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 자료실
우물로 돌아간 무당개구리 /최영규
백연심
2006. 11. 22. 14:46
Ⅰ.
나는 깊은 우물 안에 살고 있는 무당개구리다.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시원하고 맑은 물, 돌 틈 사이의 푸른 이끼, 빛이 적어도 살아갈 수 있는 작은 풀 몇 포기 그리고 꼬레치도롱뇽 몇 마리와 나, 무당개구리가 전부이다.
우물 밖의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답답하다고 여겨질 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행복하기만 하다. 하늘은 이 우물만큼이나 깊고 무궁무진하게 넓다고 하지만, 내가 늘 바라보는 하늘은 동전만한 테두리를 가진 하늘뿐이다. 간혹 그 안으로 몇 조각의 구름이 등장하기도 하고, 돌덩이같은 빗방울이 날아 들어오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검은 색 어룽무늬가 박혀 있는 붉은 뱃바닥을 뒤집어 보이며 본능적으로 죽은 시늉을 하는 게 고작이다.
얼마 전에는 나는 물 위에 둥둥 떠서 졸고 있다가 주인집 딸아이의 두레박에 떠올려져 우물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두레박 안의 나를 본 주인집 딸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두레박을 내던졌고 나는 푸른 물때가 끼어 있는 바닥에 두레박과 함께 나가 떨어졌다. 붉은 뱃바닥을 뒤집어 보이며 죽은 시늉을 하는 나를 보고 싸리회초리를 든 남자아이가 달려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급한 대로 우물 옆 꽃밭으로 피했고 잡풀이 잔뜩 자라고 있던 꽃밭 속에서 해가 지도록 머물러 있어야 했다. 가까스로 돌아온 우물 안은 정말 편안했다.
나는 그때 백사장처럼 눈부신 마당을 보았다. 하늘의 테두리는 검은 기와지붕 모양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손바닥만한 잎을 가진 목단이라는 꽃도 보았다. 예리한 싸리회초리 앞에서 나는 등잔불보다도 힘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우물 안은 예전처럼 나를 너무 편하게 해주지만 새로운 체험들이 그 느낌을 예전같지 않게 했다.
Ⅱ.
나는 눈보라 치던 지난 겨울에 막 등단한 햇병아리다. 부화되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얇은 껍질 속에서 꿈꾸던 알이었거나, 깊은 우물 속에서 나만의 영법으로 놀고 있던 무당개구리였다.
하지만 나는 새로이 만난 현실 속에서 계속 상처받고 있다.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건드려지고 건드려지는 상처. 어쩌면 평생 고통받아야 할 상처를 가져버린 무당개구리.
몇 번의 상처가 거듭되는 동안 나는 시작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통의 힘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대부분의 선배 시인들도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다음의 시도 그러한 과정에서 씌어진 것이다.
계절 갈아타기
표를 요금통에 넣었다 그런데 다른 승객들은
나뭇잎을 넣으며 버스에 탔다
나는 그들이 모두 나무로 보였다
물이 잔뜩 오른 오리나무 연두빛 새순을 내밀고 있는 물푸레나무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산사과나무와 산목련
봄나물 주머니를 들고 가는 금관목
버스 안은 그야말로 나무들로 꽉 차버린 숲이었다
차창 밖으로는 꽃가루들이 심하게 날리고 있었다
‘한국의 토종’이란 책을 보고 있던 갈참나무가
그건 포플러나 버드나무의 씨앗이라고 일러주었다
덜컹거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조금씩 푸른 물이 들고 있었다
버스가 섰다 나무가지를 헤치며 겨우 길에 내려섰다
씨앗들이 날아와 얼굴이며 옷깃이며 바지가랑이에 달라붙었다
푸르게 열린 가슴에도 헤집고 들어와 붙었다
갈아 탈 버스가 와 섰다
호주머니엔 나뭇잎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이렇게 쓰고나니 상상력이 너무 승하여 현실감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 역시 추상적이어서 어떤 구체적인 오브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신복리’라는 지명을 가져오기로 했다. 사람들을 나무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너무 방만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겼다. 압축과 긴장도 떨어지는 감이 있어 다시 다듬어보기로 했다.
신복리에 가려 하네
토큰을 요금통에 넣었다 그런데 다른 승객들은
나뭇잎을 넣으며 버스에 올랐다 `
하루에 두 번 신복리 입구를 경유하는 버스 안엔
승객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우리 나무 100가지’ ‘한국의 토종’ 등의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손끝이 연두빛이 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차 안엔 모두 손이 푸른 사람들이었다
나는 시사주간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는데
펼쳐 볼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는 꽃가루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있었다 그건 꽃가루가 아니라
포플러나 버드나무의 씨앗이라고
입술이 연두빛인 아가씨가 일러주었다
나는 잔뜩 물이 올라서 거리에 내려섰다
씨앗들이 날아와 옷깃이며 바지가랑이에 달라붙었다
갈아탈 버스가 섰다
호주머니엔 푸른 나뭇잎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집중력이 떨어졌던 처음 부분을 과감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각을 바꾸고, 내용을 보완할 수 있는 제목으로 바꾸어 달고 나니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훨씬 선명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새로 수정한 시가 처음보다 얼마 만큼 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단지 우물 안 무당개구리가 시라는 맑은 샘물을 통해 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소중히 여긴다. (최영규)
◇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경기대 경제학과 졸업. 시집 [아침시집]
출처:http://www.poemworld.co.kr/포엠월드 창작실기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