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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부 대국 / 도월화
백연심
2006. 9. 5. 15:40
부부 대국(夫婦 對局) / 도월화
퇴근 시간이란 짤막한 글을 써본 적이 있다. 내용은 남편의 퇴근 시간이 늘 늦은데 대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일찍 귀가한다. 걸어서 1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라서 낮이 긴 절기에는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는 편이다.
언젠가 남편 회사 직원 가족 모임이 있었다. 우리가 평소 존경하는 상관 한 분이 남편에게 물었다.
"요즘 일찍 집에 들어가던데 주로 뭐하면서 보내요?"
남편의 대답이
"연속극 봐요."
하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나중에 거기 있었던 한 부인이 나에게
"정말 연속극 보셔요?"
해서 그런 거 전혀 안보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웃었다.
지난여름부터는 거의 매일 저녁 한번 씩 바둑을 둔다. 급수 차이가 워낙 큰 부부 대국이라 처음에는 흑 9점 화려하게 놓고 두었다. 그래도 만방으로 깨어졌다.
남편이 '아생연후 살타'라고 가르쳐 줬다.그래서 두 집을 내기 쉬운 네 귀를 중심으로 겨우 두 세 집 내면 백은 외곽을 쌓아서 흑의 숨통을 단단히 조여 둔다. 중앙은커녕 바로 옆집에 마실갈 길도 끊어지니 한두 귀에 옹색하게 살아봐도 불계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다 못한 남편은 또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고 바둑 지도를 했다. 과연 그렇긴 해도 워낙 강적 앞에서는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 죽은 흑 돌의 시체가 즐비하다 보니 흑 집을 다 메우고도 죽은 돌이 남아 빚쟁이 형국이 된다. 그러는 동안 당한 수모는 정말 눈물겨웠다.
"고수바둑하고 대국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아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감지덕지다.
"고수바둑하고 한번 두려면 양말 빨아 대령하는 것도 영광으로 알아야 하는 법"
이라 한다. 이번에도 지그시 참고 조용히 바둑만 둔다. 그 양말은 어차피 우리 집 세탁물이다. 바둑 두기를 그만두겠다는 말만 안하면 했다.
10여 년 전에도 이런 상황이 한번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같은 동네에 바둑 친구가 있었다. 남편들이 출근하고 나면 아이 데리고 한 집에 모여서 하루 종일 둔 적도 많았다. 김치 담글 때도 배추를 두 집 것 같이 소금에 절여 두고 바둑을 뒀다. 헤어질 때면 적당히 절여졌다. 씻어 헹궈 소쿠리에 담아 집에 돌아가 자기 집 입맛대로 버무리기만 따로따로 했다.
주말에는 급수가 비슷한 남편들끼리 두고 또 급수가 비슷한 우리 여자들끼리 한밤중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바둑을 두었다. 두 집 아이들은 옆방에 모두 모여서 노느라 신이나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4명이 함께 그야말로 부부대국(연기바둑)을 했다. 우리 집 남편이 한번 두고 다음에 저쪽 집 남편이 두면 그 다음 차례에 내가 두고 또 저쪽 집 부인이 두는 식이다. 급수가 낮은 아내들이 엉망으로 두면 그나마 좋은 상황으로 호전시키려고 남편들이 곤혹스러워 했다. 같은 편이라고 가르쳐 주면 둘이서 두는 효과 밖에 안 나므로 절대로 입은 다물고 있어야 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 호시절이 끝났다. 그 이후로 같이 둘 상대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기원에도 못 갔고 남편만 붙잡고 두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상대를 해주던 남편은 고수 바둑 모양 버린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그 후 10년 이상 우리 집에는 바둑판이 사라졌다.
지난여름 어쩌다가 바둑판을 다시 내놓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남편이 그 때보다는 훨씬 우호적인 태도로 대국에 임해준다. 두 점 머리는 두드려라. 좌우 동형에는 중앙이 급소다 .곡사는 산다. 오궁도화는 죽는다. 여러 가지 바둑 격언을 동원한 남편의 훌륭한 지도대국 덕분에 흑 7점을 놓고 두는 바둑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하루는 남편이 풀이 죽어 늦게 집에 돌아 왔다. 귀가 길에 자기보다 급수가 낮은 친구와 기원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연속해서 지고 말았단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수바둑 모양 버린 장본인이 나라고 할까봐 얼른 내가 먼저 말했다.
"당신 나이에 바둑 잘 둔다고 이창호 되나? 마누라 바둑지도나 열심히 하면 손해는 안 볼 거예요. 대개 무슨 교육이든 제자보다 스승이 더 열심인 법이죠?"
했더니 놀랍게도
"그래보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전에 백돌을 잡고 남편과 대국 하겠다는 야심은 애당초 없다. 다만 네 귀에 흑 네 점 소박하게 놓고 둘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그 날이 오면 남편에게 숙성된 포도주 한 병과 예쁜 꽃 한 송이를 선물하리라. 감사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카드 한 장과 함께.
