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이 있는 시

[스크랩] 길 / 박영근

백연심 2008. 1. 28. 14:50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박영근 제5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2002)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1981년 『반시(反詩)』 제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취업공고판 앞에서』(1984), 『대열』(1987), 『김미순傳』(1993),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등이 있음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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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사는 일의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밥짓는 연기도 없고
개짓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또는 물질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종이 시작되면서
주인이 버리고 떠난 빈집의 댓돌 위에는
먹고무신 한 켤레만이 추억처럼 덩그라니 남았습니다.
나팔꽃의 웃음마저 사라진 빈집에서 불꺼진 아궁이와 
부뚜막을 묵묵히 지키며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를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날 정신없이 끌고 온 길들 위에 서서
화자는 아득한 자신을 돌아보았나 봅니다. 
산그림자가 殘雪을 지우고 있는 배경 너머로
옹이가 박힌 삶의 흔적이 빈집처럼 쓸쓸하기 그지없었겠지요.
나를 끌고 갔고, 또한 내가 정신없이 끌고 다닌 길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빈 집의 이력과 내가 끌고 온 길들의 旅程이 하나로 
겹쳐지면서 우리에게 가만가만 묻고 있습니다. 
그 길이 맞느냐고.  [양현근]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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