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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 이야기 / 전상국
백연심
2006. 9. 5. 15:51
제자 이야기
전 상 국 (소설가)
제자 한 사람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멀리서 찾아왔다. 따져 보니 삼십 오년 전쯤 내가 중고등학교 선생을 할 때의 제자였다. 그 제자는 교직 생활을 이십 년쯤 하다가 그만두고 수학 학원을 내어 이름을 날리는 과외 선생을 해왔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그만두었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그날 저녁은 나와 대학에 함께 근무하는 제자 한 사람도 합석한 자리였다. 자리가 그러니만치 화제는 옛날 내가 그들을 가르치던 세월에서부터 이제 인생의 오부 능선쯤에서 선 자신들의 오늘의 생활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들었다.
멀리서 나를 찾아온 제자는 그 동안 신장암 등 암수술을 두 번이나 받는 등의 역경을 겪다보니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아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좋다는 진리를 터득한 뒤 마음이 그렇게 편해졌노란 얘기까지 곁들였다.
그 제자가 나를 찾은 이유도 그런 마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교단에 있을 때나 학원 선생을 할 때 늘 학창 시절 나한테 배우던 시간이 생각나곤 했다는 얘기이다. 그때 학생들의 미래를 점쳐주던 내 덕담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느 땐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내가 삼행시를 지었는데 자기는 평생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자신이 교단에 있을 때나 과외 선생으로 이름을 날린 것도 어쩌면 그 삼행시를 통한 내 덕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냔 덕담을 나한테 돌려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 제자의 얘기를 듣던 중 불현듯 생각나는 편지가 하나 있었다. 자신이 내 제자인데 늘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과 그때 나한테서 받은 별명이 <돌머리>였는데 지금 그 돌머리가 수학 선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내가 강원대학에 오던 해 받은 편지였다. 충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 그 당장 답장을 썼던 일까지 떠올랐다.
저녁을 사겠다고 찾아온 그 제자가 바로 그 편지의 주인공이었다. 제자가 운전을 할 사람으로 부인까지 동반한 자리라 <돌머리>란 별명까지는 거론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편지를 쓴 사람이 그 제자였다는 것만은 확인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친구와 가진 술자리에 젊은이 하나가 다가와 합석을 했다가는 그 술값을 치루고 나갔다. 내 옛날 제자라면서 자기가 나를 잊지 못하고 있는 사건 하나를 얘기했다. 어쩌다 수업 시간에 배탈이 나 교실에서 큰 실례를 했는데 내가 자기를 데리고 수돗가에 가 몸을 씼어준 뒤 옷까지 얻어다 입혀줬다는 얘기였다.
물론 나는 그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제자가 돌아간 뒤 나는 친구와 이런 얘기를 나눴다. 어쩌면 지금 그 제자는 그때 내가 그렇게 해줬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나 듣기 좋게 그 일을 미화해 얘기했는지도 모른다는.
지난 해 오월, 34년 전 내가 담임을 했던 제자들이 스승의 날을 앞두고 반창회를 춘천에서 한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서른 대여섯 명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당시 우수반 학생들답게 사회에 나가 꽤 괜찮은 위치에서 나름의 역할들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제자들은 그때 담임인 나를 앞에 놓고 자신들의 학창 시절 추억 한 토막씩을 풀어놨다. 나로서는 상당해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내 앞이라 되도록 듣기 좋은 기억들만 풀어내고 있었지만 듣는 나로서는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어찌 그들에게 좋은 기억들만 있을 수 있겠는가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업을 한다는 제자 하나가 일어났다.
졸업식이 끝나고 내가 교실에서 졸업장을 수여하는 시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내가 한 사람씩 앞에 세우고 졸업장을 나눠주면서 하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졸업장을 받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그 동안 담임이 기억했던 일이나 그 학생의 특기 등을 들춰내 덕담으로 주었다는 얘기까지는 좋았다.
그 제자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전 나한테는 무슨 얘기를 할까 매우 조마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 차례가 돌아와 내 앞에 서자 “음, 박광일...” 이렇게 이름을 불러놓곤 눈을 맞춘 뒤 그냥 졸업장만 건네고 말더란 얘기였다.
자기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때 담임선생이 왜 자기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그게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며 나한테 그 대답을 듣고 싶다는 주문이었다.
그때 일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제자의 얼굴에는 그때 자신에 대해 담임선생이 아무 말도 안 해준 일에 대해 꽤 많이 서운했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교직 생활 40년을 돌아보면서 나는 이렇게 늘 얼굴이 붉어질 때가 많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입었을 어린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자책감이다.
