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이 있는 시

[스크랩] 명작 / 고재종

백연심 2008. 1. 28. 15:04
명작 / 고재종 (1957~)


옻칠쟁이가 있었다네. 옻칠 하나 내기 위하여 일찍이 생의
희비(喜悲)를 반납한 사람이 있었다네.철에 맞춰 칠을 따고
칠을 개느라, 너무도 피곤하면 찾아오는 온 몸의 옻독에 갖
은 진저리를 쳤다지. 먼지 한 점 바람 한 올에 행여 다 된 때
깔 망칠세라, 대밭 속 토굴을 파고 암거를 했다지. 그러고는
생칠을 거르고 정제칠을 개어선 무늬칠이건 색깔칠이건 수
없이 반복하는데, 그러해도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에
라이 손가락을, 손가락을 잘라선 그 피를 칠 속에 넣었다는
옻칠쟁이!

생의 극점을 녹여 얻은 명작엔 전생(轉生) 활불(活佛)의 숨
결 묻어 있으리.

[해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계 속에서 제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쏟아 넣고서야
만족할 만한 옻칠을 얻을 수 있었다는 옻칠쟁이의 얘기는 한낱 비웃음거리 밖
에 되지 않을 것인가. 모든 것이 소외된 경제.정치 논리에 내맡겨진 세계 속에
서 그러한 장인(匠人)적 노력은 일단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소수일지라도 생의 희비까지 반납하면서 얻은 하나의 명작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은 자기완성을 향한 치열한 도덕적 내면성이다. 명작의 아우라
는 우주의 본질과 하나 된 장인의 절대적 자아의 숨결 속에서 그 신묘성을 드
러내는 것이다-시인 임동확

*광주일보.17071호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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