(1995)
퇴근 시간이란 짤막한 글을 써본 적이 있다. 내용은 남편의 퇴근 시간이 늘 늦은데 대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일찍 귀가한다. 걸어서 1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라서 낮이 긴 절기에는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는 편이다.
언젠가 남편 회사 직원 가족 모임이 있었다. 우리가 평소 존경하는 상관 한 분이 남편에게 물었다.
"요즘 일찍 집에 들어가던데 주로 뭐하면서 보내요?"
남편의 대답이
"연속극 봐요."
하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나중에 거기 있었던 한 부인이 나에게
"정말 연속극 보셔요?"
해서 그런 거 전혀 안보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웃었다.
지난여름부터는 거의 매일 저녁 한번 씩 바둑을 둔다. 급수 차이가 워낙 큰 부부 대국이라 처음에는 흑 9점 화려하게 놓고 두었다. 그래도 만방으로 깨어졌다.
남편이 '아생연후 살타'라고 가르쳐 줬다.그래서 두 집을 내기 쉬운 네 귀를 중심으로 겨우 두 세 집 내면 백은 외곽을 쌓아서 흑의 숨통을 단단히 조여 둔다. 중앙은커녕 바로 옆집에 마실갈 길도 끊어지니 한두 귀에 옹색하게 살아봐도 불계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다 못한 남편은 또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고 바둑 지도를 했다. 과연 그렇긴 해도 워낙 강적 앞에서는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 죽은 흑 돌의 시체가 즐비하다 보니 흑 집을 다 메우고도 죽은 돌이 남아 빚쟁이 형국이 된다. 그러는 동안 당한 수모는 정말 눈물겨웠다.
"고수바둑하고 대국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아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감지덕지다.
"고수바둑하고 한번 두려면 양말 빨아 대령하는 것도 영광으로 알아야 하는 법"
이라 한다. 이번에도 지그시 참고 조용히 바둑만 둔다. 그 양말은 어차피 우리 집 세탁물이다. 바둑 두기를 그만두겠다는 말만 안하면 했다.
10여 년 전에도 이런 상황이 한번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같은 동네에 바둑 친구가 있었다. 남편들이 출근하고 나면 아이 데리고 한 집에 모여서 하루 종일 둔 적도 많았다. 김치 담글 때도 배추를 두 집 것 같이 소금에 절여 두고 바둑을 뒀다. 헤어질 때면 적당히 절여졌다. 씻어 헹궈 소쿠리에 담아 집에 돌아가 자기 집 입맛대로 버무리기만 따로따로 했다.
주말에는 급수가 비슷한 남편들끼리 두고 또 급수가 비슷한 우리 여자들끼리 한밤중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바둑을 두었다. 두 집 아이들은 옆방에 모두 모여서 노느라 신이나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4명이 함께 그야말로 부부대국(연기바둑)을 했다. 우리 집 남편이 한번 두고 다음에 저쪽 집 남편이 두면 그 다음 차례에 내가 두고 또 저쪽 집 부인이 두는 식이다. 급수가 낮은 아내들이 엉망으로 두면 그나마 좋은 상황으로 호전시키려고 남편들이 곤혹스러워 했다. 같은 편이라고 가르쳐 주면 둘이서 두는 효과 밖에 안 나므로 절대로 입은 다물고 있어야 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 호시절이 끝났다. 그 이후로 같이 둘 상대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기원에도 못 갔고 남편만 붙잡고 두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상대를 해주던 남편은 고수 바둑 모양 버린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그 후 10년 이상 우리 집에는 바둑판이 사라졌다.
지난여름 어쩌다가 바둑판을 다시 내놓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남편이 그 때보다는 훨씬 우호적인 태도로 대국에 임해준다. 두 점 머리는 두드려라. 좌우 동형에는 중앙이 급소다 .곡사는 산다. 오궁도화는 죽는다. 여러 가지 바둑 격언을 동원한 남편의 훌륭한 지도대국 덕분에 흑 7점을 놓고 두는 바둑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하루는 남편이 풀이 죽어 늦게 집에 돌아 왔다. 귀가 길에 자기보다 급수가 낮은 친구와 기원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연속해서 지고 말았단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수바둑 모양 버린 장본인이 나라고 할까봐 얼른 내가 먼저 말했다.
"당신 나이에 바둑 잘 둔다고 이창호 되나? 마누라 바둑지도나 열심히 하면 손해는 안 볼 거예요. 대개 무슨 교육이든 제자보다 스승이 더 열심인 법이죠?"
했더니 놀랍게도
"그래보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전에 백돌을 잡고 남편과 대국 하겠다는 야심은 애당초 없다. 다만 네 귀에 흑 네 점 소박하게 놓고 둘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그 날이 오면 남편에게 숙성된 포도주 한 병과 예쁜 꽃 한 송이를 선물하리라. 감사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카드 한 장과 함께.
(1995)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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