전 상 국 (소설가)
제자 한 사람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멀리서 찾아왔다. 따져 보니 삼십 오년 전쯤 내가 중고등학교 선생을 할 때의 제자였다. 그 제자는 교직 생활을 이십 년쯤 하다가 그만두고 수학 학원을 내어 이름을 날리는 과외 선생을 해왔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그만두었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그날 저녁은 나와 대학에 함께 근무하는 제자 한 사람도 합석한 자리였다. 자리가 그러니만치 화제는 옛날 내가 그들을 가르치던 세월에서부터 이제 인생의 오부 능선쯤에서 선 자신들의 오늘의 생활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들었다.
멀리서 나를 찾아온 제자는 그 동안 신장암 등 암수술을 두 번이나 받는 등의 역경을 겪다보니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아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좋다는 진리를 터득한 뒤 마음이 그렇게 편해졌노란 얘기까지 곁들였다.
그 제자가 나를 찾은 이유도 그런 마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교단에 있을 때나 학원 선생을 할 때 늘 학창 시절 나한테 배우던 시간이 생각나곤 했다는 얘기이다. 그때 학생들의 미래를 점쳐주던 내 덕담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느 땐가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내가 삼행시를 지었는데 자기는 평생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자신이 교단에 있을 때나 과외 선생으로 이름을 날린 것도 어쩌면 그 삼행시를 통한 내 덕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냔 덕담을 나한테 돌려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 제자의 얘기를 듣던 중 불현듯 생각나는 편지가 하나 있었다. 자신이 내 제자인데 늘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과 그때 나한테서 받은 별명이 <돌머리>였는데 지금 그 돌머리가 수학 선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내가 강원대학에 오던 해 받은 편지였다. 충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 그 당장 답장을 썼던 일까지 떠올랐다.
저녁을 사겠다고 찾아온 그 제자가 바로 그 편지의 주인공이었다. 제자가 운전을 할 사람으로 부인까지 동반한 자리라 <돌머리>란 별명까지는 거론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편지를 쓴 사람이 그 제자였다는 것만은 확인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친구와 가진 술자리에 젊은이 하나가 다가와 합석을 했다가는 그 술값을 치루고 나갔다. 내 옛날 제자라면서 자기가 나를 잊지 못하고 있는 사건 하나를 얘기했다. 어쩌다 수업 시간에 배탈이 나 교실에서 큰 실례를 했는데 내가 자기를 데리고 수돗가에 가 몸을 씼어준 뒤 옷까지 얻어다 입혀줬다는 얘기였다.
물론 나는 그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제자가 돌아간 뒤 나는 친구와 이런 얘기를 나눴다. 어쩌면 지금 그 제자는 그때 내가 그렇게 해줬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나 듣기 좋게 그 일을 미화해 얘기했는지도 모른다는.
지난 해 오월, 34년 전 내가 담임을 했던 제자들이 스승의 날을 앞두고 반창회를 춘천에서 한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서른 대여섯 명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당시 우수반 학생들답게 사회에 나가 꽤 괜찮은 위치에서 나름의 역할들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제자들은 그때 담임인 나를 앞에 놓고 자신들의 학창 시절 추억 한 토막씩을 풀어놨다. 나로서는 상당해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내 앞이라 되도록 듣기 좋은 기억들만 풀어내고 있었지만 듣는 나로서는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어찌 그들에게 좋은 기억들만 있을 수 있겠는가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업을 한다는 제자 하나가 일어났다.
졸업식이 끝나고 내가 교실에서 졸업장을 수여하는 시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내가 한 사람씩 앞에 세우고 졸업장을 나눠주면서 하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졸업장을 받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그 동안 담임이 기억했던 일이나 그 학생의 특기 등을 들춰내 덕담으로 주었다는 얘기까지는 좋았다.
그 제자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전 나한테는 무슨 얘기를 할까 매우 조마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 차례가 돌아와 내 앞에 서자 “음, 박광일...” 이렇게 이름을 불러놓곤 눈을 맞춘 뒤 그냥 졸업장만 건네고 말더란 얘기였다.
자기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때 담임선생이 왜 자기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그게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며 나한테 그 대답을 듣고 싶다는 주문이었다.
그때 일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제자의 얼굴에는 그때 자신에 대해 담임선생이 아무 말도 안 해준 일에 대해 꽤 많이 서운했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교직 생활 40년을 돌아보면서 나는 이렇게 늘 얼굴이 붉어질 때가 많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입었을 어린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자책감이다.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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