부디 자연이 유정하여서 은혜를 베풀 듯 눈이라도 함빡 내려주기를 소망할 뿐이다.
 위력을 가진 대자연이 말없이 순환과 반복을 계속할 때, 인간은 그러한 자연에게서 냉혹함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인간과 대치한 위치에서 보여주는 제 삼자적 비정성은 결국 유약한 인간에게 '허무의 자연' '허무의 의지'를 낳게 하였다. 金埈五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조할 수 있다.

--(전략) 니체가 이런 니힐리즘을 수용함으로써 도리어 불행한 역사적 상황의 초극과 인간의 위대성이 가능하다고 했듯이 靑馬도 이 비정한 타자성의 자연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의 허무의지였고 따라서 그의 자연은 <허무의 자연>이었다. 그리고 이 비정한 타자성의 자연을 발견한 것이 그의 후기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과 무관한 비인격신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자연관은 반인간주의였다.

 자연으로부터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 아직 자연의 신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의 항구성이라든지 불변성,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그 위력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에게 허무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믿음에 대한 자연의 응답이 전혀 없을 때 인간이 느끼는 배신감과 절망은 커지고 그것이 점점 확대될 때 허무의 골도 비례하여 깊어지는 것이다.
 자연은 원래 광대무변하고 영원무궁하다는 개념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시에서의 자연은 영원성이나 불변성이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을 헐어내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왜소하게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자연은 의지하고 믿을 만한 것도 아니며 항구적 생명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공에 의해서 자꾸 변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고 있다.

 霜降 때, 밤새도록 간 칼로
 臨津江 一帶에 오는 가을
 모조리 쳐죽여 버려라.
 내 몸의 늙어빠진 내장도 다 뒤져서
 四十年 가을 벌레소리들을 남김없이 베혀라.
 가을이라니!
 그냥 눈 딱 감고
 내 입 안에는 한국 사람의 먹물 한 통.
                                       - 高銀 <가을 絶句> 전문 -

 그 이유야 여하튼 '임진강 일대에 오는 가을 모조리 쳐 죽여 버려라'고 소리치는 것은 과거의 詩에서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우리의 의식에 습관처럼 뿌리내리고 있는 '가을'은 '아! 가을인가'의 서정적 영탄을 불러오는 아름다운 절기의 이름이며, 가을 벌레소리 역시 계절의 전령사로서 오랫동안 우대를 받아 왔다. 霜降 때의 서릿발에 밤새도록 숫돌에 칼을 갈아서 '임진강 일대에 오는 가을을 모조리 쳐 죽여 버려라' '가을 벌레소리들을 남김없이 베혀라'로 격노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가을이라니' 가을이 다 뭐냐고 시인은 비웃으면서 '먹물 한 통' 입안에 가득 머금고 벙어리처럼 소경처럼 차라리 '한국 사람의 침묵'을 지켜야 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역사의식과 결부된 시인의 잠재의식이 격렬한 충동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詩는 분단된 조국 땅에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드는 가을을 비통해 하면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적 詩의 기법, 현대적인 자연관에 기인한 의식이 아니고서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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