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빈집 / 기형도

백연심 2008. 1. 28. 14:49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9년 별세  
시집 <입 속의 검은 입>  

----------------------------------------
[감상]
그랬을 것이다. 불꺼진 방에 
어디선가 농담처럼 어둠이 찾아들면
책상머리에 앉아서 몇 개피의 담배를 피워댔을 것이고,
그리고 몇 잔의 커피를 동행삼아 점점 짙어가는
골목을 지그시 응시했을 것이다. 
허망한 기억의 절편들을 하나씩 짜맞추며, 
왜 그렇게 너는 못났느냐고 오목가슴을 쳐대며,
혼잣말을 무수히도 서성댔을 것이다.
보고싶다고, 오래도록 보고싶다고...
목숨같은 사랑을 잃었는데,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시를 쓰는 일, 먹가슴을 풀어내는 일,
밤새도록 목숨을 앓느라 짧아진 밤이며,
갈곳 모르고 창 밖을 방황하는 겨울안개여...
사랑이란 이토록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을까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며,
밤새도록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이여
밤새 끙끙 앓고도 
출구를 찾지 못한 생각들이 나를 가뒀네
아니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나 이제 
그 힘든 사랑의 문을 잠그려 하네. [양현근]
출처 : 시의 향기로 여는 마당
글쓴이 : 김영천 원글보기
메모 :