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배반당한 동정심 / 정정길

백연심 2006. 9. 13. 03:47
그날은 닷새마다 장이 서는 날이었다.
완행 열차로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장에 들러야겠다는 생각과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할 줄 몰라 단조롭기 짝이 없는 철로 주변의 농촌 풍경이 너무 싱거워 차창에 기댄 채 슬쩍 잠이 들었다.
매양 오가는 일이라서 눈을 뜨는 것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도 없는 짧은 노정인지라 내려야 할 때가 되면 누가 일부러 깨우지 않아도 눈이 떠지도록 버릇이 붙었던 터라 맘놓고 그렇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잠을 깨웠다.
붐빌 시간이 훨씬 넘은 한가한 완행 열찬데 누가 귀찮게 단잠을 깨우는가에, 여태껏 부드럽다는 말 한 마디 들어 본 적이 없는 내 성깔이 슬그머니 날을 세우는 판인데 혹시 승무원이 중간 검표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은 채로 표를 내밀었더니 차표 든 손을 밀치는 것이 아닌가.
불과 삼십 리에도 못 미치는 이 여정 도중에 열차표를 검사했던 것은 승무원이 새로 들어와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눈을 감은 채로 표를 내밀면 ‘재깍’하는 소리가 들리고는 곧바로 차표가 되돌아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별꼴이 반쪽이라는 비틀린 심사로 눈을 떴더니 엉뚱한 손님 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냥을 구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인 듯했지만 같잖게 반백인 사나이와 소녀였다.
사나이는 걸인 특유의 허름한 옷차림이었고, 어색한 잔주름이 제멋대로 얽힌 얼굴은 며칠이나 씻지 않았는지 시커먼 땟국이 흘러 다니면서 여기저기다 난장판을 벌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땀에 전 옷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뭉게뭉게 피어났고, 소맷부리는 무두질을 잘한 가죽을 닮아 번들번들했다.
입성에서 호감을 가질 수 없듯 외양도 엉망진창이었다.
매직 유리로 알을 만들어 넣은 은경이라는 짙은 색안경을 끼었는데 안경알에 내 얼굴 표정이며 움직임이 그대로 반사되는 바람에 내 속마음을 들여다뵈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런 별난 안경은 조직 깡패 두목이나 맹인이 아니면 잘 쓰지 않더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몹시 심한 지체 장애로 고통까지 겪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이 안으로 몹시 휘어 엄지와 검지를 쭉 편 채로 굳어서 구부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보통이 넘는 지체 장애자임이 분명했다.
어려서 심한 병을 앓았었지만 치료할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가에 마음이 닿자 있는 대로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사나이 곁에는 더욱 애처로운 소녀가 길잡이로 붙어 있었다.
열예닐곱 살쯤 됨 직한 곱상한 소녀는 때에 전 지체 장애자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타고난 미모였다.
훤칠한 키, 갸름한 얼굴에 보조개와 이목 구비가 너무 뚜렷해 어디를 뜯어봐도 흠잡을 데라고는 없었다.
입성이 고 모양이라 그렇지 어지간히만 입혀도 한다하는 요조 숙녀감이 되고도 남을 만했다.
다만 동냥 바가지와 고개를 함께 위아래로 흔들면서 손짓과 눈빛으로 구걸하는 모양이 동행한 사나이에게 주어지는 안쓰러움보다 훨씬 더했다.
얼른 봐서는 부녀 사이임이 분명했고 벙어리인 딸이 지체 장애자에 맹인인 아버지의 손발 노릇을 대신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느지막한 시간에 장을 보러 가는 몇 안되는 승객들은 겹치기로 장애를 입은 사나이보다 그 소녀에게 더 눈물겨운 동정을 보내고 있었다.
한결같이 혀를 차고 소녀를 쓰다듬으며 아깝다느니 효녀라는 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과 동정은 곧 이어 동전과 지폐로 바뀌었다.
승객들은 완행 열차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가벼운 호주머니를 가진 농민들과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들에게 항해는 동정 어린 연민의 마음은 소녀에게 더 주어져 사나이 몰래 제법 큼직한 지폐를 몇 겹으로 접어 슬그머니 쥐어 주기도 했다.
구겨질 대로 구겨져 더는 구겨지고 말 것도 없는 깡통 속으로 동전과 지폐가 모아졌고, 치마말 깊숙한 데에서 나온 순박하고 따뜻한 동정심도 함께 깡통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내가 내려야 할 역에서 내려서는 길로 내처 떠나는 열차 뒤를 눈으로 쫓으면서 소녀의 얼굴만 몇 번이고 떠올릴 뿐이었다.
장 초입에는 내 오랜 친구 하나가 장이 서는 날만 골라, 국수와 선짓국, 막걸리를 장꾼들에게 먹이느라고 문을 여는 선술집이 있다.
그 선술집에 들러, 벌써 몇 년째 빨지 않은 시커먼 행주치마와 다듬지 않아 원시림을 닮은 턱수염에 핀잔을 준 뒤 그걸 빌미 삼아 막걸리 한 잔이나 얻어먹을까 하는 속셈으로 안이 훤히 들여다뵈는 쪽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순간 숨이 콱 막히고 말았다.
친구가 툭 불거진 왕방울 같은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뜨고 선술집 지붕 슬레이트가 깨질 것 같은 목청으로 반갑게 맞지 않았더라면, 아까 찌그러진 깡통 속에 집어넣은 지폐 한 장을 도로 내놓으라고 멱살잡이를 할 뻔했다.
사나이의 굳었던 손목과 손가락은 멀쩡했고, 반백으로 물든 머리는 가발이었으며, 은경은 술상 한쪽에서 얌전하게 다리를 접고 앉아 있었다.
화통이 뿜어내는 뭉게구름 같은 하얀 연기 속으로 아련하게 얼굴을 떠올리던 소녀가 물수건으로 얼굴에 칠해진 검뎅과 주름살을 닦아내자 사나이는 소녀 또래의 청년으로 변하고 있었다.
소녀가 막걸리를 따르며 아양을 떨자 청년이 태연하게 지껄였다.
“주머니가 두둑하게 벌렸으니 택시 불러 타고 시내로 들어가 일식집에서 입맛 돋운 뒤 찐한 영화 하나 보고 화끈한 데로 가서 신나게 땀이나 한바탕 빼자.”
소녀가 한 술 더 떴다.
“2차 가서 양주로 입 헹구고 오늘은 좀 근사하고 잠자리 편한 데로 가자.”
(1999년 12월 31일 발행. 졸저 제1 수필집 “마음의 고향”에서 전문 옮김-저자)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